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57화 (357/446)

357화

"..."

제국의 중심부가 무너져내렸다.

뜯겨나간 잔해와 함께 뜨거운 폭풍이 휘몰아쳤다.

너무나 처참하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을 생존한 제국민들은 마주해야 했다.

수많은 물자와 건축물, 그리고 생명이 증발했다.

그 지옥 속에서 찾아낼 수 있었던 유일한 위안은, 당장 가용할 수 있는 고위 전력은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는 것이었다.

제국의 고위 전력은 레이를 포위하기 위해 황도 내부나 황도 인근에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메테오가 떨어지기 전에 황도의 방위 결계 안으로 피신하는 게 가능했다.

황도의 방위 시스템은 단 한 번이나마 메테오의 직격조차 견뎌내는 위업을 이루었고, 덕분에 제국의 고위 전력은 희생이 적었다.

하지만, 황도의 방위 시스템이 보호한 것은 오직 황도뿐이었다.

황도로부터 수백 킬로미터가 떨어진 지역까지 메테오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물론 그 반경의 모든 것이 무너진 것은 아니긴 했다.

정면에서 열기와 충격파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기사급 이상의 전력은 중상을 입었더라도 생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국의 최중요 시설 또한 자체 방위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만큼 충격파와 지진이 덮쳤다고 해도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을 터다.

허나 단지 그뿐이었다. 당장 사용 가능한 '도구'만 비교적 무사할 뿐이었다.

황도를 직격한 메테오로 인해 제국을 이루는 '기반'이 소실되었다.

제국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그 기반이 바스러졌다.

거대한 나무의 잎사귀는 남아있으나 뿌리가 통째로 불탔다는 의미였다.

줄기와 잎사귀가 남아있다고 한들 뿌리를 잃어버린 나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건 제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늘의 재앙으로 인해 누군가는 제국에 등을 돌리고 누군가는 제국에 이빨을 드러낼 터다.

필연적으로, 제국 또한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기 위해 발악하며 남의 뿌리를 긁어가려 할 것이다.

모두가 꿈꾸던 찬란한 미래는 사라졌다.

기약 없는 혼란과 난세만이 열기와 함께 불어닥치고 있었다.

에른스트는 다가올 어둠의 시발점에 서서 검을 쥐었다.

"...이게 너의 선택이더냐."

에른스트는 감정이 들끓는 걸 느꼈다.

들끓어대는 감정의 정체는... 분노보다는 원망에, 원망보다는 배신감에 가까웠다.

"단 한 명이면 됐다."

황제는 '레아'와 '벨라' 둘을 참하라 명했다.

그 둘의 숨만 레이가 직접 끊어낸다면 모든 일을 덮고 넘어가겠다고 약조했다.

레이을 영웅으로서 대우해줄 것이고, 이 사태와 엮인 다른 관계자들 또한 어떤 형식으로든 벌하지 않겠다고 약조했다.

이는 분명 황족을 은폐한 레이에게 황제가 쥐어짤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였고, 대륙을 위해 희생한 영웅을 향한 예우였으며, 또한 레이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건넬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둘을 참하라 전하라는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에른스트는 레이에게 레아 한 명이면 충분하다고, 그리하면 내가 너의 편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리 중대한 사안에 관한 황제의 확고한 뜻을 정면에서 어긴 것은, 에른스트의 삶을 통틀어 그때가 두 번째였다.

"단 한 명이면... 된다고 하지 않았더냐."

에른스트는 레이가 어떤 인물인지 알았다.

적어도 레이가 무엇을 우선하는 지 알고 있었고, 모친이라 여긴 여인에게 레이가 얼마나 커다란 애정을 지니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에른스트는 레이에게서 벨라를 앗아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벨라를 살리는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음에도, 에른스트는 그 대가를 레이 대신 치러주겠다고 결심하고 약속했다.

황제의 분노를 대신 감수하고, 또한 황제의 체면과 권위를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에른스트는 스스로 막대한 실권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서는 길을 택했다.

그건 손해밖에 없는 그저 멍청한 선택이었다.

되도록 실리를 우선하는 에른스트가 그런 멍청한 선택을 택한 것은...

레이를 동정했기 때문이고, 레이에게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며, 또한 제국을 수호한 영웅을 향한 개인으로서의 예우였다.

"헌데 이게 너의 선택이더냐."

