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59화 (359/446)

359화

삶의 끝자락.

그 최후의 순간에...

레이는 닿을 수 없어야만 했던 영역에 발을 들였다.

혹사를 이어가며 육신과 영혼에 깊게 새겨졌던 그 무수한 상흔들이 레이를 그리로 향하게 했다.

삶을 탐하기만 했던 빈약한 재능이 이제서야 홀로 빛나며 레이를 일으켜 세웠다.

레이는 빛으로 이루어진 검을 쥐고 다시 에른스트와 마주 섰다.

붉은 원에 둘러싸인 에른스트의 황금빛 눈동자가, 레이의 시야에 뚜렷하게 담겼다.

"..."

저 눈동자는 무엇을 이루기 위해 완성됐는가.

레이는 에른스트가 추구했고 방비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예상이 가서, 자조를 삼켜야 했다.

"..."

힘의 특수성, 혹은 존재의 특수성.

그러한 특수성을 지닌 개체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을 쉽사리 기만하고 짓밟았다.

때로는 너무나 불합리한 특수성을 지닌 개체가 대륙 전체를 혼돈에 빠뜨리기도 했다.

고강한 경지에 닿은 이들조차 생소하고도 강력한 힘을 다루는 존재에게 대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수성을 지닌 개체를 패퇴시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그리고... 에른스트가 이루어낸 두 번째 개안은, 세상을 유린하는 그 모든 이질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의 대답이며 궁극이었다.

세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에른스트의 두 눈동자는 상대가 지닌 특수성의 본질까지 시야에 담아낸다.

시야에 담기는 정보를 바탕으로, 에른스트는 특수성에 기반한 상대의 우위를 짓밟고 바닥으로 끌어 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바닥으로 끌어 내린다 해서 에른스트가 대단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에른스트는 그저, 서로가 대등한 눈높이에서 마주 볼 것을 상대에게 강요했다.

힘의 특수성이 아닌... 순수한 역량의 투쟁을 상대에게 강요했다.

그렇기에 에른스트가 완성해낸 개안은 레이에게 극히 치명적이었다.

레이는 이제까지 공간검이라는 힘의 특수성에 크게 의지해 왔다.

빈약한 재능을, 공간검이라는 힘의 특수성과 초월적인 존재가 각인시킨 검술의 궤적들로 숨겨왔다.

오랜 시간을 그리 싸우다보니 레이는 공간검이라는 힘의 특수성이 자기 역량의 일부라 착각했다.

시건방진 착각이었다.

레이는 처음 검을 쥐었을 때부터 특혜를 몸에 감고 얄팍함을 가려왔다.

레이의 그 얄팍한 역량이, 에른스트의 두 눈동자에 의해 까발려졌다.

부끄럽게도, 남의 것을 자기 것처럼 여기고 자만하며 휘둘렀던 레이는...

순수한 역량의 투쟁에서 에른스트를 상처조자 입히지 못 했다.

"..."

그 끝에 이르러 결국.

닿지 못 하리라 여겼던 영역에 발을 들였다.

레이가 평생토록 이어왔던 그 처절한 투쟁이 최후의 순간 기적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는 여전히 얄팍했다. 그게 가짜의 숙명이었다.

순수한 역량의 투쟁에서 레이는 에른스트에게 결코 닿지 못 했다.

그건 시간을 들여서 메워야 하는 간극이었고, 레이는 이미 종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들였음에도 레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여전히 하나였다.

힘의 투쟁. 검을 다루는 역량에서 아득하게 앞서있는 에른스트를, 레이는 힘으로 찍어눌러야 했다.

레이가 절대권역을 전개했다.

!!!!!!!

두 소드마스터의 절대권역이 충돌하며 거대한 울림을 토해냈다.

한 공간 안에 서로 다른 절대권역이 중첩되자 그 안을 흐르던 마나의 기류가 미친듯이 뒤틀렸다.

