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65화 (365/446)

365화

"..."

필립스 백작은 단검을 매만지며 자기 실책을 되뇌었다.

지나치게 안이하고 낙관적이었던 과거의 모습을 돌아봤다.

백작령에서 태어난 레이는... 분명 불세출의 재능을 지닌 인재였다.

두각을 드러낸 레이는 필립스 백작의 지원 아래 고아들을 보살피며 성장시켰고, 그 고아들 중에서도 좋은 인재가 툭툭 튀어나왔다.

필립스 백작도 뭐가 자꾸 튀어나오니까 무리를 하면서도 도저히 지원을 끊지 못 했다.

그러던 중 '레아' 때문에 레이와 갈등을 빚어 갈라설 뻔도 했으나... 그 이후에는 모든 일이 잘 풀렸다.

레이는 점점 더 명성을 쌓아갔고 필립스 백작령 또한 레이의 도움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했다.

양날의 검이라 생각되었던 것들은 결과적으로 전부 이득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행운이 계속되었기에, 그 행운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았다.

거듭된 행운과 성공이 필립스 백작의 판단력을 그토록 흐리게 만들었다.

필립스 백작은 갈수록 낙관적으로 변했고 영주로서의 책무를 망각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필립스 백작의 낙관이 결국 파멸을 불러왔다.

본인을 위해서라도, 딸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레이를 위해서라도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됐다.

"..."

필립스 백작은 단검을 계속해서 매만졌다.

날이 날카롭게 세워진 단검은 자꾸만 필립스 백작의 살갗을 파고들려고 했다.

그때, 모하메드가 손아귀를 뻗어 단검의 날을 움켜쥐었다.

"휴식을 좀 취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모하메드가 단검을 자기 품으로 끌어당기며 그리 물었다.

필립스 백작은 순순히 단검을 건네주면서도 고개를 살짝 저었다.

곧 백작령의 주요 인사들과 회의를 진행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마음이 답답하다고 해서 생략할 수는 없었다.

필립스 백작은 조금 더 집무실을 지키고 있다가 회의가 시작할 때가 되어 몸을 일으켰다.

잠시 뒤 회의가 시작됐고, 역시나 회의에서는 부정적인 보고만이 가득했다.

이틀 동안 소요 사태가 백작령에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발생했다.

불온한 움직임도 계속해서 감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로필렌이 전한 경고가 필립스 백작을 가장 암담하게 했다.

현재 필립스 백작령에 전개된 결계는 시그니 산맥에 흐르는 영맥의 마나를 끌어와 동력으로 삼고 있었는데, 백작령을 포위 중인 군단이 이를 눈치채고 조치를 취하려 하고 있었다.

외부의 간섭으로 인해 영맥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지면, 대규모 결계를 오래 유지하는 건 힘들었다.

결계가 무너지는 순간 백작령을 포위한 군단들도 더는 기다리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

판은 기울었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항복을 한다 해도 어차피 몰살당한다는 결과는 크게 변치 않을 터다.

이미 필립스 백작령은 모두가 반역 집단으로 지정되었기에, 주변을 포위한 군대가 필립스 백작령 전체를 불태우려 든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설령 포위를 뚫고 도주한다고 해도 피난할 곳이 없었다.

암담한 현실을 앞에 두고 분위기가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았다.

허나 그리 막막한 분위기 속에서, 오직 로필렌만이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로필렌은 레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신뢰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중상을 입고 회복하는 중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더군다나 루나가 황성을 점거했다잖는가.

황도 아래 흐르는 영맥을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어도 루나는 그곳에서 초월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다 계획이 있어 그렇게 행동했을 테니, 레이와 루나가 알아서 이것저것 잘 처리하고 사태를 잘 마무리 할 것이라 로필렌은 믿었다.

그러니 지금 필립스 백작령은 레이와 루나가 사태를 잘 마무리 할 때까지 시간만 충분히 끌면 됐다.

오직 로필렌만이 진지하게 그리 생각했다.

