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
인연을 묶는 계약.
과거에 맺었던 그 계약이, 루나가 레이의 영혼을 붙잡을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레이의 영혼을 붙잡고 시공을 얼어붙게 만드는 술식을 전개했음에도...
레이의 육신과 영혼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레이의 소멸을 멈춰 세우기 위해서는 황성의 시스템을 일부라도 활성화시켜야 했다.
그리고 황성의 시스템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시조룡과의 계약을 완료한, 무사히 생존한 황족이 필요했다.
"..."
루나는 고개를 숙인 채 황좌를 움켜쥐었다.
그리고선 너무나도 힘겨워 보이는 조소를 머금은 채, 레이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존재가 마지막까지... 그 아이를 지켜주네요."
*
"흡...!"
지미가 헛숨을 토했다.
바로 직전까지, 지미는 묘한 부유감이 있는 공간의 틈을 떠다녔었다.
공간의 틈새 속에서 생전 경험해본 적 없던 생소한 감각을 느끼다가 현실로 되돌아오니 잠깐 적응이 안 됐다.
지미가 흐트러진 호흡을 정돈하며 몸을 일으켰다.
"후우..."
공간의 틈새를 생성하는 건 본래 드래곤이 창조한 아티펙트, '발레리우스'가 지닌 기능이었다.
울트가 찾아낸 유물인 발레리우스는 알리모에서 루나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루나는 이미 한참 전에 발레리우스를 완전히 분해했었다.
그 시점에서 발레리우스는 본래의 기능을 잃었다.
하지만 루나는 발레리우스의 코어로 작용하던 드래곤하트를 활용해 발레리우스의 기능을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황도에서 추격당하던 중에 발레리우스의 기능을 재현해낸 루나는 일행들을 전부 공간의 틈새로 진입시킨 후 홀로 움직였었다.
조금 전의 기억을 떠올린 지미는 땅을 구르는 발레리우스의 드래곤하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약간의 어지럼증을 이겨내고 주변을 돌아보려 했다.
"하, 다들 괜찮...?"
하지만, 미처 다른 사람들이 무사한가 살피기도 전에 최고위 바람 정령인 에이라가 가까운 거리에 내려앉았다.
화아악!
에이라는 곧장 폭풍을 일으켜 공간의 틈새에서 벗어난 이들을 전부 허공에 띄운 후 낮게 비행하기 시작했다.
지미는 요격당할 것을 걱정하면서도 자기 몸을 밀어내는 에이라의 바람에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잠깐의 비행 끝에 도달한 곳은 황성 앞이었다.
툭!
폭풍이 그치고, 지면에 발을 디딘 지미는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공간의 틈새로 진입했던 일행들은 겉보기에는 다들 다친 곳 없이 무사해 보였다.
지미는 잠깐 안심했다가, 얼마 못 가 얼굴 위로 서서히 경악을 드러냈다.
"...!"
황도의 풍경이...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공간에 틈새에 머물렀던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찬란했던 문명이 불길 속으로 추락해 있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붕괴된 건축물이 보였고, 지평선 너머로는 화염이 넘실댔다.
지미는 물론이고 매튜와 기사들 또한 불타는 지평선을 보고 멍하니 선 채 침묵에 잠겼다.
벨라는 육체가 나약했기에 아직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지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대기에 가득한 열기를 느끼고 레아를 감싸 안았다.
레아는 드래곤하트를 이식한 후 아직까지 의식이 없었다.
그때, 황성에서 나타난 루나가 벨라를 향해 다가가 팔목을 붙잡았다.
콰악!
레아를 감싸고 있는 벨라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 비튼 루나는 억지로 레아를 뺏어 들었다.
갑작스럽게 레아를 뺏긴 벨라가 소스라치게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벨라가 반사적으로 레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루나가 마법을 발현했다.
츠즉!
허공에 새겨진 마법 술식이 정확히 벨라를 겨냥했다.
그리고, 술식이 빛을 발하며 붉은 열선을 토해내려던 찰나.
지미가 다급히 검을 뽑아내 휘둘렀다.
