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62화 (362/446)

362화

"으음..."

알레시아가 부풀어 오른 배를 붙잡고 넓은 방을 한 바퀴 돌았다.

만삭에 가까워지니 온몸이 여기저기 안 쑤시는 곳이 없어 자연스레 신음이 나왔다.

카렌은 잠시 침대에 누운 채 몸을 뒤척여보고 있었다.

역시나 만삭에 가까워지니 어떻게 눕는 자세를 잡아도 그다지 편안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지금의 이 시간이 마냥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곧 나의 아이와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약간의 걱정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아이를 생각하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카렌을 지나친 알레시아가 의자를 찾아 앉았다.

창문, 정확히는 외부의 풍경을 투영해주는 벽에서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알레시아는 마냥 평화로워 보이는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음료를 입에 댔다.

"..."

얼마 전 빈혈인가 뭔가 때문에 쓰러진 후.

그때부터 카렌과 알레시아는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알레시아는 자신이 쓰러진 전후의 상황이 영 기억나지가 않았다.

후유증으로 인해 기억이 뚜렷하지 않은 것을 보면 확실히 가벼운 빈혈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카렌 또한 비슷한 증상으로 인해 기절했다는데, 아무래도 임신 기간 중 레이가 원정을 떠난 일로 심력을 많이 소모한 것이 원인인 듯했다.

혹시라도 '더욱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선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진찰이 카렌과 알레시아에게 내려졌다.

어쨌든, 한 번 쓰러진 뒤로 카렌과 알레시아는 무려 황성에서 지내는 호사를 누리며 휴식을 취하는데 전념하고 있었다.

이리 호사를 누리고 있음에도 하나 문제가 있다면, 레이가 자리를 비웠다는 점이었다.

필립스 백작령에 문제가 생겨서 급히 움직여야 했다는데, 레이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웬만하면 출산일 전에 돌아오겠다고 레이가 전해달라 했다지만, 일이 약간 꼬이면 그보다 늦어질 수도 있을 터다.

그래도 레이가 마경처럼 위험한 곳으로 떠난 것은 아니니 마음이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불안하지 않았다.

알레시아가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루나가 찾아왔다.

카렌이 재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나서 반갑게 루나를 맞이했다.

루나는 언제나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카렌과 알레시아에게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물었다.

황성에서 지내는데 불편할 게 뭐 있겠는가.

카렌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고, 알레시아도 아무 문제 없다고 답했다.

두 사람의 안위를 확인한 루나는 카렌에게 붙잡혀 담소를 잠시 나누고는 방을 나서려 했다.

그때 알레시아가 불쑥 물었다.

"근데 있잖느냐."

"..."

루나의 은색 눈동자가 알레시아를 향했다.

그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알레시아는 마음에 이는 이질감을 몇 번이나 곱씹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었느니라!"

억지로 높인 알레시아의 목소리가 커다란 방과 복도를 타고 흘렀다.

루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등을 돌렸다.

알레시아는 루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자기 배를 매만졌다.

지금은 심적 안정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했다.

그렇기에 알레시아는, 마음에 이는 불안을 억지로 밀어내며 홀로 중얼거렸다.

"...건강하게 태어났으면 좋겠구나."

*

레아가 지미의 곁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한참 동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지미의 안색을 살핀 레아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빠, 많이 힘들어?"

"...뭐? 아, 아니 괜찮아."

벽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앉아 있었던 지미가 레아의 목소리를 듣고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빠 전혀 안 힘들어."

지미는 억지로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레아는 기절했다가 깨어난 뒤에서 계속해서 불안에 떨었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바들바들 떨던 아이를 간신히 안정시켜 놨는데,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지미가 언제나처럼 웃어주자, 레아는 지미의 눈치를 보다가 떠듬떠듬 물었다.

"아빠, 혹시..."

"..."

"...엄마도 레아한테 화났어?"

레아는 불안한 기색을 내보이며 거듭해서 지미의 눈치를 살폈다.

레아가 벨라의 얼굴을 보지 못 한 지 며칠이 지났다. 레아는 벨라와 이렇게 오래 떨어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지금 지내는 방에는 온갖 화려한 보석들과 신비한 물건들이 넘쳐났으나, 그럼에도 레아는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벨라의 이야기가 나오자 지미는 미리 준비했던 변명을 입에 담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레아가 한참 동안 고민했던 말들을 용기 내서 입에 담았다.

"...레아가 잘못한 거 같아. 레아가 엄청 잘못했어."

"...뭐?"

"맨날 선물 사달라고 오빠한테 막 그러고... 말 안 듣고... 막 울고 레아가 그래서... 오빠가 화났어."

"..."

"오빠 목도리... 더 예쁘게 만들 수 있었는데... 연습 힘들어서... 실수해서 다시 해야 하는데 그냥 하고 그래서... 목도리 안 예뻤어."

"..."

"이번에는 오빠 목도리 예쁘게 만들어서... 선물... 선물하고..."

"..."

"그리고 또... 앞으로 오빠 말 잘 듣고... 고집부리지 않고... 엄마 말도 잘 듣고... 다 열심히 할거니까... 오빠도 엄마도 화 풀었으면 좋겠어."

"..."

지미가 천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레아는 지미의 눈치를 보며 혹시 더 잘못한 게 있나 싶어 계속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지미는 한참 동안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레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가... 엄마한테 갔다 와야 하는데... 레아는 여기서 잠깐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응!"

레아가 나름 씩씩하게 답하며 환하게 웃었다.

지미가 레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

지미가 찾아갔을 때.

벨라는 방의 구석에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붙잡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틀 전에 보았던 모습과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지미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벨라."

"..."

이름을 부르니 반응은 해주었다.

