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레이가 황성을 향해서 움직였다.
레이는 소드마스터의 영역에 닿고 나서야 넘쳐 흐르는 마나를 비로소 자기 손아귀에 제대로 쥘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그 누구도 레이를 막아서는 게 불가능했다.
레이는 황성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고, 레이가 황성에 도달할 때까지 용기 있게 앞을 막아서는 이들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초월적인 힘을 얻었으나 곧 죽을 인간을 상대로 굳이 무의미하게 병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레이는 막아 세우려 한다고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황성의 수호를 포기한 것은 현명한 조치였다.
다만, 그때까지도 황제는 황성에서 피신하지 않고 황좌를 지키고 있었다.
"..."
레이가 황성 안으로 들어섰다.
방위 시스템 일부가 활성화되며 레이를 배제하려 했다.
다수의 결계가 시야를 어지럽게 했으나, 레이로부터 전개된 절대권역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레이는 황성에 남아있는 몇 가지 방위 기능을 단숨에 무너뜨리며 계속 전진했다.
황좌까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까지도, 방위 시스템을 제외하면 레이를 막아서는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가 황좌까지 문 하나를 남겨두었을 때 로얄가드 미하엘이 앞을 막아섰다.
"..."
"..."
미하엘은 충직한 기사였으며, 또한 영광스럽게 죽을 자리를 탐하는 자였다.
그리고 미하엘은, 자신이 서게 된 최후의 전장 위에서 씁쓸함을 입가에 담았다.
레이와 미하엘은 말 없이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미하엘은 정상급 무장으로 온몸을 둘렀으나 그럼에도 레이의 검격을 제대로 상쇄조차 해낼 수 없었다.
얼마 안 가 온몸이 바스러진 미하엘은, 잘려나간 거대한 기둥을 붙잡고 몸을 일으킨 후... 그대로 침묵했다.
레이는 미하엘을 지나쳐 황좌로 향하는 마지막 문을 열었다.
"..."
"..."
황제는 여전히 황좌에 앉아있었다.
황제와 레이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묻고자 한다면 서로에게 답을 듣고 싶은 게 있었다.
황제는 어째서 레이가 이렇게까지 필사적이었는지 의아했다.
황제는 레이라는 한 명의 인간을 나름대로 이해하고자 했고, 황제의 자리에 앉은 자가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자비를 베풀었다.
하지만 황제는 결국 레이와 같은 삶을 살지 못 한 타인이었기에, 레이의 선택과 필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 레이는 어째서 황제가 마지막까지 황좌를 지키고 있었는가 의아했다.
몇 가지 추측이 떠오르긴 했으나, 황제에게 직접 듣지 않는 이상 확신할 수는 없었다.
허나 이제 와서는 그 모든 의문이 부질없었다.
황제는 마지막까지 고고하게 황좌에 앉아 레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600년 전 제국이 치르지 못 한 업보가, 나를 찾아왔구나."
"..."
이미 각오를 마친 황제에게, 레이가 검을 휘둘렀다.
레이가 휘두른 궤적은 황제의 가슴을 짧게 갈라냈다.
황제는 갈라져 나간 심장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의식이 멀어지기 전.
황제, 포이보스는 선황을 떠올리며 짧게 중얼거렸다.
"아버지를 뵐 낯이 없군."
포이보스는 그리 자책했으나, 포이보스는 분명 선황보다 현명했다.
선황은 감정에 휘둘려 후계자에 관한 사안을 빠르게 마무리하지 않고 방치했고, 그로 인해 황제가 지닌 권위의 추락과 혼란을 자처했다.
적어도 포이보스는 그러한 선황의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았다.
군신과의 유대를 중시하면서도 결코 감정에 휘둘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황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 한 것이 종국에 비극을 불러왔다.
"..."
포이보스는 황좌에 앉아 숨이 멎을 때까지 황제의 위엄을 지켰다.
레이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모로스를 떨어뜨렸다.
"..."
육신은 한계를 넘은 지 오래였다.
망가진 육신을 지탱한 것은 오직 레이의 의지였다.
그리고, 목표했던 종착점에 도달함으로써 마지막까지 발악했던 레이의 의지 또한 육신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삶의 끝자락에서 몰려온 무력함이 레이를 앞으로 고꾸라뜨렸다.
"..."
사고가 흩어진다.
무언가를 추억하려 해도, 이제는 슬피 울 시간조차 레이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한참 전에 맥박을 잃었던 레이의 육신은, 앞으로 고꾸라져서 움직임을 멈춘 순간 이미 사체와 구분되지 않았다.
"..."
레이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나도 묽어진 핏물만이 가슴의 구멍에서 떨어져 바닥을 흘렀다.
