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
힘으로 소드마스터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였기에 레이도 상식처럼 외우고 있었다.
허나 직접 검을 맞부딪치기 직전까지, 그 명제를 온전하게 이해하지는 못 했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되도 않는 건방을 떤 것이리라.
에른스트는 레이조차 혼란을 겪어야 했던 일그러진 공간을 너무나 쉽사리 유영하며 파고들었다.
레이가 제대로 제어해내지 못 한 힘을 단번에 찍어눌렀고, 악을 쓰는 레이를 손쉽게 상처입혔다.
레이는 어깨가 베이고 나서야 자신과 에른스트의 간극에 무엇이 있는지 실감했다.
츠즈즉!
허공에 맺힌 광검이 뒤로 밀려나는 레이를 향해 겨누어졌다.
절대권역 속에서 에른스트가 만들어낸 광검은 형태를 확실하게 유지 못 하고 자꾸만 일렁였다.
흘러넘치는 마나를 집약시켜 빚어낸 광검은 실제로 불안정했으나, 위력만큼은 강력했다.
레이는 몸을 짓누르는 압력을 느끼며 검을 빙글 돌렸다.
콰아아아앙!!!!!!!!!
허공을 찢어내고 모습을 드러낸 도약 검기가 레이를 노리던 광검을 요격해냈다.
레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양손의 검을 연속해서 돌려 잡았다.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 에른스트와의 간극을 근본적으로 좁힐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용할 수 있는 기술을 전부 가용해 에른스트를 압박해서 변수를 창출하고 피해를 누적시켜야 했다.
보통의 검술이라면 불가능했겠지만, 공간검이라는 위대하고도 괴이한 신화 속 검술이라면 분명 가능했다.
레이는 에른스트를 상대하기 위해 남겨놓았던 여력을 모조리 쏟아낼 각오를 다지며 검을 돌려 잡기를 멈추지 않았다.
까드득!!!
에른스트를 중심으로 공간이 그물처럼 깨져나갔다.
공간에 새겨진 실금 하나하나가 레이가 쥐어짜낸 도약검기였다.
그 직후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도약 검기가 에른스트를 향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레이는 상황을 관망하지 않고 폭우 속으로 직접 뛰어들었다.
!!!!!!!!!!
비산하는 파멸 속에서 레이는 어떻게든 변수를 만들어내기 위해 에른스트를 찍어눌렀다.
프리슬란 가문의 검술은 화려하기보다는 무겁고 정밀했다.
그렇기에 레이는 힘으로 압도할 수 있다면 에른스트가 지닌 검술의 장점을 약간이나마 상쇄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역시나 허황된 망상이었다.
광검과 도약검기가 격돌하는 전장에서 에른스트의 대검은 연기처럼 아지랑이쳤다.
경박스러울만큼 기민하게 너울지던 에른스트의 대검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한없이 무거워졌다.
콰앙!!!!!!
형식에 얽매이는 경지는 벗어난 지 오래였다.
흐르듯이 변화하는 검술은 필요할 때 필요한 모습을 갖추었다.
단순히 검술의 경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레이가 분석이 무의미하다고 확신했던 힘의 격류에서 에른스트는 흐름을 읽어냈고, 그 흐름을 타고 흘러들었다.
에른스트는 일방적으로 레이의 힘을 뒤틀고 파고들어, 이윽고 레이를 다시 눈앞에 두었다.
그 찰나 에른스트와 레이의 사이에서 도약검기가 터져 나왔다.
레이는 자기 노림수가 통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두려울 만큼 정제된 검의 궤적으로 도약검기를 옆으로 쳐냈다.
에른스트의 대처에서 당혹 따위는 읽어낼 수가 없었다.
레이는 또다시 강박적으로 도약검기를 흩뿌렸고, 에른스트는 광검을 생성해서 맞부딪쳤다.
무수한 격돌 속에서 거대한 쇳덩이조차 증발시킬 힘의 파편이 일대를 잠식했다.
이제는 어지간한 기사조차 접근할 수 없게 변한 전장 속에서 레이는 필사적이었다.
검을 다루는 역량에서 까마득히 밀린다는 것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도약검기를 그리 폭우처럼 쏟아부었음에도 에른스트에게 제대로 된 상처 하나 새기지 못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다.
