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69화 (외전) (369/446)

외전 - 대관식 [1]

[1]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분홍색 빛깔이 감도는 하늘은 언뜻 보기에 꽤 예뻐 보였다.

눈을 뜨고 있던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 보며 의아해 했다.

이제 막, 정오가 지난 시점이었으니까.

*

하늘의 빛깔이 변했다.

갑작스러운 이상 현상에 많은 이들이 당혹스러워했다.

필립스 백작령을 포위하고 있던 자들은 붉어진 하늘이 특수한 마법의 전조 증상이 아닐까 의심했다.

허나 마법에 의한 현상이라기엔 대기에 흐르는 마나는 여전히 정적이었다.

이상 현상의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필립스 백작령을 포위한 귀족들은 하늘의 붉어짐을 그저 일시적인 기현상 정도로 취급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차분함을 가장하려 해도, 붉은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있노라면 뭐라 형용키 힘든 불쾌한 느글거림이 스물스물 흘러나와 호흡을 흩트리고는 했다.

그렇게 억지로 불안을 억눌러 가며 포위망을 유지하던 자들에게, 마침내 비보가 전해졌다.

남부에 위치한 교단의 중심부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남부에 관한 소식은 믿기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고, 더군다나 부정확했다.

정확한 피해의 규모는커녕 사태의 종결 여부조차 알 수가 없었기에, 필립스 백작령을 포위한 귀족들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회군하겠소."

남부에 너무나도 큰 이변이 발생했다.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급변할지 모르는데 필립스 백작령을 압박하기 위해 병력과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 그리 판단한 귀족 한 명이 회군 의사를 밝혔다.

급변하는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가용할 수 있는 전력을 되도록 결집시켜 놓는 쪽이 유리했다.

그렇기에 필립스 백작령을 포위한 이들 중 병력 일부나 전부를 회군시키고자 하는 귀족들이 점차 늘어났다.

회군에 반발하는 귀족들 또한 있었으나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필립스 백작령을 포위하고 있던 군단은 강력한 구심점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한 번 균열이 일자 빠르게 흩어졌고, 종국에는 최소한의 감시 병력만이 남게 되었다.

바로 그 시점까지도.

필립스 백작령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정보를 얻을 수 없으니 필립스 백작은 외부의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필립스 백작을 비롯한 백작령의 사람들이 흩어지는 포위군을 바라보며 당혹감을 내비치는 사이.

필립스 백작령에서 머물던 엘프, 미네르는 점점 더 짙어져 가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어머니의... 축복이..."

세계수의 축복은 본래 엘프의 영역을 넘어 대륙 전역에 번져있었다.

엘프의 영역에 비해 그 농도가 희박하여 뚜렷하게 인지하기 힘들 뿐, 세계수의 축복은 까마득한 세월 동안 마경의 침식으로부터 대륙을 지켜주었다.

헌데 미약하게나마 대지를 뒤덮고 있는 세계수의 축복이 점점 더 밀려나고 있다는 걸... 미네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침식...?"

부정한 기운에 의해 세계수의 축복이 밀려난다.

이는 곧 대륙과 마경의 경계선이 대륙 쪽으로 밀려나고 있음을 뜻했다.

"어째서...?"

세계수의 힘은 건재했다.

악신의 영향력이 강대해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전, 악신의 영향력으로부터 대륙을 수호하던 두 축 중 하나가 완전히 붕괴했다.

이로 인해 '균형'이 무너져서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음을, 미네르가 알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이대로면 대륙은 곧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대지는 물론이고 엘프들의 영역도 위험해졌다.

어떻게든 '균형'을 되찾아야 했으나, 붉어진 하늘 아래서 미네르는 그저 무력했다.

"..."

마경이 대륙을 침식하기 시작했음을 정확하게 알아챈 것은 미네르 혼자였다.

하지만 필립스 백작령의 다른 이들도 끈적하게 비치는 붉은 하늘 아래서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꼈다.

