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이번 '반역' 사태로 인해.
제국의 주요한 기반이 박살 났다.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은 황도 인근의 지역이었다.
하지만 남부라고 해서 무사한 것도 아니었다.
마경 원정을 치르면서 갈려나간 교단의 전력만 해도 이미 끔찍한 수준이었다.
거기다 이번 사태에 휘말려 병력을 추가로 손실했으니, 최근의 손실을 전부 합하면 빈말로도 멀쩡하다 지껄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국의 중앙이 박살 난 현재, 교단과 남부는 명실상부 대륙에서 최대 기반을 지닌 최강의 세력이 되었다.
더군다나 엘-람의 보살핌 덕분인지 레이와 정면으로 충돌했던 안소니우스가 생환하는 데 성공했다.
성검을 잠시 강탈당했다는 증언이 있기는 하나... 결국엔 안소니우스가 되찾아서 레이와 대적했으니 크게 문제 될 사안은 아니었다.
어쨌든, 안소니우스가 성검과 함께 귀환한 덕분에 남부의 군사 전력은 타 세력에 비해 압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본래라면 현재 기반이 박살 난 제국의 중앙 세력이 가장 심각하게 견제해야 하는 집단이 교단과 남부였다.
헌데 제국의 중심을 대표하는 이들이, 지금 대놓고 알렉산데르를 찾아와 힘을 보태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
잠시 자기 집무실로 돌아온 알렉산데르가 신경질적으로 의자에 앉았다.
제국은 망했다. 적어도 이제까지 대륙에 행사해 왔던 막대한 영향력을 소실하게 될 것임은 분명했다.
대륙 전반에 미치던 제국의 권위가 갑작스럽게 공백이 된 만큼, 그 틈을 노려 대륙 각지의 세력들이 고개를 치켜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국의 정통성만은 확고하게 지니고 있는 황실의 군단이 남부에 대놓고 붙었다.
그로 인해 현재 남부는 겉보기에는 '최대의 기반'과 '최강의 전력'과 '가장 확고한 전통성'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다.
힘과 명분을 전부 지닌 유일하고 압도적인 세력이 대륙에 출몰한 것이다.
상황이 이리되니 고개를 치켜들려던 다른 세력들이 일단 움직임을 멈추고 남부의 상황을 주시하는 쪽으로 태도를 선회했다.
겁 없이 껄떡대는 놈들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그것들의 대가리를 깨는 건 정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여기까지는 황제가 의도한 바대로 되었음이 분명했다.
'황제가 지켜내고자 했던 것은...'
황제는 죽음을 자처했다.
자신의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황제가 지켜내고자 한 것은, 제국의 진정한 '근간'이었다.
제국이 일천 년 동안 대륙에 안정적으로 군림할 수 있게 만들어준 그 근간이 황성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황제는 제국을 유지하는데 핵심이 되었던 그 시스템들을 다른 이들이 파괴하거나 활용하지 못 하게 봉인했다.
봉인이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단기간에 심부까지 접근 불가한 구조임은 분명했다.
황제는 홀로 남아 황성의 기능을 봉인했고, 또한 황실에 충성하는 병력을 불필요하게 소모하지 않고 물러서게 했다.
기반이 박살난 이상 장기간 군단의 유지는 불가능하겠으나...
로얄가드를 비롯한 황실의 군단은 황자가 성장하기 전 다른 세력에 의해 종속되어 멍청한 인형으로 전락하는 일만은 막아내는 최후의 방패가 되어줄 터다.
'그리고... 이들을 남부로 보내서 우리의 선택지를 크게 줄였다.'
레이가 황족을 은폐했다는 건 진실로 드러났다.
레이는 역적이었고, 심지어 악마와 계약했다는 주장도 빗발쳤다.
심장이 터진 채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엘-람의 기적 따위, 대륙은 알지 못 했다.
정황만 보면 레이는 정말로 악마의 도움이라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안소니우스까지 나서서 레이가 황족을 은폐했으며 악한 사술까지 썼다고 공표하다시피 진술한 탓에 이제 와서 진실을 왜곡하기는 어려웠다.
'황제가 레이를 죽이려 한 명분이 확고하게 증명된 이상 황자를 함부로 핍박할 수는 없다.'