에른스트는 도약검기가 언제 어디서 떨어져 내릴지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대응해냈다.
레이는 에른스트의 눈동자를 보았다.
붉은 원이 황금색 눈동자를 가둔 채 레이를 마주보고 있었다.
두 번째 개안. 공간의 일그러짐을 시각화시킨다.
미래를 꿰뚫어본다고까지 일컬어지는 그 눈동자가 도약검기를 정면에서 파훼해냈다.
도약검기가 떨어져 내리기도 전에, 에른스트는 한발 앞서 그 궤적을 읽고 있었다.
레이가 쥐어짜낸 도약검기는 변수나 기회를 창출하지 못 했다.
얽혀가는 힘의 격류 속에서 레이는 어느새 짓눌려 죽어가고 있었다.
결국 레이는 마지막 수단을 사용했다.
츠즉!
이건 미친짓이다.
허나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어차피 몇 분 일찍 죽냐 늦게 죽냐의 차이였다.
츠즈즉!
레이의 움직임이, 뚝뚝 끊겨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검을 쥐었던 프레체스조차 대응해내지 못 했던, 검술에 대한 기만이었다.
아무리 에른스트가 고강한 경지에 오른 소드마스터라 해도 이것만은 제대로 대처할 수 없어야 했다.
에른스트에게 다가선 레이의 자세가 예고 없이 치환됐다.
쩌엉!!!!!!!!!!!!
"..."
막혔다.
소드마스터의 직감 따위로 막아낸 것인가.
레이는 개의치 않고 다시 자세를 치환했다.
그렇게 다섯 번의 충돌이 지나갔다.
"..."
다섯 번 모두 막혔다.
소드마스터의 직감은 무섭구나, 뭐 그딴 낙관적인 생각을 레이는 품을 수가 없었다.
에른스트는 분명 다섯 번의 공격을 완벽하게 파훼했다.
레이는 에른스트와 검을 맞대고 처음으로 강력한 당혹감을 머금었다.
도약 검기는 허공을 찢기 전에 전조 증상이 존재했기에 미리 읽어낼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 기술은 아니었다.
그 어떤 전조도 없이 자세가 치환되는 이 기술은, 공간의 일렁임을 본다고 해서 궤적을 파악할 수 있는 기술이 결코 아니었다.
헌데 어째서... 대체 어째서 읽힌 거지?
권능으로 인해 붉게 물든 레이의 눈동자가 에른스트를 보았고, 에른스트는 뚝뚝 끊어지듯 움직이는 레이와 정면에서 충돌했다.
!!!!!!!!!!
"..."
에른스트와 처음 마주쳤던 순간.
레이는 자멸기까지 동원한다면 충분히 공멸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열 번 중 일곱 번은 공멸할 수 있으리라, 그리 자신했다.
레이의 한 없이 뒤떨어지는 역량과 시야가 그러한 오판을 일으켰다.
레이는 에른스트의 진실된 역량을 꿰뚫어 보지 못 했다.
에른스트 프리슬란.
현존하는 정점이자, 하르시아 이후 가장 완벽하게 완성된 소드마스터.
에른스트가 이루어낸 두 번째 개안은 단순히 공간의 일렁임만을 보기 위한 기술이 아니었다.
에른스트의 눈동자는, 공간의 일렁임을 넘어 세상의 이면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변질된 권능이든, 다른 차원의 존재든, 혹은 공간검이든, 단지 힘의 특수성만으로는 에른스트를 농락할 수 없었다.
절대권역과 두 번째 개안의 결합으로 인해 에른스트와 대적해야 하는 모든 존재는 순수한 역량의 투쟁을 강요당했다.
그 힘은 분명...
세상을 유린하는 이질에 대항하기 위한 또 하나의 대답이었다.
형태는 달랐으나, 하르시아가 이루었던 것과 같은 방향성을 지니고 탄생한 궁극이었다.
에른스트는 이 힘을 후대에 전하려 했다.
그건 무인으로서 갈망이기도 했지만... 에른스트는 언젠가는 이 힘이 제국과 대륙을 구원할 열쇠가 되리라 믿었다.
