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레이와 안소니우스.
두 강대한 존재가 충돌을 이어간 끝에 건물에 박혀 들었다.
충돌의 여파로 인해 흙먼지가 넓게 비산해서 시야 확보를 어렵게 만들었다.
잠깐의 침묵 후, 두 사람이 박혀 들었던 건물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터져나온 찬란한 빛이 인근을 뒤덮은 먼지 구름을 밀어냈다.
빛의 중심에서 몸을 일으킨 안소니우스가 레이와 다시 맞부딪쳤다.
성검은, 레이가 아닌 안소니우스의 손아귀에 쥐여 있었다.
둘의 전투를 주시하던 모두가 그 광경을 보고 안도의 감정을 삼켰다.
레이는 단지 간악한 술수를 부려 성검을 통제한 것뿐이라고... 억지로 상황을 납득하기 위해 중얼거려야만 했던 합리화가 틀리지 않았음을 안소니우스가 증명해주었다.
레이와 적대해야만 했던 자들은 차마 내색하지 못 했던 불안과 의구심을 간신히 떨쳐내며 의무를 다하기 위해 병기를 들었다.
그리고 안소니우스는, 가득 일그러진 얼굴로 레이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혓바닥을 놀려서 나를 현혹하려는 것이냐...!!!"
"오늘이 지나고, 네가 직접 확인해."
"레이...!!!"
안소니우스가 레이에게서 되찾은 성검으로 신성력을 증폭시켰다.
찬란히 빛나는 사슬이 쏟아져 나왔고,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반투명한 성이 나타나 벽을 세웠으며, 하늘에서는 거대한 창의 형상을 이룬 신성결계가 떨어져 내렸다.
몰아치는 빛의 폭풍을 맞이하며 레이는 담담하게 안소니우스와 격돌했다.
쩌어엉!!!!!!!!!
굉음이 터졌다.
그와 함께 안소니우스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기적이 삽시간에 바스러져 나갔다.
레이는 성검을 활용하지 않고도 안소니우스를 일방적으로 압도했다.
흘러넘치는 마나의 물방울은 가장 견고한 신성 결계를 종잇조각처럼 찢어발겼다.
안소니우스는 레이가 성검을 넘기기 직전까지 전력을 발휘하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 모든 게 안소니우스를 혼란스럽게 했고, 레이는 모로스를 휘둘러 안소니우스를 찍어눌렀다.
콰아앙!!!!!
힘에서 압도적으로 밀린 안소니우스가 지면을 긁으며 미끄러졌다.
레이가 휘두른 검격에 의해 지면이 깊게 뭉개졌으나 정작 안소니우스가 입은 부상은 경미했다.
마법사들이 펼친 장막이 레이가 휘두른 검격의 위력을 경감시켰기 때문이었다.
군단의 지위관 중 한 명이 외쳤다.
"제국의 반역자를 참하라!!"
인근에 산개해있던 제국의 군단이 안소니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다.
레이가 휘두르는 힘은 여전히 압도적이었으나, 안소니우스가 정면에서 레이와 대적하며 그 힘을 일부나마 상쇄해주고 있었다.
안소니우스가 강력한 방패 역할을 해준 덕분에 군단은 진열을 갖추고 합공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힘을 아끼지 않고 전력을 레이에게 쏟아냈다.
검기가, 검강이, 마법이, 신성 결계가, 아티펙트가 그물처럼 엮인 채 수없이 쏟아져내리며 레이의 시야를 메웠다.
레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물러설 곳도 없었다.
레이는 안소니우스에게 다가가며 방울져 흐르는 마나를 흩뿌렸다.
콰아아아앙!!!!!
사방에 비산한 마나의 물방울이 쏟아지는 적의를 분쇄했다.
허나 그물처럼 엮인 채 쏟아져 내리던 적의는 결국 자그마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레이에게 닿았다.
콰악!!!
빛살처럼 쏘아진 아티펙트 하나가 레이의 허리에 틀어박혔다.
