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
거대한 굉음이 교황청 일대를 울렸다.
그 직후, 축복만이 가득했던 교황청사의 서쪽 기둥이 무너져내렸다.
청사 일부가 무너져내린 탓에 발생한 분진이 시야를 뒤덮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많은 이들이 혼란과 공포를 느꼈다.
허나 모두가 허둥거리며 시간을 낭비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다수의 군단이 출정을 위해 교황청 인근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추기경, 알렉산데르가 대기하고 있던 군단 중 일부를 이끌고 교황청으로 움직였다.
교황청이 공격당해 무너진 것이라면 이건 분명 초유의 사태다.
허나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것치고는 알렉산데르의 표정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언뜻 보기에 알렉산데르의 표정은 무기력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무너진 기둥을 향해 다가갈수록 알렉산데르는 점점 더 날카롭게 감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무너진 기둥 너머로 번져 나오는 심연처럼 깊고 어두운 악의가, 알렉산데르를 강제로 각성시켰다.
"..."
알렉산데르는 교황청사 내부로 진입하지 않고 걸음을 멈췄다.
대충 검을 몇 번 휘둘러 끝낼 수 있는 사태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알렉산데르가 멈춰 서자 군단 또한 진형을 갖추고 전투를 준비했다.
저 너머에서 너울지는 악의는 계속해서 더 뚜렷해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흩날리는 분진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
군단의 모두가 기함했다.
모습을 드러낸 건 악의의 덩어리였다.
온몸을 악마의 유물로 뒤덮은 저주받은 악의의 덩어리였다.
너무나도 역겹고 끔찍한 존재의 출현에, 군단이 강렬한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군단의 누구도 눈앞의 존재가 과거 성검의 주인이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 했다.
허나 알렉산데르만은... 유물에 가려진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알렉산데르는 약간 놀랐다는 얼굴로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결국 피식 웃었다.
"그래."
알렉산데르는 편히 웃으며 마음의 번잡함을 전부 벗어던졌다.
그리고 가뿐해진 마음으로 검을 뽑았다.
"차라리 이게 낫군."
모순과 번민을 곱씹으며 무력함에 취하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알렉산데르는 참으로 오랜만에 검을 휘두르는데 순수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
무너지는 교황청을 무대로 섬광과 악의가 섞여들었다.
*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 아래.
디오리카는 남부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남부에서 전해진 소식은 단 석 줄로 간결하게 요약됐다.
교황청 붕괴.
사태 종식을 위해 참전한 알렉산데르 추기경 전사.
그 외의 피해 규모 현재 정확히 파악 불가.
피해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사태 종식에 실패했다는 의미였다.
남부로 향했던 황실의 로얄가드와 황자의 생사조차 현재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제국의 서부와 북부가 주축이 되어 진행되던 귀족 회의에 참가했던 이들은 갑작스레 남부에서 전해진 소식을 이해하지 못 했다.
그들은 도저히 지금 상황을 쉽사리 믿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모두가 반쯤 얼을 타며 멍청한 수군거림을 이어가고 있을 때.
디오리카가 홀로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허나 디오리카는 개의치 않았다.
디오리카는 진이 빠질 정도로 한참을 웃어댔다.
그러다 간신히 웃음을 그치고는 주변의 귀족들을 돌아보았다.
디오리카가 두 손을 가볍게 마주쳤다.
"자, 다들 준비하시오."
"..."
귀족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디오리카를 바라보았다.
디오리카는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듣느냐고 타박하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탁자를 쾅 내려쳤다.
"새로운... 새로운 군주를... 모실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소?"
그 무엇도 아닌...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오. 황도에 계시는 유충하신 황제 폐하를 모실 준비를 하여야지."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제 막 정오가 지났거늘 하늘에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아마도, 마경의 침식을 막아내던 대륙의 두 축 중 하나가 무너졌기에 찾아오는 현상일 터다.
이제야 막연하게나마...
디오리카는 루나가 전했던 경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이게 레이의 선택이었다.
레이는 자신이 베풀었던 모든 것을 거두어갔다.
인류와 대륙을 지탱하는 대부분의 기둥을 파멸시키기고 이 대륙을 지옥에 몰아넣었다.
대륙을 살아가는 이들을 불길 속에 가두고 모든 선택지를 철저하게 무너뜨렸다.
그리고,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단 하나의 활로만을 열어주었다.
앞으로 찾아올 지옥 속에서 최소한의 존엄을 갖추고 인간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그녀'에게 삶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인류와 대륙을 지탱하던 대부분의 기둥이 파멸을 맞이한 현재.
앞으로 찾아올 지옥을 이겨낼 만큼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는 이제 '그녀'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생존을 위해서는 그녀에게 굴복해야 했고, 그녀가 내세울 황제를 인정해야 했다.
이를 거부했을 때 찾아올 결과는, 종말뿐이었다.
"이제 그들은 반역도가 아니오. 이제는..."
디오리카가 자신을 바라보는 귀족들을 향해 비참한 광소를 머금고 단언했다.
"그들이 제국이오."
*
하늘이 붉었다.
처음에는 옅은 분홍빛이 감돌던 하늘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짙어졌다.
붉은 하늘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 했다.
황성에서 생활하고 있는 레아는 왜 하늘이 푸르지 않고 붉어진 채 유지되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하늘의 색깔보다도 더 궁금한 게 많았다.
레아는 오늘 굉장히 예쁘지만 굉장히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몸에 가득 걸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옷이 예쁘다고 좋아했는데,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턱 막혀서 빨리 벗고 싶었다.
그래도 허락받기 전에는 옷을 벗지 않겠다고 엄마와 약속했기에 열심히 참았다.
레아는 두툼한 옷 때문에 뒤뚱뒤뚱 걸으며 황성의 정문으로 향했다.
황성의 정문에는 낯선 사람들이 몇 명 보였다.
그리고 루나의 얼굴도 보였다.
"..."
레아는 여전히 루나가 불편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긴장이 되어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으나, 그래도 레아는 용기를 가지고 루나에게 다가갔다.
"...루나 언니?"
"..."
루나가 레아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루나의 눈동자에 적의는 맺혀 있지 않았다.
레아는 약간 마음을 놓으며 루나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바라봤다.
루나가 들고 있는 물건은... 보석 같은 게 박혀있는, 예쁘고 작은 관이었다.
"루나 언니... 그건 뭐야...?"
레아가 어색하면서도 루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건 루나와 친해지기 위한 레아 나름대로의 노력이었다.
루나는 잠시 레아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레이가, 너를 위해 준비한 마지막 선물."
"오빠 선물?"
오빠가 준비한 마지막 선물?
레아는 오랫동안 오빠를 보지 못 했기에, 오빠가 드디어 화를 풀고 선물을 준비해준 건가 싶어 기뻤다.
물론 '마지막'이란 수식이 붙어있는 것은 불안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오빠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레아는 해맑게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리 해맑게 웃는 레아의 머리 위에, 루나가 손에 쥐고 있던 관을 씌워주었다.
레아가 머리 위에 고정된 관을 느끼고 눈을 깜박였다.
다음 순간, 레아를 마주 보고 무릎을 꿇은 루나가...
"이제 당신이..."
레아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제국의 주인입니다."
붉게 빛나는 하늘 아래.
새로운 황제의 대관식이 치러졌다.
대관식의 참석한 모두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황제의 앞날을 축복했다.
레아는 어서 이 재미 없는 놀이를 끝내고 오빠를 보고 싶었다.
- 홍등가의 소드마스터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