외부에서 정보를 얻을 수도 없었던 탓에 필립스 백작령의 사람들은 창살에 갇힌 것만 같은 불안과 답답함을 계속해서 견뎌야 했다.

암울함이 감도는 필립스 백작령에서 진실되게 긍정적인 자는 오직 단 한 사람, 로필렌뿐이었다.

"그분께서 경고하신 대로 되었나."

레이는 붉은 하늘이 대전쟁의 징조일 것이라고 로필렌에게 경고했었다.

그리고 레이가 경고했던 이질적인 붉은 하늘이, 지금 로필렌의 시야를 가득 덮고 있었다.

불길한 경고가 현실화되었으나 그럼에도 로필렌은 평소처럼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에는 그분께서 안주하길 택하지 않으셨군."

로필렌은 리실로테 레코드를 비롯한 리실로테가 남긴 비밀스러운 유산에 접근 가능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 덕분에 로필렌은, 리실로테가 남긴 단편적인 기록들로부터 하르시아라는 영웅이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몽상가에 가까운 인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르시아가 겨누었던 정확한 지향점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로필렌은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하르시아가 바랐던 것은 단순한 평화가 아니었다.

"새로이 시작되는군."

많은 것들이 새로이 정립될 것이다.

그리고 혁명의 첫걸음은 언제나 구체제의 붕괴였다.

로필렌은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환히 웃었다.

대륙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석양을 떠올렸다.

허나 로필렌만은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여명을 떠올렸다.

*

새로운 황제를 모셔야 한다.

제국의 서부와 북부가 주축이 되어 진행되던 귀족 회의에서, 디오리카는 그리 주장했다.

디오리카의 불충하고 과격한 주장은 곧바로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디오리카의 주장은 조심스럽게나마 고려해볼 만한 선택지이기는 했으나, 아직 모든 정보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함부로 입 밖에 낼만한 내용은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 회의에 참석한 다수의 귀족들은 현 상황을 비교적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변경백이자 추기경인 알렉산데르가 전사했다고는 하나 사도 또한 어떻게든 제거되었을 것이라고, 그렇게 낙관적인 생각을 지닌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대놓고 표현을 하지는 않았으나 이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실종된 황자를 구출해서 확보하고 잔존한 남부 세력의 협력을 얻어낼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우리'가 상황을 주도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조금만 더 남부의 상황이 정확하게 파악된다면 과감하게 병력을 움직여볼 만하다고 각을 재고 있는 이들이 다수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혼란 속에서 남부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성검의 주인인 안소니우스의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판단을 더욱 곤란케 했다.

안소니우스가 악신의 사도로 변절했다는 뜬소문이 들려오기도 했으나, 이를 믿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렇게 며칠 동안 눈치 싸움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디오리카는 끌려가다시피 본가로 되돌아가서 알슈테인 공작에게 질책을 받아야 했다.

"제정신인가? 함부로 그런 망발을 입에 담다니...!"

"..."

"공개적인 자리에서 역적이자 학살자를 추종하는 발언을 해!! 감히!!"

황도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해 죽은 사람이 몇인가.

메테오의 후폭풍으로 인해 쓸려나간 민간인의 숫자는 셀 수도 없이 많았고, 귀족들 또한 다수 사망했다.

제국의 귀족 가문 중 태반이, 황도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해 가문의 사람들을 잃었다.

이로 인해 황성을 점거하고 있는 역적 무리에게 강렬한 증오를 품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이건 이성의 영역이 아닌 감정의 영역이었고, 또한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였다.

남부의 사태와 별개로, 황성을 점거한 역적을 찢어죽이기 위해 두 눈을 붉게 충혈시키고 칼을 가는 자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디오리카의 돌발적인 주장은 알슈테인 공작가를 곤란케 만들기 충분했다.

"대체 저의가 무엇인가?!"