살가죽을 파고들려던 아티펙트는 레이의 육신에 흘러넘치는 마나의 물결을 견디지 못 하고 바스러졌다.
레이는 조각난 아티펙트를 허리에서 뽑아내며 잠시 휘청였고, 그 틈새를 더욱 많은 적의가 파고들었다.
"..."
레이는, 눈이 부셨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날카롭게 다듬어진 적의가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아득한 풍경 속에서 레이는 안소니우스와 검을 마주 댔다.
"이렇게 되어... 유감이야."
레이는 사과를 건넸다.
나의 이기심으로 인해 너를 기만했음을 사과했다.
그리고는 제국의 신검을 두 손으로 고쳐잡았다.
"우리의 계약을..."
"...!!"
"잊지 마."
끄드드득!!!
레이가, 폭주한 코어로부터 그저 흘러내리기만 하던 마나의 물방울을 가공해내기 시작했다.
레이의 의지에 의해 강제로 억눌러진 마나의 물방울은 끈적한 젤리처럼 요동치다가 찰나의 순간 검강의 형태를 갖추었다.
무리한 마나의 운용 탓에 레이의 팔을 감싸고 있던 살가죽이 모조리 터져나갔다.
그럼에도 레이는 검을 끝까지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진 검의 궤적이, 세상을 뒤덮고 있던 적의를 지워냈다.
!!!!!!!!!!!!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거세게 요동쳤다.
레이에게 함부로 접근했던 대부분의 존재들이 형체를 소실하고 먼지가 되었다.
일대의 지반이 붕괴되며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졌고, 막대한 압력으로 인해 응축되었던 공기가 터져나가며 황도를 재차 뒤흔들었다.
몰아치는 후폭풍 속에서 레이는 구덩이에 틀어박힌 안소니우스를 내려다보았다.
안소니우스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심각한 중상을 입었지만 안소니우스라면 빠르게 수복할 수 있었다.
어쩌면 수십 분 내에 몸을 거의 다 회복하고 전투에 복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레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안소니우스를 베어내지 않고 그 자리에 둔 채 구덩이를 걸어나왔다.
걸음을 옮기며 레이는 조소했다.
"...힘드네."
날뛰어대는 코어 탓에 갈비뼈가 거의 다 조각났다.
너덜너덜하게 변한 양팔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흔들렸다.
한시적으로 무한한 힘을 얻었으나 레이의 육신은 결코 무한하지 못 했다.
자멸이 가까워졌지만, 그럼에도 레이는 주저앉지 못 했다.
아직 레이에겐 반드시 마무리 지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견뎌야 했다.
"...그래, 견뎌야지."
레이는 안소니우스에게 건네준 성검 대신 주인을 잃고 굴러다니는 피 묻은 검을 손에 쥐었다.
사라진 심장의 박동을 떠올려보며 구덩이를 걸어나온 레이는, 구덩이 밖에서 호흡을 고르고 있던 다카우스와 마주쳤다.
로얄가드, 다카우스.
레이와 안면이 있는 자였다.
알리모에서 마주쳤으며, 이지스에서 머물 때도 간간이 얼굴 볼 일이 있었다.
워프게이트에 마중을 나와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
면식이 있는 상대와의 마주침은 어쩔 수 없이 음울한 감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제는 결코 되찾을 수 없는, 막연하게 꿈꾸었던 낙관적인 미래를 자꾸만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건 다카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되찾지 못 할 영광스러운 나날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서로를 마주 본 레이와 다카우스는 굳이 그 음울한 감회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레이는 침묵했고, 다카우스는 그저 불쾌한 적의만을 레이를 향해 드러냈다.
"..."
제국은 상황을 오판했다.
레이에게 남아있던 역량은 물론이고 레이와 함께했던 소녀의 역량 또한 오판했다.
제국은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정령의 도움 없이도 고위 마법사 이상의 전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 판단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가 지닌 힘은 제국이 상정했던 범위를 한참 상회했다.
루나라는 이름을 지닌 소녀는 이미 대마법사에 근접한 전력이었다.