그때, 황명을 어긴 소수의 기사가 황좌를 찾아왔다.
그들은 너무나도 참담한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한 후 잠시 말을 잃었다.
스릉!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기사들은 검을 뽑아 레이를 겨누었다.
레이에게서는 이미 어떠한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기사들은 하다 못 해 레이의 목이라도 자르려 했다.
헌데 검이 휘둘러지기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레이."
기사들이 목소리를 듣고 눈을 돌렸다.
엉망진창이 된 한 소녀가 황좌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기사들은 소녀의 정체를 직감하고 소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소녀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서클을 드러냈다.
네 개의 서클이 섬광을 토해내며 마법을 발현시켰다.
콰드드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소수의 기사만으로는 루나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루나는 기사들의 육신을 꺾어버린 후 레이를 향해 뛰어갔다.
"레이... 레이... 레이..."
루나가 레이를 붙잡았을 때는 이미...
레이에게서 생기의 흔적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폭주한 코어가 사그라지며 텅 비어있는 가슴만이 루나에게 보였다.
죽어버린 사체를 손에 쥐고서, 루나는 레이의 이름을 연거푸 외쳤다.
"레이...! 레이...! 레이...!"
루나가 널브러져 있는 기사들의 육신을 자신의 주위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혈액을 짜내, 레이의 혈액과 섞어도 응고되지 않는 혈액을 비어있는 레이의 가슴에 부어 넣었다.
루나에 의해 억지로 인도된 혈액이 심장이 터지고 홀로 남은 혈관을 타고 순환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따뜻한 혈액이 너덜너덜해진 혈관을 돌았다.
이건 정말... 병신 짓이었다.
육체가 입은 손상 이전에, 레이의 육신과 영혼이 스스로 붕괴하고 있었다.
그건 레이가 한시적으로 얻은 무한한 힘에 대한 대가였다.
그럼에도 루나는 혈액을 레이의 가슴에 흘려 넣다가, 결국 레이의 멱살을 붙들며 비명을 토해냈다.
"레이!!!!!"
레이는 답이 없었다.
루나가 레이의 멱살을 더욱 강하게 틀어쥐었다.
"나랑 함께 가겠다고 했잖아!!!!!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잖아!!!!!"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루나는 레이를 붙잡지 못 했고, 레이는 이곳에서 홀로 죽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줬잖아!!!!! 당신의 바람을 위해 헌신했잖아!!!!!"
그 길었던 헌신의 대가를 마주하며, 루나는 결국 레이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전부 죽여버릴 거야...!! 당신이 없는 세상을 저주할 거야...!! 당신이 사랑했던 이들도... 당신이 미워했던 이들도... 내 손으로 전부... 전부... 죽여버릴 거야...!"
형체를 이뤄가던 다섯 번째 서클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서클에 깃드는 어둠은 루나가 레이에게 품은 원망이었으며, 또한 레이를 향한 최후의 겁박이자 발악이었다.
나는 당신이 없다면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남을 수가 없다고... 그러니 제발 내 곁으로 돌아와 달라는 처절한 호소였다.
그때, 하나 남은 레이의 손이 울고 있는 루나의 머리 위에 툭 얹혀졌다.
레이의 목소리가 루나의 귓가에 들렸다.
"...그러지 마."
"레이...!"
"너는... 루나 너는..."
레이가 하나 남을 팔로 힘을 주어 루나에게 기대며 입술을 달싹였다.
"착한... 착한 마법사가 되기로 했잖아..."
"레이!!!!!!!!!!"
루나가 격앙에 차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레이의 귓가에 더는 루나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레이는 흐릿하게 변해만 가는 시야 속에서 홀로 중얼거렸다.
"그냥... 그냥 너를 만나고... 조용히... 너희랑 엄마랑 같이 살걸..."
미래를 알지 못 했기에 발악했었다.
타협하거나 멈춰 서지 못 하고 주변을 돌아보지 못 했다.
그게 이제 와서야 레이에게 참 많은 후회가 되었다.
항상 불안에 떨었으나 그럼에도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추억하며, 레이는 마른 눈물을 루나의 어깨 위로 떨어뜨렸다.
"나는... 마지막까지... 너를..."
"..."
레이가 눈을 감았다.
레이는 그 눈을 다시 뜨지 못 했다.
루나는 레이의 영혼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바스러져 가는 것을 너무나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안 돼... 안 돼..."
루나는 레이의 육신을 들고 걸음을 내디뎠다.
부서져 가는 레이의 육신을 품에 안고서, 황좌로 향했다.
"나는... 나는 이렇게 당신을 잃을 수는 없어."