회의 막바지에 이르러, 필립스 백작은 목숨을 약간 연명하기 위한 몇 가지를 지시를 내리고는 회의를 끝냈다.

회의가 끝나고 나자 답답함이 몰려와, 필립스 백작은 한숨을 삼키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필립스 백작이 조용히 정원 옆을 거닐고 있자 클레멘스가 가까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백작님, 미네르라면... 한 사람 정도는 함께 은폐를 유지하며 포위를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결계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보내주겠네."

"...백작님, 제가 드리려던 말씀은..."

"내가 사라지면, 더욱 많은 사람이 더욱 고통스럽게 죽어야 할 것이네."

대체 필립스 백작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고문을 가할 것이다.

더군다나, 당장의 포위를 벗어난다고 해도 필립스 백작은 오래 도주할 수 없었다.

제국에 속한 군단은, 다른 이는 몰라도 필립스 백작만큼은 반드시 찾아내 붙잡으려 할 터다.

그리고 필립스 백작을 긍정적으로 맞이해줄 세력은 이 대륙에 어디에도 없었다.

"..."

필립스 백작의 의중을 이해한 클레멘스가 씁쓸함을 내보이며 물러났다.

필립스 백작은 홀로 걸음을 옮기며 바람을 느꼈다.

마지막이 찾아오기 전에 알레시아의 소식을 한 번이라도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불안함을 감추지 못 하고 서성이듯 걸음을 옮기던 필립스 백작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분홍색 빛깔이 감도는 하늘은 언뜻 보기에 예뻐 보였다.

이제 막 정오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제 막, 정오가 지난 시점이었다.

*

남부가 황도의 탈환을 결의했다.

남부는 외부 세력들의 협력 또한 반강제로 끌어냈다.

황도의 탈환을 결의한 이들이 황성을 점거한 루나를 얕잡아 본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속하게 황도를 탈환하기 위해 군단을 준비했다.

준비 속도를 높이다 보니 미흡한 부분도 없잖아 생겼지만 일단 진행시켰다.

기회가 기회이다 보니, 남부의 세력들은 일종의 흥분 상태에 빠져 있었다.

만약 루나가 홀로 황성을 버리고 도망친 후 작정하고 불규칙적인 파괴 행위를 시도한다면 꽤 아프게 데일 것은 분명했다.

전쟁을 앞두고 교황청은 약식으로 성전을 선포했다.

황성을 점거한 반역도를 이단이라 낙인찍어 명분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성전이 선포되었기에 성전을 위한 절차와 의식을 간략하게라도 치러야 했다.

성전을 이끄는 대표자가 성녀의 축복을 받는 것도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 중 하나였다.

이번 성전의 대표자는 안소니우스였다.

성검의 주인이자, 팔라딘의 내정자였으니 자격은 충분했다.

추기경 알렉산데르 또한 자격은 충분했으나, 본인이 먼저 대표자의 자리를 고사했다.

출전을 며칠 남겨두고, 안소니우스는 성녀의 축복을 받기 전에 성수로 몸을 적시는 의식을 치렀다.

의식을 치르며, 안소니우스는 레이와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 당시 레이는 성검을 강탈하고 안소니우스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성검을 안소니우스에게 돌려주고, 힘 조절까지 해가며 안소니우스를 살렸다.

성검이 레이에게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성물이기는 했다.

하지만 레이가 안소니우스를 죽이고 마지막까지 성검을 쥐었다면...

남부의 전력을 깎아내고 대륙에 더 큰 혼란을 유도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남부가 황도 탈환을 시도하는 시일이 지금보다 늦춰졌을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는 탈환 시도 자체가 아예 흐지부지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미래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안소니우스를 살린 레이의 판단은, 레이가 사랑하던 이들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보였다.

찰박!

간소화된 의식을 끝마친 안소니우스가 성녀가 머무는 곳을 향해 안내받았다.

안소니우스는 걸음을 옮기며 레이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를 곱씹었다.

