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64화 (364/446)

364화

두 명의 사절.

한 사람은 세리아, 다른 한 사람은 디오리카였다.

본래는 둘 다 알슈테인 가문 사람이었다. 허나 이제는 아니었다.

세리아는 더 이상 알슈테인이라는 성을 쓸 수 없었다.

디오리카는 평소처럼 여유와 품위를 갖춘 모습으로 황도를 찾았으나, 세리아의 행색은 그렇지 않았다.

지미는 황도로 다가오는 세리아를 가만히 주시했다.

세리아는 변변찮은 복식 위로 어떤 무장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몸에 두른 금속은 마나에 반응해 폭발하는 형구였고, 주요한 힘줄이 몇 개 끊어졌는지 걷는 움직임은 굉장히 부자연스러웠다.

지미는 겉으로 보이는 세리아의 상태를 파악한 뒤 결계 가까이로 다가갔다.

결계를 사이에 두고 지미와 마주한 디오리카는 먼저 제국의 이름을 내세우더니, 반역도 우두머리와의 접견을 요구했다.

지미는 디오리카의 요구를 듣고 잠시 자리를 지키다가 덤덤하게 답했다.

"...그렇소? 일단 들어오시오."

지미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러자 디오리카는 잠깐의 망설임도 세리아와 함께 결계 내부로 진입했다.

결계 안으로 들어선 디오리카는 일단 세리아가 차고 있던 형구를 풀어주었다.

형구가 있든 없든 어차피 세리아가 지금 당장 유의미한 무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잘려나간 힘줄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검을 제대로 쥐기도 어려웠고, 코어에도 손상을 입었기에 마나를 운용하는 것도 힘들었다.

과거와 같은 힘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을 재활에 집중해야 할 터다.

웬만한 기사는 좌절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리아는 자신의 육신에 발생한 손상에는 영 관심이 없어 보였다.

철컥!

디오리카가 형구를 완전히 풀어주자 세리아가 잠시 휘청였다.

중심을 다시 잡은 세리아는 곧바로 지미를 돌아보고 물었다.

"레이, 어디 있어?"

"..."

"데려다 줘."

디오리카는 지미가 세리아의 요구를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지미는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세리아는 망가진 다리를 꾸역꾸역 세워가며 걸음을 옮겼고, 디오리카가 그 뒤를 따라가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

황도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 듣기는 했다.

얼마나 격렬했고 얼마나 끔찍한 참상이 벌어졌는지 귀로는 들었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두 눈에 담기는 황도의 풍경은 여전히 현실이라 생각되지가 않았다.

"..."

디오리카는 엉망이 된 황도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펴기를 반복했다.

광휘가 가득했던 과거의 황도와 지금의 삭막한 풍경이 도저히 맞물리지가 않았다.

그리 심란함을 숨기지 못 하는 디오리카와 다르게, 세리아는 오로지 지미를 빠르게 뒤쫓는데 집중했다.

각자 말 없이 길을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황성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황성의 외면은 크게 손상된 곳 없이 무사해 보였다.

황제가 레이를 저지하는 걸 도중에 포기함으로서 황성 가까이서 전투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미는 다른 누구의 허가도 받지 않고 멋대로 황성에 발을 들였다.

디오리카는 잠시 머뭇거렸다가 지미의 뒤를 계속 따라갔다.

세리아는 중간중간 나타나는 계단 탓에 자주 몸을 휘청였다.

그래도 홀로 다시 균형을 잡고 걸음을 옮기기를 반복했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으며 거대한 문을 몇 개인가 지나쳤다.

그리고 마침내, 지미가 황좌로 향하는 마지막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세 사람 앞에 제국의 황좌가 모습을 드러냈다.

"..."

황좌를 본 디오리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황좌에는 레이가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레이의 시신이 얼어붙어 있었다.

팔이 잘려나가고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온몸이 난도질된 시신이 황좌를 차지하고 있었다.

"..."

디오리카는 무심코 자신의 입가를 한 번 문질렀다.

황좌에 흐르는 막대한 마나의 흐름을 볼 때 시신의 영구적인 보존을 위한 술식 같은 걸 전개해놓은 것 같은데... 저게 대체 무슨 짓인가 싶었다.

제국을 모욕하고, 제국의 역사를 능멸하기 위한 전시물이라도 세우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서 제국의 가장 위대한 상징물 중 하나인 황좌 위에 역적의 시신을 안치한 것일까.

그런 의도가 아니라면, 대체 어째서 막대한 마나를 지속적으로 소모해 가며 황좌 위에 시신을 얼려놓았단 말인가.

레이의 시신을 보며, 디오리카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나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제국에 대단한 충심을 지니지 않았음에도 눈앞의 광경은 확실히 역겨웠다.

디오리카는 입안에서 떠도는 욕설을 내뱉지 않기 위해 꽤 노력해야 했다.

"..."

디오리카의 표정이 이리저리 뒤틀리는 사이.

세리아가 말 없이 황좌를 향해 다가갔다.

몸의 균형이 자꾸만 무너지려 했지만 억지로 잡아 끌며 계단을 올라, 황좌에 앉아 있는 레이에게 다가갔다.

노력하고 노력한 끝에 세리아는 마침내 레이의 모습을 두 눈에 가득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조카에게, 세리아는 언제나처럼 조카의 뺨이라도 문질러 보려는 듯 손을 뻗었다.

트드득!

하지만, 세리아의 손가락은 레이에게 미처 닿기도 전에 끝에서부터 얼어붙기 시작했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자, 세리아의 손가락은 단순히 얼어붙는 것을 넘어 허공에 정지하듯 멈춰서더니 균열이 일며 뭉개지려 했다.