레이가 택한 것은 모든 걸 잃는 길이었다.

에른스트는 레이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레이는, 혈연적으로는 사촌밖에 안 되는 아이 하나를 살리겠다고...

자기 삶을 걸고 이룩한 신화적인 업적을 스스로 짓밟고 파멸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토록 많은 것을 희생해서 만에 하나 레아를 살려 황도 밖으로 내보냈다고 해도, 그 아이에게 정상적인 삶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 비루한 아이의 삶을 붙잡아보겠다고 레이는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삶을 구렁텅이에 밀어 넣었다.

에른스트는 도저히 레이의 선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이에게 있어 레아는 대체 무엇인가.

어미라 여긴 여인이 원치 않게 밴 새끼이고, 자기 삶을 깎아낸 원흉이었으며, 과도하게 제국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던 짐덩이였다.

그 재앙의 덩어리가 이토록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할 만큼 소중했던가?

"이게, 너의 선택이냐고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오직 레아를 지키기 위해 이제까지 이루었던 모든 위업과, 관계와, 애정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그리 답하며 레이는 에른스트를 마주 봤다.

에른스트를 바라보는 레이의 눈동자는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레이는 에른스트를 향해 그 어떤 원망이나 분노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레이는 제국이 레아라는 존재를 용납할 수 없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압도적인 우위'를 지닌 제국이 충분한 인내와 자비를 베풀어 주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레이는 떼를 쓰는 일 없이, 그저 담담하기까지 한 의무감만을 두 눈동자에 담아냈다.

그게 에른스트를 거슬리게 했다.

에른스트는 차라리 레이가 강렬한 원망과 적의를 눈동자에 담아주기를 바랐다.

자기가 이루어낸 위업에 대한 대가가 고작 이것이냐고, 그리 분노해주기를 원했다.

허나 지금 레이는, 과거에 대륙을 위협한 악마 숭배자들을 베어냈던 바로 그 순간의 눈빛으로 에른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에른스트를 견딜 수 없을 만큼 비참하게 만들었다.

서로가 바라보던 지향점이 너무나도 달랐음을, 에른스트는 그제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베고자 하느냐."

"예, 그렇습니다."

"...그래, 해보자꾸나."

절대권역이 펼쳐진다.

그 순간 레이와 에른스트는 같은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설프게 화려한 숙소에서 처음 서로를 만났던, 바로 그날의 기억을 돌아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실수를 했고 무엇을 잘못 선택했는가.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그날의 만남 이후 에른스트는 레이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다.

잃어버릴 뻔한 혈육을 되찾았고, 큰 위협에 처한 제국을 레이 덕분에 구해낼 수 있었다.

레이는 복잡하게 꼬일 수도 있었던 사안들을 에른스트 덕분에 수월하게 정리했다.

에른스트의 도움으로 레이는 곤란한 처지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행동할 수 있었다.

에른스트는 능구렁이처럼 굴었으나 되도록 레이를 존중하려 했고, 레이는 에른스트의 지원 아래 제국을 등에 업고 발아하는 재앙을 짓밟았다.

그리고 레이는, 비록 위업에 비해서는 약소한 대가라고는 하나 애정하는 이들에게 더 나은 삶과 기회를 베풀어줄 수 있었다.

분명 모든 것이 잘 맞물려 가는 듯했다.

돌이켜 보아도 두 사람은 서로를 지원하고 존중했다.

다만 에른스트는, 어떻게든 레아와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다고 짧게 후회했다.

같은 순간 레이는, 레아를 어떻게든 더 잘 숨겼어야 했다고 짧게 후회했다.

그랬다면 오늘 우리는 울적하게나마 함께 과거를 추억하면 웃음 지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의미 없는 후회를 뒤로하고, 이제는 의무감만이 깃든 살의를 머금은 채 서로의 검이 휘둘러졌다.

검격이 충돌한다.

!!!!!!!

거대한 울림이 번져나가며 황도에 몰아치던 열기를 일시에 밀어냈다.

레이는 몸을 울리는 충격파를 가볍게 떨쳐냈다.

폭주한 레이의 코어에서는 무한한 힘이 흘러넘쳤다.

성검을 든 안소니우스마저 찍어누를 수 있을 만큼, 그토록 압도적인 힘이었다.