교단과 남부가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선 결국 겉으로는 옳은 명분을 지지해야 했다.
황자를 호구처럼 지원해야 된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외부에서 보기에는 따뜻하게 품는 그림이 나와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순간.
황성을 점거한 반역도와 확실한 적대 관계에 놓인다.
황성을 점거한 '극소수의 반역도'와 적대 관계에 놓이는 게 두려워 확고한 정통성과 명분을 포기하자?
그런 선택지는 교단과 남부의 고위층 중에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 마법사와 타협 따위를... 하는 게 가능할 지도 의아하니...'
대륙에 남아있는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대마법사의 광기는 항상 보편적인 가치 판단의 기준을 위배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불세출의 재능을 은폐하고 있던 마법사다.
그리 소중하게 여겼던 존재를 잃은 마법사가 추후 어떤 극단성을 지니게 될지 예측이 안 됐다.
솔직히, 알렉산데르로서도 그 마법사는 빨리 잘라내고 싶은 위협적인 변수이긴 했다.
'상황이 급박해지는군.'
마법사와 전투를 벌여야 한다면 무언가를 준비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평범한 마법사조차 오랜 시간이 주어지면 산 하나를 불길로 뒤덮을 수 있는데, 하물며 황도의 영맥을 발아래 둔 대마법사는 어떻겠는가.
결국 황자가 이곳에 오게 됨으로서, 교단과 남부에게도 신속한 황도 탈환의 필요성이 강요되는 꼴이었다.
정치적 줄다리기도 일단 황도를 탈환해 반역도를 처리하고 해야 했다.
'...망설일 건 없지.'
반역도만 깔끔히 정리하면 대륙 전역에 영향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게 되니, 교단과 남부로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알렉산데르와 안소니우스가 주축이 된다면 병력 피해는 생기더라도 황도 탈환은 어렵지 않게 가능했다.
루나가 불세출의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감안해도 상성과 전력 면에서 충분히 압도할 수 있었다.
사실, 알렉산데르가 가정할 수 있는 가장 까다로운 상황은 루나가 전투 전에 황성을 버리고 홀로 도주하는 경우였다.
그리 되면 분명 대도시 여러 개는 우습게 박살 나겠지만, 그런 상황도 일단 해결할 방법은 있었다.
"..."
황도 탈환이 이루어진 후.
제국은 얼마 못 가 분명 껍데기만 남을 것이다.
운이 좋아봤자 제국의 이름만 간신히 지켜내는 게 한계일 터다.
애초에 황실의 군단이 황자와 함께 남부에 찾아온 순간부터, 그런 미래는 정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어째서 황제는 이런 선택을 하였는가.
"..."
황제는, 알렉산데르가 지닌 야망의 방향성을 파악하고 있었다.
알렉산데르는 막대한 실권도 실권이었지만 스스로 위대한 상징성이 되고자 하였다.
그렇기에 알렉산데르는 무리하게 제국이란 이름마저 집어삼켜 자신이 제국의 뒤를 잇기보다는, 분명 새로운 국가의 창업군주를 지향할 인물이었다.
그 중에 가장 신성하고 상징성 있어 보이는 게 '종교 국가'의 건설이었고 말이다.
알렉산데르가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지향하고 그 새로운 국가가 제국의 영향력을 대신하게 된다고 해도, 제국은 여전히 남아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알렉산데르의 국가가 진정 독립적이고 신성하게 기록될 수 있었으니까.
"하..."
알렉산데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과거에 비해선 한없이 약화되더라도, 황제는 자신의 후계에게 제국의 근간을 온전히 물려주고자 했다.
제국이, 천 년 동안 대륙의 지배자로서 군림할 수 있게 한 그 모든 역사를 후계 또한 깨우칠 수 있게 안배했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야겠으나, 오늘로부터 다시 백 년이 지나고 이백 년이 지나고 삼백 년이 지났을 때...
언젠가는 제국의 황제가 과거의 위광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믿으며 이런 선택을 내렸을 것이다.
"하하..."
황제의 뜻대로 일이 마냥 잘 풀릴 수 있겠는가.
황제 나름대로는 최선의 판단을 내렸겠지만, 그럼에도 변수가 너무 많았고, 또한 황제의 선택이 알렉산데르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되었다.