가문 사람들끼리 모여 은밀히 나누어도 될 이야기를 굳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발언해 물어뜯길 명분만 제공하게 되었다.

알슈테인 공작의 격분은 타당했고 디오리카 또한 굳이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알슈테인 공작은 디오리카에게 근신 처분을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그 역적들과 함께할 수 없네."

"..."

명분의 문제를 넘어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증오와 복수심이 제국 전역에 넘쳐나는 이때, 황성을 점거한 반역도들과 손을 잡자는 소리를 잘못 꺼냈다가는 제아무리 대단한 세력이라도 등에 칼 맞기 십상이었다.

현 시점에서 반역도의 처벌은 실리를 따져가며 저울질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커다란 출혈을 감수한다 해도 황성을 점거한 반역도들의 처벌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다.

설령 그게 불가능하다고 해도, 반역도들과의 야합을 감내할 바에야 죽음을 각오한 저항을 이어가겠다고 소리칠 세력들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

알슈테인 공작 또한 머리가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남부를 중심으로 세력 구도가 재편될 줄 알았는데, 갑작스레 들려온 비보가 모든 예상을 무너뜨렸다.

안개 속을 헤매는 것만 같은 난잡한 정세 속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힘들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반역도들과의 야합이 주류 여론이 되려면 대륙 전체가 절멸의 위협에 처할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쯤은 되어야 증오와 복수심을 머금은 세력들 또한 명분보다 실리를 앞세워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언행을 주의하게. 제국의 어느 누구도 그들을 정당한 찬탈자라 인정하지 않을 터이니."

알슈테인 공작이 디오리카에게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었다.

디오리카 또한 자신의 발언이 부적절했음을 사죄하며 물러났다.

그후, 알슈테인 공작은 남부의 상황을 더욱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가용 가능한 병력을 움직일 것을 가신들에게 지시했다.

*

황실 마탑.

황실 마탑은 특수한 목적을 지니고 창설된 집단인 만큼, 다른 마탑에 비해 조직 구조가 덜 수직적이었다.

상호 견제가 필요한 조직이다보니 황실 마탑에서는 마탑주라는 직위가 존재하지 않았고, 그 대신 9인으로 구성된 최고 위원이 수뇌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간간이 숫자 변동이 있기는 하나 대체로 최고 위원의 숫자는 9인으로 유지되었으며 그들은 황실 마탑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헤이든은 그 9인의 최고 위원 중 한 명이었다.

제국의 중앙 귀족 가문인 '체펠린' 출신의 젠트리였던 헤이든은 재능을 인정받은 뒤 본가의 양자로 편입되어 귀족이 되었다.

그 후로도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황실 마탑의 중추가 된 헤이든은, 지금 이 순간 황도를 감싼 결계 앞에 서 있었다.

"흠..."

역시 방위 기능이 제대로 복구되지 않은 탓에 황도의 결계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침입자를 감지하는 기능만큼은 빈틈없이 전개되어 있다고, 헤이든은 참 담담하게 눈앞의 결계를 평가했다.

황도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해 헤이든이 속한 체펠린 가문의 식솔들도 다수 목숨을 잃었다.

허나 헤이든은 그에 관해 대단한 슬픔이나 증오 같은 감정은 느끼지 못 했다.

헤이든과 체펠린 가문은 필요에 의해 서로를 이용했을 뿐, 그 관계 자체는 삭막했다.

감정적 교류도 크게 없었던 본가에 애증을 품어봤자 무엇하냐고, 헤이든 자신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츠즈즉!

찾아온 손님을 맞이해줄 생각인지 결계 일부가 걷혔다.

헤이든은 차분하게 결계 안으로 발을 들였다.

계속해서 앞으로 걷자 황성이 시야에 온전히 들어왔다.

헤이든은 자신이 황성 안으로 안내받을 것이라 여겼으나, 이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황성의 정문에서 푸른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소녀가 헤이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헤이든은 의미를 알기 힘든 웃음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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