기실 마지막 대화는 레이의 일방적인 정보 전달에 가까웠다.

[이건 결국 메커니즘의 문제다. 아니면 작용 기전의 문제라고 해야 하나.]

메커니즘이니 작용 기전이니...

안소니우스가 레이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 했기에, 레이는 더욱 풀어서 설명을 해주었다.

[신성력이 지닌 작용 원리... 혹은 특성이 지닌 문제라는 거다.]

[성직자는 엘-람의 축복을 받아 체내의 기운을 변질시키잖아. 그게 신성력이고, 체내에 흐르는 신성력 덕분에 너 같은 성직자들은 참 단단하고 건강하지.]

[그 잘난 신성력으로 병자들도 치료할 수 있고 말이야. 그리고 신성력이 지닌 특징 중 하나가 의료 행위에서 드러나.]

[환자가 심각한 부상이나 심각한 질환을 가지고 있을수록, 성직자에게 전달받는 신성력의 흡수 효율과 흡수 가능한 절대량이 증가하지.]

[환자를 검진할 때도 그러한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잖아.]

실력 좋은 성직자들은 환자의 전신에 신성력을 균일하게 퍼뜨린 뒤, 신성력이 가파른 속도로 흡수되는 지점을 찾아내 환자의 용태를 정확하게 진단한다.

[그 덕분에 여기는 MRI 같은 첨단 장비 하나 없이 배도 갈라보지 않고 병명을 아주 정확하게 진단하더군. 처음 봤을 때 아주 혁명적이었어.]

레이는 의학 수준이 어쩌니저쩌니 안소니우스가 이해 못 할 잡설을 짧게 늘어놓더니 본론으로 들어갔었다.

[엘-람과 평범한 성직자들의 관계와, 엘-람과 성녀의 관계는 달라.]

[성녀의 역할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 성녀는 너희같은 성직자들보다 엘-람의 힘을 보다 직접적으로 받아들여 대지를 정화해.]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성녀는 엘-람의 축복을 대지에 전해주는 일종의 파이프 역할을 하고 있는 거지.]

엘-람이 이 대지 위에 축복을 내리기 위해 박아넣은 뿌리. 성녀란 그런 존재였다.

[엘-람과 성녀의 관계는... 엘-람과 성직자의 관계보다, 성직자와 병자의 관계와 더 유사해.]

[너희는 단지 원래부터 몸에 지닌 힘을 엘-람의 축복을 받아 변질시킬 뿐이지만, 성녀는 엘-람의 축복을 자기 몸에 훨씬 직접적으로 내려받고 있으니까.]

[여기서, 신성력... 그러니까 엘-람의 축복이 지닌 작용 원리가 문제가 되는 거야.]

[너도 환자를 치료해본 경험이 있으니 알잖아. 건강한 놈한테 아무리 신성력을 전달해봤자 흡수 효율이 바닥을 긴다는 걸. 막무가내로 신성력을 밀어 넣어도 옆으로 줄줄 새는 게 대부분이지.]

[반대로 심각한 상처나 질환을 지닌 환자일수록, 흡수 가능한 신성력의 용량과 신성력의 흡수 효율은 급격히 증가한다.]

[...엘-람이 성녀라는 파이프를 통해 지상에 전달 가능한 힘은 한정적이야.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파이프에 밀어넣을 수 있는 힘이 한정적이지.]

[그런데 파이프를 지나며 발생하는 힘의 손실이 일정치를 넘어가면... 지상은 다시 마경에 침식되기 시작할 거야.]

[그러니까 파이프를 통과하며 발생하는 손실을 어떻게든 최소화해야 해. '효율'을 높여야 해. '효율'을... 높여야 한다고. 그렇다면 효율을 높일 방법이 뭐지?]

[안소니우스...]

성검을 안소니우스에게 쥐여준 레이는, 한발 물러서며 단언했었다.

[성녀라는 존재는 그 시작부터가 목적이 분명한 희생양이다.]

마왕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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