알렉산데르는 그 일생일대의 기회를 앞에 두고...
"나는 이런 결말을 원치 않았거늘."
어떠한 기쁨이나 기대감도 느끼지 못 하였다.
"빌어먹을 영감. 제국에 그리 목을 매더니, 그 결말이 결국 이것이오."
야망이 가득했던 과거의 알렉산데르조차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야망을 쟁취하기를 바랐지, 이런 식으로 거저먹을 수 있는 기회를 바란 적은 없었다.
그리고 알렉산데르는 이제, 과거와 같은 야망을 바라고 있지도 못 했다.
알렉산데르의 가슴을 채운 것은 허무함과 음울함, 그리고 드러낼 수 없는 분노뿐이었다.
알렉산데르는 레이와 나누었던 과거의 짧은 대화들을 곱씹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레이... 너는 무엇을 위한 존재였나."
그리고.
"대체 어디까지가 그들의 장난질인가."
창문 너머의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 알렉산데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갈 길을 잃은 감정들이 마음속에 너울졌으나, 그럼에도 지금은 해야 할 일을 마쳐야 했다.
황성을 탈환해야 했다.
*
스페라는 로얄가드와 함께 남부로 오게 되었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도이아에 의해 강행된 일이었다.
아도이아는 남부에 도착한 후 스페라와 마주 앉아 황도에서 발생했던 사태를 덤덤하게 설명했다.
아도이아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들이 참... 스페라에게는 현실로 와닿지가 않았다.
질 나쁜 농담이라 취급하기에도 너무 허황되어 웃음도 안 나올 만큼, 정말 그런 이야기들을 아도이아는 입에 담았다.
스페라는 감정적인 동요조차 느끼지 못 한 채 그저 눈을 깜박이며 아도이아의 설명을 들어야만 했다.
황도에서 발생한 사태에 관해 설명을 전부 들은 뒤, 스페라는 놀라울 정도로 퉁명스레 아도이아에게 물었다.
"나를 왜 남부로 데려왔어?"
"저는 이제부터 가문이 아닌 아가씨를 모십니다. 아가씨께서 추후 황실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셔야 할 상황에 놓이실 수도 있기에 동행을 청했습니다."
스페라는 에른스트의 진전을 전부 계승했으며,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리라 확정시 되는 수준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압도적인 재능은 언제나 존재만으로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스페라를 지켜줄 가장 강한 방파제였던 에른스트는 죽음을 맞이했다.
"아가씨께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전처럼 가문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사실, 승계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에른스트가 사망한 탓에 가문 안이 더 위험했다.
그렇기에 의탁까지는 아니더라도 영향력을 지닌 세력과 협력할 필요성이 있었다.
"너무 작은 세력은 아가씨를 보호해주지 못 합니다. 현재의 남부처럼 비대한 힘을 지닌 세력은, 아가씨께서 재능을 꽃피우는 걸 반기지 않을 겁니다."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페라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한 세력이 필요했다.
그 적당한 후보 중 하나가 황실의 군단이었기에, 아도이아가 주도적으로 미리 접촉을 유도한 것이었다.
"제가 지금 드릴 수 있는 조언은 여기까지입니다."
선택은 스페라의 몫이라며, 아도이아는 덤덤하게 말을 끝마쳤다.
*
황도가 반역도에게 강탈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도를 둘러싸는 형태의 방위 결계가 다시 활성화되었다.
제국의 신검과 레아의 혈통을 활용해 루나가 복구시킨 기능이었다.
물론 복구된 결계는 이전과 같은 강력한 방위 기능은 전혀 가지지 못 했다.
거의 겉으로 보이는 형태만 복구한 수준인지라, 기껏해야 침입자의 감지 정도가 한계였다.
허나 일부나마 방위 시스템의 기능이 복구되었다는 것에 다른 세력들은 큰 위기감을 가졌다.
그리고, 남부에서 본격적인 움직임이 있기 직전에.
손님이 황도를 찾아왔다.
정확히는 손님이라기보다는 단 두 명으로 이루어진 사절에 가까웠다.
그리고 사절 중 한 명의 얼굴은 루나에게도 익숙했다.
세리아였다. 당연히도, 그리 무사한 모습은 아니었다.
마왕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