벨라가 고개를 들었고, 지미의 눈동자에는 퀭하게 말라 비틀어진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멍하게 눈을 뜬 벨라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며칠 동안 물 한 방울 입에 안 대고 아예 굶다시피 했으니 정신이 온전한 게 도리어 이상했다.

벨라는 뒤늦게 지미를 알아보고, 말라서 찢어진 입술을 달싹였다.

"...지미."

"벨라, 몸은..."

"레이는 어디 있나요? 우리 아들..."

"...벨라."

한숨을 삼킨 지미가 벨라에게 다가갔다.

벨라는 여전히 몸을 웅크린 채, 헛소리를 했다.

"무서운 꿈을 꿨어요. 우리... 우리 아들이..."

"벨라!!!"

지미가 벨라의 팔목을 강하게 말아쥐었다.

그리고는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벨라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소리쳤다.

"정신 차려!! 너도 봤잖아!! 레이는 죽었어! 죽었다고!!!"

팔이 잘려나가고 심장이 부서지고 온몸이 뒤틀린 채 얼어붙었다.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시신을 얼려놓았을 뿐이었다.

그 얼어붙은 시신이 다시 움직이리라 기대하는 건 정신 나간 망상이었다.

레이는 죽었다.

지미는 숨이 멎은 채 황좌에 앉아있던 레이의 모습을 어쩔 수 없이 상기하며 악에 받쳐서 고함쳤다.

"죽었잖아!!! 우리!!! 우리 딸을...!!"

자꾸만 번져 나오려 하는 마음속의 격류를 억누르며, 지미가 벨라의 뺨에 손을 가져갔다.

"우리 딸을... 지키기 위해 죽었잖아. 그러니까... 이제는 우리가 레아를 보호해야 해. 그만 정신 차려...! 당신이 정신 차려야 우리 딸을 지키지."

"..."

메말랐던 벨라의 눈가에 다시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심장을 비트는 것만 같은 가슴의 통증이, 도저히 마주할 수 없었던 현실을 다시 벨라에게 각인시켰다.

고통과 비애와 후회가 송곳이 되어 벨라의 마음을 찢어내고 찢어냈다.

그 모든 아픔이 눈물이 되어 하염없이 흘렀다.

"지미... 내가 잘못해서... 우리 아들이... 내가..."

"..."

비참한 자책을 반복하는 벨라를 지미가 안아주었다.

만약 지금에라도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당신은 레아를 포기하고 레이를 선택해 줄 것인가.

그런 불필요한 물음을 조용히 흘려보내며, 지미는 벨라를 달래고 설득했다.

레아를 생각한다면 벨라가 이리 주저앉아만 있으면 안 되었다.

거듭된 지미의 위로와 설득에, 결국 벨라는 사랑하는 딸아이를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벨라는 지미와 함께 레아가 머물고 있는 방을 찾아갔다.

"!"

레아는 두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 오랜만에 문앞까지 와다다 뛰어갔다.

레아는 긴장한 기색으로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렸을 때, 레아는 미리 준비했던 약속을 발표하려 했으나 벨라가 먼저 레아를 와락 껴안았다.

쿵... 쿵...

따스한 온기를 품고 박동하는 레아의 심장 소리가 벨라에게 전해졌다.

레이가 지켜준 온기였다. 레이는 이 따스한 온기를 지켜내고, 가장 추운 곳에서 눈을 감았다.

벨라가 레아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터뜨렸고, 레아는 엄마가 울기에 따라 울었다.

*

루나가 황좌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요하나의 뒷모습이 먼저 보였다.

요하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가만히 황좌를 바라보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 요하나는 그 자리를 지키며 레이의 육신에 새겨진 상흔들을 눈에 담아보고 있었다.

잘려나가고 바스러진 상흔들을 눈에 담다 보면, 문득 레이가 느꼈을 고통이 피부를 타고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거짓말쟁이."

안 위험하다고 했다.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잠깐 떨어진 사이에 목걸이나 잃어버리지 말라고 참견했다.

레이는... 그렇게 허언을 떠들던 시점에서 이미... 그게 마지막 인사가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리 자신만만하게 거짓말을 입에 담을 수 있었을 터다.

"..."

요하나가 목걸이를 매만졌다.

레이의 마지막 거짓말이, 그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죽음을 앞두고 상대를 위해 쥐어짜낸 배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레이가 마지막으로 건넨 그 환한 웃음이 요하나에게 지워지지 않을 후회이자 상처가 되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자리를 지키던 요하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레이를 살릴 수 있어?"

"살릴 거야."

루나의 답을 듣고 요하나가 조소했다.

"거짓말."

이미 죽은 시신을 어떻게 살려낸단 말인가.

시신이 멀쩡하기라도 했다면 속아볼 생각이라도 들 텐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요하나가 조소를 잠깐 흘리고는 다시 가만히 레이를 바라봤다.

그러자 루나가 레이를 가리고 요하나 앞에 섰다.

"나는 레이가 아니야."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는다.

그러한 의지의 표명에 요하나가 루나를 돌아보았다.

"약속할 수... 있어?"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나 홀로 모든 것을 지키고 이루어낼 수는 없어."

"..."

"레이를 이대로 잃고 싶지 않다면... 다시 검을 들어, 요하나."

*

알렉산데르가 교황청을 찾아온 손님을 바라봤다.

로얄가드, 티르피츠. 그리고 그의 곁에는 황자와 황자의 보모까지 의자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알렉산데르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티르피츠는 알렉산데르가 어째서 얼굴을 구기는가 알 수는 없었으나, 그것 또한 어떠한 의도를 지닌 연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티르피츠의 확신과는 다르게, 알렉산데르가 토로하는 감정은 진실됐다.

"끔찍하군."

기분이 참... 좆 같았다.

마왕 (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