마경 원정에서 오랜 시간 축적한 강력한 수들을 대부분 소모했을 텐데도 그토록 강대했다.
본래 다카우스는 루나를 상대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안소니우스가 레이를 막아 세웠을 때, 일단 레이부터 빠르게 무력화시키고자 무리해서 이곳에 합류했다.
분명 대적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레이는 성검의 도움 없이도 안소니우스와 그를 돕는 제국군을 무너뜨렸다.
"..."
레이를 무력화시키는 건 실패했으나 제국군의 희생이 무의미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안소니우스를 중심으로 한 제국군의 합공은 무너져 내리는 레이의 육신을 더욱 확실하게 깎아냈다.
한 번 파괴된 레이의 육신은 치유되지 않았고, 이제 레이의 모습은 가슴에 뚫린 구멍을 제외하고도 살아있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다카우스는 그 끔찍하고 초라한 레이의 몰골을 바라보다가... 저 너머에서 번져 나오는 마나의 울림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셨다."
쿠우웅!
저 너머에 있는 황성으로부터.
이제까지 제국군이 행했던 공세마저 초라하게 만드는 거대한 마나의 태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제국을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 중 하나이자, 대마법사나 군단의 화력조차 압도하는 황성의 포격이 행해지려 하고 있었다.
황도 내부에 황성의 화력을 투사하면 황도는 최소 반파에 가까운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허나 그건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황도는 이미 엉망이었다. 레이로 인해 초토화된 구역에 포격을 퍼붓는다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여기가 네 종착지다."
제국의 군단은 레이를 충분히 소모시켰다.
레이가 아무리 무한한 힘을 지녔다고 해도 육신이 한계였다.
황성의 포격이 집중되기 시작한다면 얼마 버티지 못 하고 증발할 터다.
황성에서부터 몰아치던 태풍이 집약되는 걸 느끼며 다카우스는 레이와 함께 증발하는 것을 각오했다.
다카우스는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레이는, 붉게 물든 눈물을 흘렸다.
"나는... 마지막까지... 네게 상처만 주는구나."
화아아아아악!!!!!!
황성의 포격이 시작됐다.
황성에서부터 쏘아진 빛줄기가 하늘을 불사지르며 나아갔다.
태양조차 어둡게 물들일 만큼 강렬한 섬광이 계속해서 빗발쳤다.
헌데...
다카우스와 레이는 여전히 무사했다.
단 한 발의 포격조차 레이와 다카우스를 향해 떨어져 내리지 않았다.
다카우스는 순간적으로 당혹을 숨기지 못 했다.
"...?"
포격의 표적은 레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황성은 지금 대체 무엇을 공격하고 있는 거지?
혼란에 빠진 다카우스의 귓가에, 찰나의 순간 생생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
파열음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다카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하늘이 있었다.
황성의 포격은 하늘을 향해 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푸르렀던 하늘이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다카우스는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을 보았다.
레이는 고개를 숙인 채 붉게 물든 눈물을 조용히 닦아냈다.
한 소녀가, 있었다.
잔혹한 운명을 타고났던 소녀는 한 소년과 만났다.
소년의 헌신이 어둠 속을 맴돌던 소녀를 구원했다.
삭막하기 그지없던 소녀의 세상에 소년은 따스한 색채를 덧칠해주었다.
소녀는 소년을 사랑했다.
소년의 그 험난한 투쟁이 끝난다면 따스하고 행복한 삶을 함께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소녀는 하염없이 소년을 기다렸고, 소년은 마지막까지 소녀를 돌아봐 주지 않았다.
그 거짓말쟁이 소년을 사랑했던 소녀는, 저 하늘 위에서 잿빛 세상을 바라보며 홀로 울고 있었다.
제국을 유린할 운명을 타고난 그 존재는.
본래의 운명을 벗어나 전혀 다른 모습과 전혀 다른 힘을 지닌 채.
그럼에도 처절한 증오를 가슴에 품고서.
다시금 제국의 악몽이 되었다.
결국, 원점이었다.
제국의 소드마스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