쫘아악!!!
붉은 열선이 지면을 긁어냈다.
지미는 사람 하나는 쉽사리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열선의 궤도를 뒤틀어낸 후 벨라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벨라는 무사했고, 지미는 벨라의 무사를 확인하자마자 루나에게 소리쳤다.
"루나, 이게 무슨...!"
"닥쳐. 죽여버리기 전에."
"..."
지미는 루나의 은색 눈동자를 바라보다... 서서히 검을 내렸다.
루나가 드러낸 적의 탓에 검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미는, 너무나도 차갑게 가라앉은 루나의 눈동자를 보며 무언가를 직감했다.
외면하고 외면했던 그 순간이 결국엔 찾아왔음을... 지미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
지미가 잠시 제자리서 휘청였다.
루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으나, 쉽사리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지미는 재차 거칠어지기 시작한 호흡을 내쉬며 두 눈을 붉게 충혈시켰다.
자꾸만 두 눈의 초점이 어긋나는 지미를 옆에 두고, 루나가 벨라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주변의 마나가 요동쳤다.
단련된 기사조차 섬찟하게 할 만큼 강렬한 살의가 벨라를 향해 쏟아졌으나, 그럼에도 벨라는 뒷걸음질조차 치지 않았다.
벨라는 레아를 지켜야만 했고, 그렇기에 자기 홀로 도망치거나 기절할 수는 없었다.
벨라의 그 용기와 헌신이... 루나에게는 혐오스러웠다.
"..."
벨라.
천한 신분과 천한 과거를 지닌 여인이다.
전문적인 기술도 학문적인 지식도 지니지 못 한 무력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천함과 무력함은 죄가 아니었다.
하지만, 힘없는 자가 품은 과욕은 죄가 되었다.
벨라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과분한 소망을 품었고... 그 소망이 결국 레이를 죽였다.
벨라는, 자신의 소망이 레이를 옥좨서 죽여가고 있다는 걸 과연 알았을까.
"..."
벨라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아들을 신뢰했다.
천하고 무력한 어미의 손에 자랐음에도 홀로 재능을 꽃 피운 대견스러운 아들을 신뢰했다.
하지만 루나의 눈동자에 비친 벨라의 '신뢰'란, 레이가 견뎌야 했던 희생과 고통을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려 한 이기심의 다른 이름이었다.
설령 벨라가 가슴에 품은 것이 순수한 신뢰였다고 해도,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더 이상 순수하지 못 했다.
살의를 쏟아내던 루나가, 마침내 등을 돌렸다.
"...따라와."
루나가 레아를 들고 황성으로 움직였다.
벨라가 다급히 루나를 뒤쫓았고, 다른 이들도 두 사람을 따라 황성 안으로 들어섰다.
황성에 이리 멋대로 발을 들여도 되는가.
너무나 당연히도 그런 의문이 떠올랐으나 입 밖에 내는 자는 없었다.
모두가 침묵한 채 루나의 뒤를 쫓았다.
그러던 중, 지미가 루나와 벨라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을 멈춰 세웠다.
"...잠깐."
지미는 호흡을 거칠게 내쉬며 손을 저었다.
"잠깐, 잠깐 여기서... 다들 기다리고 있어. 내가 루나한테 가볼게."
아직 카렌과 알레시아도 정신을 차리지 못 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고 여기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으라고, 거의 윽박지르다시피 강요한 지미가 홀로 루나와 벨라를 뒤쫓았다.
한편, 벨라는 혹시 루나가 레아를 해코지하는 건 아닐까 안절부절 못 했다.
그건 딸아이를 사랑하는 어미로서 지당하게 품어야 할 걱정이었다.
벨라의 떨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앞서 움직이던 루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부린 과욕의 대가를... 레이가 치렀어."
루나의 목소리는 삭막하게 메말라 있었다.
그제야 벨라가 레아에게서 눈을 떼고 루나를 돌아봤고, 루나는 황좌로 향하는 문으로 다가갔다.