레이는 온몸을 짓이길 것만 같은 압력을 이겨내며 허공에 광검을 빚어냈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러서 폭주하는 코어의 마나를 훨씬 용이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된 레이는, 수십 수백 개의 광검을 빚어내 하늘을 뒤덮었다.

하늘이 눈부시게 빛나자 에른스트 또한 레이가 쏟아낼 폭격을 상쇄하기 위해 광검을 빚어냈다.

허나 폭주하는 코어를 지니지 못 한 에른스트가 가용할 수 있는 마나량은 레이에 비해 훨씬 떨어졌다.

서로의 머리 위에 빚어진 광검의 숫자는 에른스트가 아득히 열세였다.

레이와 에른스트가 동시에 광검을 움직였다.

콰가가가가가가각!!!!!!!!!!!!!!!!

광검의 폭우가 서로를 향해 쏟아져 내리다 충돌했다.

에른스트가 빚어낸 광검은 레이의 것보다 월등히 안정적이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하늘을 뒤덮을 만큼 무수한 레이의 광검이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에른스트를 압도했다.

촤악!

에른스트의 육신에서 처음으로 피가 튀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기교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화력이 에른스트가 서 있던 공간을 휩쓸었다.

!!!!!

섬광이 에른스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만 싶어지는 그 끔찍한 풍경 속에서, 에른스트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레이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에른스트는 육신에 새겨지는 상처를 개의치 않고 전진했다. 그건 폭풍이 이는 바다를 홀로 가로지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에른스트는 단 한 번의 치명상도 허용하지 않고 레이와 거리를 좁혔다.

레이는 또다시 눈앞에서 에른스트와 검을 맞대야만 했다.

쩌엉!!!!!!!!!!!

검을 한 번 맞댄 후폭풍만으로 서로의 육신이 찢기려 했다.

레이도 에른스트도 개의치 않고 디딤발에 힘을 주었다.

검격이 맞부딪치며 빛의 파편이 화려하게 비산했다.

레이는 화력과 힘으로 에른스트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에른스트가 그려내는 검의 궤적은 정밀하게 파고들어 레이의 살갗을 찢어냈다.

에른스트 프리슬란.

그 진실된 소드마스터의 역량을 마주하며 레이는 경이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이겨내야만 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레이가 사랑했던 모두가 죽음을 피하지 못 했다.

까드득!!!!!!!

레이가 손해를 감수하며 에른스트의 일격을 쳐낸 후 뒤로 물러서며 검을 고쳐 잡았다.

에른스트 또한 검을 고쳐 잡으며 레이를 마주 보았다.

의무감이 깃든 살의만을 품고 서로를 바라보던 눈동자에, 잠시잠깐 죄책이나 동정 따위의 감정이 깃들었다가 사라졌다.

레이가 먼저 에른스트를 향해 짓쳐들어갔고, 에른스트가 레이의 일격에 반응했다.

레이는 전력을 다해 우직하게 검을 찔러넣었다.

에른스트라면 분명 이런 우직한 찌르기 따위는 쉽사리 흘려낸 뒤 빈틈을 파고들어 목을 베어낼 터다.

허나 레이는 통하지도 않을 기교를 배제한 채 오직 우직하게 검을 찔러넣었다.

그와 동시에 폭주하는 코어에서 흘러넘치는 모든 마나를 단 한 번의 찌르기에 집중시켰다.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자아내는 검의 기교마저도 정면에서 바스러뜨리고 나아가겠다는, 그런 결의가 담긴 전력이었다.

에른스트 또한 레이의 일격을 파훼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끌어냈다.

진정 위대한 경지에 오른 자가 그려내는 검의 궤적이 흐릿하게 변했다.

두 소드마스터의 검이 맞닿는다.

그 직후.

일대가 눈부신 섬광으로 뒤덮였다.

!!!!!!!!!!!!!!!!

섬광과 함께 터져나간 폭풍이 대기를 밀어내며 일대를 진공으로 만들었다.