황좌에 다가간 루나가 황제의 시신을 옆으로 밀어냈다.
황좌는, 황도에 흐르는 영맥의 무한한 마나를 관리하는 시스템의 중추였다.
루나는 비어버린 황좌 위에 레이의 육신을 앉혔다.
"레이... 제발..."
메마를 대로 메말라 더는 흐르지 않을 것만 같았던 눈물이 루나의 눈가에서 흘러내렸다.
소녀의 그 처절한 애증이 다섯 번째 서클을 완성시켰다.
다섯 개의 서클이 섬광을 토해냈다.
다섯 개의 서클에서 발산되는 제어력이 황도 아래 흐르는 영맥의 마나를 강제로 끌어들였다.
루나는 끌어들인 마나를 모조리 집약시켜 하나의 술식을 구성했다.
트드드득!
황좌를 중심으로, 시공이 얼어붙기 시작한다.
레이가 과거에 리실로테 레코드에서 경험했던 바로 그 풍경이, 레이를 뒤덮어가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시공은 외부와의 완전한 단절을 이룬다.
레이의 영혼과 육신이 붕괴되어가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외부와의 완전한 단절을 이루고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게 부족했다.
루나의 곁에 나타난 리실로테의 환영이 그 점을 지적했다.
"부족해."
*
자멸기를 쓰기 전.
최후의 선택을 앞두었을 때.
레이는 루나에게 아프텔이 깃든 팔찌를 건네주기 바로 직전에 홀로 남아 아프텔에게 물었었다.
"네가 개입했어?"
[...]
그건 근거 있는 직관에 의한 질문이었다.
리실로테가 남긴 사념이 제국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는 건 레이도 알고 있었다.
또한 리실로테가 남긴 사념은 레아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레아를 노출시킬 방법도 무궁무진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레아가 제국에 노출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그 배후로 추측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었다.
레이의 질문에 아프텔은 고개를 저었다.
레이가 인상을 찌푸리자, 아프텔의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지더니 인상 또한 변화했다.
아프텔을 매개로 나타난 리실로테의 환영이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내가 개입했어."
"목적이 뭐야. 대답해."
"좋아."
리실로테는 레이에게 자신의 목적을 숨김없이 밝혔다.
레이는 리실로테의 고백을 잠시 동안 곱씹었다.
그리고는, 이제부터 자신이 목숨을 바쳐 실행할 계획이 무엇인지 리실로테에게 알려주었다.
리실로테는 그때 들은 레이의 계획을 루나 앞에서 입에 담았다.
"안소니우스와의 접촉 및 설득. 현재의 네가 유일하게 홀로 대적하기 힘든 에른스트의 제거. 그리고 황성 장악 및 방위 시스템 강탈."
"..."
루나가 레이를 이해하는 만큼.
레이 또한 루나를 이해하고 있었다.
레이는 자신을 두고 루나가 결코 홀로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운이 크게 따라준다고 가정해도 무력한 임산부까지 데리고 황도를 무사히 벗어나는 건 망상이었다.
대륙의 총력이 이 황도에 결집해있었고, 아무리 레이와 루나라고 해도 그들을 기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레이의 목적은 처음부터 황성의 장악 및 방위 시스템 강탈이었다.
극히 일부라도 루나가 방위 시스템의 조력을 얻을 수 있다면, 황도를 요새 삼아 몸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니까 레이가 입에 담은 '탈출'은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다.
"..."
메테오가 떨어진 탓에 방위 시스템의 주요한 기능이 정지되었다.
허나 영맥의 마나만 제대로 끌어낼 수 있어도 루나는 분명 이곳에서 초월적인 전력이 되었다.
절대권역을 펼칠 수 있는 '소드마스터'만 없다면 막대한 군세만으로는 루나를 공략하는 것이 힘들었다.
전멸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뚫어낼 수 없을 터다.
레이는 자신이 계획했던 종착점에 결국 도착했다.
그러나, 레이가 예상치 못 한 한 가지 변수는 황제의 판단이었다.
황제는 마지막까지 홀로 남아 황좌를 지켰다.
그리고 황성의 주요 시스템을 봉인해서, 외적이 활용하거나 파괴하지 못 하게 방비했다.
"이 아이의 소멸을 지연시키는 술식을 완성하고,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황성의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해."
"..."
"그리고, 내가 도움을 준다고 해도 황제가 봉인한 기능의 일부라도 되찾기 위해서는..."
리실로테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루나에게 말을 이었다.
"제국 시조룡과의 계약을 완료한, 황실의 피가 흐르는 인간이 필요해."
"..."
"네가 데려간 황족, 아직 살아있지?"
마왕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