"너는 마지막까지 레이의 헌신에 기댄 채 기생충처럼 레이의 삶을 갉아 먹었어."
반쯤 열려 있던 황좌로 향하는 문을 밀어내며, 루나가 벨라와 시선을 마주쳤다.
"똑똑히 봐. 너의 그 과분한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레이가 치러야 했던 대가를."
문을 넘어 보이는 황좌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숨이 멎은 모습으로, 온 몸이 잘려나가고 부서진 채.
익숙한 옷가지만 아니었다면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히 망가져서.
그렇게 눈을 감고 침묵하고 있었다.
"이제 만족해?"
루나의 입가가 하염없이 뒤틀렸다.
*
안소니우스가 의식을 차렸다.
성검의 주인이자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의 부활에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도 환희가 일었다.
의식을 되찾은 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육신의 손상을 회복한 안소니우스는, 상황을 파악한 뒤 단호하게 명령했다.
"물러난다. 더는 불필요한 손실을 감내할 수 없다."
황도의 수복을 포기하자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레이'라는 존재는 한시적이지만 대적 못 할 재앙이었고, 지금 당장은 레이의 생존 여부를 판단하기 힘들었다.
당장 바로 밀고 들어갔다가 레이가 아직 생존해 있다면 고위 전력이라 해도 삽시간에 갈려나갔다.
거기다가 황도에 메테오를 직격시킨 마법사가 황성에 몸을 숨겼다.
황실 마탑에서 루나의 시스템 접근을 빠르게 차단한 덕분에 더는 메테오가 전개되는 일은 없겠지만...
황성을 장악한 이상 루나는 황도 아래 흐르는 영맥의 마나를 일부나마 활용할 수 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축복받은 영맥을 발아래 둔 대마법사를 뚫어내기 위해선 대체 얼마나 더 큰 병력 손실을 각오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만약 황성에 구축된 방위 시스템까지 극히 일부라도 루나가 사용할 수 있다면 상황은 더 힘들어졌다.
"추기경의 도움이 필요하다."
절대권역을 전개 가능한 소드마스터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병력 손실을 감수하며 무식하게 밀어붙이기에는 이미 잃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황도를 점거한 반역도를 고립시킨 후, 레이의 죽음이 확실시되었을 때 밀고 들어가 섬멸한다.
현재 이곳에서 신성 교단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인 안소니우스의 의견은 그러했다.
황제를 모시는 제국군이 반발할 수도 있는 의견이었으나,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
현재까지...
황제와 황실 직속의 최상위 전력은 거의 반 토막이 났다.
허나 그들은 멋대로 전장에서 이탈하거나 흩어지는 일 없이, 아직까지 건재한 조직력과 명령 체계를 바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로얄가드들은 와해되기 시작한 제국군부터 통제하려 했다.
반토막이 났다고는 하나 로얄가드를 비롯한 제국의 최상위 전력은 여전히 두려울 만큼 강대했다.
그들이 강압적으로 병력의 통제를 시도하자 일단 군단의 와해는 억제할 수 있었다.
"..."
로얄가드, 티르피츠가 잠시 황성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티르피츠를 비롯한 로얄가드에게 맡겨진 짐이 무거웠다.
황제가 쓰던 인장도, 황실의 드래곤하트도, 그리고 기껏해야 아장아장 걸어다닐 수 있는 황자도 이제는 그들이 반드시 수호해야 했다.
티르피츠가 황성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황제 폐하의 명을... 이행한다."
로얄가드가 황제의 곁을 지키지 못 하고 도주한 것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로얄가드 대다수가, 차라리 미하엘과 같은 자리에서 죽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그들이 황명을 받드는 것은, 그것이 황제가 내린 마지막 명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황제의 판단이 대국적으로 옳았기 때문이었다.
"신속하게 병력을 재편한다."
재편된 병력으로 피난민을 유도하고 감시망을 구축해야 했다.
그리고 해당 임무에 투입될 인원 외에 다른 이들은...
"남부로 간다. 알렉산데르 추기경과 접촉한 후, 협력하여 황성을 수복한다."
황성을 수복하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마왕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