그렇기에 에른스트는, 이 힘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자기 신념을 완전히 꺾었었다.
"..."
레이는 에른스트 프리슬란이 지닌 힘이 무엇인지 완전히 오판했다.
평범한 소드마스터가 상대였다면 자멸기로 충분했을지 모르나, 에른스트 프리슬란만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레이는 인간이 이루어낸 진정한 초월을 마주하며 자신이 받은 권능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곱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는 홀로 무너질 수가 없었다.
역량의 밑바닥이 드러난 레이는 다시 한 번 자세를 치환했다.
에른스트는 대검을 미끼 삼아 레이의 눈을 현혹한 뒤 맨손으로 레이의 품에 파고들었다.
쩌억!!!!!!!!
에른스트의 주먹이 폭주하는 레이의 코어를 직격했다.
코어가 흔들리며 레이의 육신을 흐르던 마나의 물줄기가 요동쳤다.
레이는 온몸이 찢겨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지면에 처박힌 채 한참을 밀려났다.
에른스트는 지친 기색이 만연했으나 여전히 무사했고, 레이의 몰골은 너무나도 처참했다.
에른스트는 널브러진 레이를 노려보며 대검을 붙잡았다.
"돌아가라."
"..."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그 아이의 목을 베어오란 말이다!!!!!"
후회와 동정을 담아, 에른스트는 그리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울분을 토했다.
레이는 에른스트의 울분을 들으며 종언에 가까워진 육신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켜 두 자루의 검을 다시 쥐었으나, 한 자루가 부서져 내렸다.
그럼에도 레이는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재능이 하찮았다.
이건 기만이나 엄살이 아닌 자명한 진실이었다.
"알지 못 하는 세상에 떨어졌습니다. 언어도 문화도 그 모든 게 다른 세상에 홀로 떨어졌습니다."
한 지역에서 천재라 불릴 수준은 되었지만, 고작해야 그뿐이었다.
진정 세상에 격변을 일으킬 불세출의 재능에 비하면 너무나 하잘것없었다.
"제가 처음 머금었던 감정은 증오였고 분노였습니다. 홀로 울며 내게 이런 운명을 강제한 초월자를 원망했습니다."
빈약한 재능을 지닌 채 삶을 경원시 했다.
세상에 애정이 없었기에 쉽사리 사지에 발을 들였고, 투쟁을 반복했다.
"증오와 분노에 질식해가던 제게, 벨라는 대가 없는 희생을 베풀었습니다. 그녀의 헌신과 온기가 제 삶에 의미를 부여했고, 그제야 비로소 저는 사랑이란 감정을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선을 넘었다.
수명이 토막나는 것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비록 그녀와의 관계가 과거와 같지 않을지언정, 벨라가 제 삶의 토대가 되어주었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이룩한 모든 인연과 감정과 위업이... 그녀의 존재 위에 세워졌습니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너무나 쉽사리 삶을 소모한 것을 후회했다.
허나 이미 너무 늦었기에 멈춰 서지 못 했다.
"그리고 이제는... 레아가... 그 아이가 벨라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레아가 있었기에 벨라는 그 수많은 기만에서 해방되어, 환히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투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른 존재가 겪었던 경험을 체험하거나, 역사에 감춰진 진실과 마주하거나, 초월적인 존재와 맞닥뜨리기도 했다.
하르시아의 편린을 이어 기적을 행하기도 했으며, 진정 인간의 몸으로 초월의 경지를 이룩한 자와 육신과 영혼까지 희생해가며 검을 맞대기도 했다.
"저는... 그래서 레아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빈약한 재능이 레이의 삶을 잡아먹었다.
빈약한 재능은 그저 삶을 탐하기만 하며, 레이에게 죽음을 강요했다.
"그러니 부디..."
그토록 빈약한 재능은, 모든 희망을 잡아먹고 최후의 순간이 다가온 지금에서야...
"제 선택을..."
닿을 수 없어야만 했던 영역에 발을 들였다.
"용서하십시오."
섬광이 형상을 이룬다.
레이는 빛으로 이루어진 검을 손에 쥐고 부서지는 육신을 완전히 일으켜 세웠다.
두 소드마스터의 절대권역이 충돌했다.
제국의 소드마스터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