하지만, '소드마스터'는 그저 힘으로 찍어누를 수 있을 만큼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소드마스터란 존재가 대마법사보다도 우위에 있다고 여겨지지 못 했을 것이다.

주르륵!

레이가 완전히 제어해내지 못 한 마나의 물결이 사방에 흘러넘쳤다.

그리고, 일대에 내려앉은 절대권역의 지배력이 멋대로 날뛰고 있는 레이의 마나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레이는 흘러넘치는 마나가 에른스트를 향해 뒤틀리는 것을 보았으나, 굳이 마나의 지배권을 되찾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절대권역이라 해도 권능에 의해 압축되어 물처럼 흘러내리는 마나를 전부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걸 완전히 통제하는 건 소드마스터의 영역조차 벗어나 그 너머에 있는 어딘가에 발을 들인 존재나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에른스트가 흘러넘치는 마나를 일부 앗아가 준 덕분에 레이의 육신에 걸리던 아득한 부하가 경감되었다.

절대권역 속에서 힘을 일부 상실하고 나서야, 레이는 자기 몸에 흐르는 마나를 그나마 수월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으드드드드득!!

물컹거리는 젤리처럼 흐르며 형상만 흉내내던 마나의 물결이 그제야 제대로 된 검강의 형상을 취했다.

레이가 피워 올린 검강은 검을 바스러뜨릴 것처럼 강하게 옭아매며 섬광을 토해냈다.

두 자루의 검을 손에 쥔 레이는, 제국의 소드마스터를 향해 정면에서 정직하게 검을 휘둘렀다.

쩌엉!!!!!!!

검격이 맞부딪친 여파만으로 일대의 지면이 가라앉았다.

그 거대한 충돌의 중심에서 뒤로 밀려난 것은, 에른스트였다.

폭주한 코어를 지닌 레이는 단순한 힘과 화력 면에서 에른스트를 두 배 이상 앞섰다.

그건 압도적이라 불러도 이견이 없을 격차였다.

검을 휘둘러 맞부딪친 힘 싸움에서 밀려났다는 건 에른스트에게 너무나 생소하고 괴이한 경험이었다.

레이는 에른스트를 그대로 밀어붙이기 앞으로 가속했다.

지면을 찍어 밟으면서도 레이는 에른스트가 잠시 거리를 벌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도리어 레이를 향해 마주 다가섰다.

그 흔들림 없는 에른스트의 모습을 보며, 레이는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점하고서도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설 뻔했다.

찰나의 순간 머뭇거린 레이는 억지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서로의 검격을 충돌시켰다.

콰가가가가각!!!!!!!!!!!!!!!

연쇄적인 굉음이 대기를 울렸다.

검의 궤적이 맞물릴 때마다 에른스트는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레이는 확연하게 에른스트를 짓누르고 있었다.

까드드드득!!!!!

설명이 불가할 만큼 응축된 공간검의 마나가 검강의 형상을 취한 채 포악하게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꾹꾹 눌러 구겼다가 다시 펼친 종이처럼 일그러진 공간 속에서 레이조차 혼란을 느꼈다.

그럼에도 레이는 물러서지 않고 에른스트를 압도하기 위해 두 자루의 검을 교차시켰다.

거대한 힘이 폭주하듯 공명하며 맞부딪치려는 순간.

에른스트의 대검이 일그러진 공간을 넘어 레이가 쥐고 있던 모로스를 타고 흘렀다.

평평한 지면을 굴러가는 바퀴처럼 부드럽게 모로스를 타고 흐른 대검이, 두 자루의 검이 마주치려던 교차점을 찍어눌렀다.

!!!!!!!!!!

레이로부터 발현되어 무차별적으로 인근을 집어삼키려던 힘이 오롯이 지면을 향해 터져나갔다.

이미 가라앉았던 지면이 더욱 깊게 붕괴하며 황도를 흔들어댔다.

레이는 통제조차 하지 못 한 힘을 그리 단번에 뒤틀어버린 에른스트가, 찍어눌렀던 대검을 반발력을 활용해 하늘로 끌어당겼다.

솟구치는 궤적과 함께 레이의 어깻죽지가 길게 갈라져 나갔다.

이제는 핏물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마나가 살갗에서 터져 나왔다.

에른스트와 검을 맞댄 레이가 처음으로 뒷걸음질을 치려던 찰나.

허공에서 광검이 집약되어 떨어져 내렸다.

제국의 소드마스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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