모든 대기가 밀려나자 언제 굉음이 울렸느냐는 듯 지면에는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두 소드마스터는 침묵 속에서 여전히 검을 손에 쥔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저 멀리까지 압축된 대기가 다시 밀려오기 전.

에른스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공기는 없었으나, 서로의 육신에 박혀있는 검이 목소리를 전달해주었다.

"제국의 파멸이 되고자 하느냐."

"아니요... 저는... 저는..."

레이는 잠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국의... 소드마스터라고... 제국의 소드마스터라고 기록될 겁니다."

레이의 답을 듣고 에른스트가 건조하게 웃었다.

레이의 답에 담겨 있는 함의가 무엇인지, 또한 레이가 품고 있는 바람이 얼마나 가망 없는지 에른스트는 모르지 않았다.

에른스트는 울먹임을 참고 있는 소년을 다시 한 번 두 눈동자에 담았다.

눈앞의 소년은 단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삶을 던져가며 대륙을 구원했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의 소망을 외면하지 못 해, 삶을 던져가며 이루었던 모든 걸 자기 손으로 무너뜨렸다.

그토록 단순한 이야기였다.

에른스트는 씁쓸하게 한탄했다.

"너는... 참으로 미련한 놈이다."

"..."

레이와 에른스트가 손아귀에 다시 힘을 주었다.

서로의 육신에 박혀 있는 검이 동시에 사선으로 휘둘러졌다.

레이의 왼팔이 잘려나갔고, 에른스트가 숨을 거두었다.

레이는 에른스트를 지나친 후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느새 생겨난 거대한 구덩이를 벗어난 레이는 자신의 종착지가 될 곳을 바라봤다.

이제 레이에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쩌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표현조차 어폐였다.

눈을 한 번 감으면 다시 뜨지 못 하리란 걸 레이는 직감했다.

육신도 영혼도 그 모든 게 바스러지기 전에 황성에 닿아야 했다.

레이는 반쯤 꺾인 다리로 지면을 찍어 밟았다.

*

"..."

모든 전황을 보고받고 있었음에도.

황제는 조금의 흥분이나 당혹도 내비치지 않은 채 황좌를 지켰다.

황제를 수호해야 하는 자들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며 감히 목소리를 높였으나 황제는 답하지 않았다.

황제는 침묵 속에서 황도에서 진행된 전투를 돌아보았다.

"..."

메테오가 치명적이었다.

그 무엇보다 메테오가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황도 내부의 피해만 감수한다면, 본래는 황도의 방위 시스템만으로도 로드 급 한둘 정도는 제압할 수 있어야 했다.

황도의 방위 시스템이 지닌 화력이라면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메테오가 떨어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레이로 인해 황도의 피해가 지나치게 커지자 포격을 활용한 섬멸을 이미 논의 중이었다.

허나 메테오가 떨어져내렸고, 메테오로부터 황도를 지켜내는 것은 성공했으나 방위시스템이 망가졌다.

일부 기능은 살아있으나 로드 급 수준을 막아내기엔 한참 미달이었다.

그 때문에 에른스트가 정면에 나서야 했다.

에른스트가 정면에 나서고도 이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을 지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이건 누구를 질책할 수도 없었다.

대륙의 그 누구도 메테오가 시간도 아닌 분 단위로 전개가 완성되어 떨어져내릴 것이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다.

"..."

황제는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아주 냉정하게 현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이 악몽 같은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수십 가지 방안이 뇌리를 스쳤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황도를 중심으로 제국을 아예 재건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대로 모든 게 마무리 되어도 재건 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될까 회의적이었다.

"..."

대처 방안을 몇 가지로 추렸을 때쯤.

제국을 수호하던 위대한 검이 무너졌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혼란이 일었지만 황제는 여전히 담담하게 황좌를 지켰다.

에른스트의 소식까지 듣고서 마침내 결정을 내린 황제가 황좌 아래 대기하던 이들에게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병력을 손실할 수는 없다. 황도에서 물러선다."

"...!!!"

"빠른 시일 내에 그대들이 황도를 탈환하리라 믿겠다."

마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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