그럼에도 세리아는 개의치 않고 팔을 뻗었고, 지켜보던 지미가 세리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

세리아는 조금이라도 더 레이를 향해 손을 뻗어보려다, 결국 천천히 팔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말 없이 레이를 바라보았다.

"..."

세리아는 레이로 인해 고초를 겪었다.

레이의 선택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럼에도 세리아는 레이에게 한 점의 원망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세리아에게 레이는 단지 지켜주어야 할 가족이었기에, 세리아가 레이에게 품을 수 있는 감정은 그저 미안함 뿐이었다.

"..."

세리아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레이에게 새겨진 상처를 눈으로 더듬어가며 함께 아파했다.

지미는 세리아를 곁에서 지켜보다 자기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삼켰다.

한편, 디오리카는 홀로 감정의 괴리를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세리아에게 레이는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자 지켜야 했던 조카였으나, 디오리카가 그런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황좌에 시신을 안치해둔 광경은 정말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결국 디오리카는 세리아와 지미를 두고 홀로 황성 밖으로 나왔다.

"..."

황성을 나와서 바라 본 황도의 풍경은 여전히 기가 찼다.

헛웃음을 잠깐 흘린 디오리카가, 눈살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나를 가둘 건가?"

디오리카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루나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아니면 죽일 건가?"

디오리카가 황도를 찾아온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레이의 생사를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황성에 발을 들인 디오리카는 레이가 확실하게 죽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

반역도들이 레이가 확실히 죽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아 디오리카를 입막음하려 든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처음부터 나를 죽일 생각으로 황좌를 보여준 건가?"

"..."

루나는 감정을 알기 힘든 눈동자로 디오리카를 훑어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호의를 베푼 이유가 뭐지?"

"..."

이번에는 디오리카가 잠시 침묵했다.

세리아가 처형을 피하고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것.

그건 명백히 디오리카의 도움 덕분이었다.

디오리카는 황도 안으로 무사히 진입해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세리아라는 미끼가 필요하다며 세리아의 처형을 막았다.

디오리카가 세리아의 쓰임새를 피력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세리아의 사지가 멀쩡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디오리카는 세리아에게 레이의 얼굴을 보게 해주겠다며 날뛰지 말라고 설득했다.

디오리카의 설득이 아니었다면... 레이의 소식을 들은 세리아가 홀로 날뛰다 처참하게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상황을 조율해낸 디오리카는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세리아와 황도까지 함께했다.

그게 디오리카가 세리아를 위해 베풀 수 있었던 최선의 호의이자 마지막 호의였다.

디오리카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더니,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

"...가문을 위해 헌신한 시간을 감안해, 잠깐의 유예를 베풀었을 뿐이지."

이러나저러나...

세리아는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황도를 점거한 반역도는 전부 죽을 것이다.

루나 홀로 도주한다면 루나만은 생존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이들은 가망이 없었다.

아무리 루나라 해도 황도에 있는 지인들까지 데리고 도주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세리아의 죽음은 아주 잠깐 유예되었을 뿐이었다.

"후우..."

디오리카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간 가문에서 함께했던 세월이 있는지라 세리아와 정이 꽤 들었으나 이제는 관계를 잘라내야 했다.

여기까지 도와준 것만 해도 디오리카로서는 정말 최선을 다한 수준이었다.

마음을 굳힌 디오리카가 감정을 지워낸 목소리로 루나에게 물었다.

"나를 통해 외부에 전할 말이라도 있나?"

"황실 마탑, 복구시켜 놔. 내가 언제든 활용할 수 있게."

"..."

이건 또 무슨 정신 나간 개소리란 말인가?

그러한 의아함이 디오리카의 표정에서 드러나자 루나가 말을 이었다.

"레이는 바보가 아니야."

"...?"

"고작 벨라와 레아의 삶을 잠깐 연명시키기 위해, 레이가 이렇게 큰 대가를 치렀을 것 같아?"

"무슨 소리를..."

"레이는... 너희에게 베푼 것을 전부 거둬갈 거야."

"..."

디오리카는 여전히 루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루나는 디오리카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

"그만 돌아가."

"..."

디오리카는 루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황도의 결계 밖으로 걷기 시작했다.

묘한 찝찝함이 가슴에 남아 걸리적거렸으나, 그래도 무사히 황도를 벗어나게 되었음에 만족했다.

세리아와 굳이 마지막 인사 같은 것은 나누지 않았다.

*

같은 시각.

필립스 백작령은 로필렌이 전개한 결계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다.

그리고, 상당한 숫자의 병력이 필립스 백작령을 포위한 채 대기하는 중이었다.

"..."

황도에서의 소식이 알려지자 필립스 백작은 하루아침에 제국의 반역자가 되었다.

그리고 필립스 백작령 인근의 영주들은 병력을 소집해 필립스 백작령을 포위했다.

필립스 백작령을 포위한 영주들은 훨씬 우세한 군사 전력을 지니고도 급하게 공격을 가하지 않고 필립스 백작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그와 함께 확실하게 필립스 백작령을 고립시켜 비축된 물자만을 소모하게 강요했다.

백작령에 비축된 물자는 한정적이고, 로필렌의 결계는 인근을 포위한 군세를 전부 막아낼 만큼 강력하지 못 했다.

투항이나 항복도 불가능했다.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한다 해도 잘려나갈 목의 갯수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필립스 백작은 집무실에 앉아 중얼거렸다.

"알레시아가 아직 무사한지 모르겠군..."

외부와의 연락도 완전히 끊겨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필립스 백작은 단검을 매만지며 후회를 되뇌었다.

마왕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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