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레이가 성검을 손에 쥐었다.
지난했던 악신과의 투쟁을 증명하는 그 오래된 희생의 산물을 움켜쥐었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히 빛나는 성스러운 검은, 레이에게 기적을 선사해주지는 않았다.
성검의 주요 기능은 신성력의 증폭과 신성력을 기반으로 삼는 기술의 보조였다.
사용자의 육신을 치유해주는 기능 또한 존재하기는 했으나 레이에게는 영향을 끼치지 못 했다.
지금 레이의 육신과 영혼을 무너뜨리고 있는 건 엘-람의 저주이자 기적이었다.
신성력이 개입해봤자 크게 달라질 게 없었다.
그러나 레이에게 성검은 여전히 가치 있었다.
성검은 엘-람이 지상에 내린 가장 위대한 기적이었고, 그 모든 축복보다 선행되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성검은, 신성력을 기반으로 삼는 대부분의 기술들에 대해 완전 내성에 가까운 영향력을 발휘했다.
성검의 이러한 특징이 오랜 역사 속에서 가치있게 사용되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레이가 성검을 손에 쥐었고, 성검은 이제 기적을 유린하는 불경한 재앙이 되었다.
레이는 그레고리우스에게 다가서며 성검을 휘둘렀다.
그레고리우스를 두르고 있던 무한한 힘을 품은 신성 결계가 무른 살갗처럼 찢겨나갔다.
대처할 수 없는 일방적인 압도에 그레고리우스가 뒷걸음질쳤다.
빛의 거인이 무너져 내렸고 레이는 다시 한 번 성검을 휘둘렀다.
"나를 먼저 찢어 죽이지 않는 이상..."
레이가 맨몸을 드러낸 그레고리우스의 가슴에 성검을 찔러넣은 뒤 옆으로 잡아당겼다.
"너희의 기도는 닿지 않아."
그 잡놈이 보낸 대리자가 바로 이곳에 서 있었다.
촤악!!!
그레고리우스의 몸을 양단해버린 레이가 무너져내리는 신성결계를 뒤로 하고 걸음을 움직였다.
성직자들을 비롯해 기사와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제국군의 정예가 레이를 바라보았다.
레이가 양손에 쥐고 있는 오래된 상징성이 태양 아래서 빛났다.
허나 레이가 아무리 대단한 상징성을 거머쥐고 있다 해도 그 가치는 이미 퇴색되었다.
이제는 대화나 타협 따위로 이 갈등을 마무리 지을 수 없었다.
레이는 자신에게 남은 모든 것을 희생했고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레이에게도 제국에게도 오직 투쟁과 승리만이 이 혈전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제국군은 레이를 향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공포와 적의를 드러냈다.
아무리 신성한 상징성을 손에 쥐었다고 해도 레이의 몰골은 조금도 신성하지 않았다.
이미 죽었어야 할 자가 여전히 육신을 움직이며 검을 겨눠오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레이는 그저 제국을 농락하고 유린하는 악마의 종자에 지나지 않았다.
쏟아지는 적의를 마주하며, 레이는 기꺼이 그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어 파멸을 행했다.
콰가가가가강!!!!!!!!
레이가 두 자루의 검을 휘두를 때마다 또다시 인근이 초토화되었다.
제국으로선 단단히 준비했던 강력한 수가 한순간에 박살 난 탓에 대처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레이는 그 약간의 틈을 파고들며 검의 궤적에 닿는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파괴하며 전진했다.
군단이 모였다고 해도 정면에서는 도저히 레이의 화력을 상쇄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산개해서 거리를 벌리면 레이는 무차별적으로 황도를 파괴했다.
그 끔찍한 광경 속에서.
레이는 조금씩 더 정교하게 힘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또한 조금씩 더 빠르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정말로 황성에 레이의 검격이 닿을 수도 있었다.
레이를 막아서야 하는 군단의 지휘관들이 당혹에 잠긴 순간.
거대한 섬광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쩌엉!!!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오직 나아가기만 했던 레이가 처음으로 뒤로 밀려났다.
레이를 밀어낸 안소니우스가 레이를 노려본 채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
안소니우스는 황도 인근에서 레이에 관한 정보를 전해 들었다.
전후 사정을 안소니우스가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용오름이 피어오른 후였다.
레이가 역모를 꾸몄다는 황당한 소리에 안소니우스는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안소니우스는 레이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고 회복은 불가능하다는 걸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자기 삶을 깎아내며 희생을 자처한 레이가 역모를 준비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기에 제국이 누명을 씌운 것이라는 의심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
하지만 제국이 누명을 씌웠다기엔 사안과 상황이 너무 극단적이었다.
레이가 역모를 꾸몄음을 제국이 증명하지 못 한다면 제국은 장기적으로 고립과 몰락을 피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황족'은 가진 특성이 워낙 명확하여 없는 황족을 조작할 방법이 없었다.
"..."
만약 이 상황이 제국이 씌운 누명 때문이 아니라면, 레이는 어째서 황족을 수호한 것인가.
레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기에 구원을 바란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자신의 맹세를 지켰다.
어쩌면 레이가 황족을 숨기고 있었던 것은, 그저 가족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진실이 무엇이든, 이제 황도에서는 거대한 힘의 파동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땅울림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너머에서 낙뢰까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제국이 계산을 잘못했군."
레이의 갈망을 오판했고 레이의 역량을 오판했으며, 레이와 함께했던 그 소녀의 역량 또한 오판했다.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안소니우스는 멀리까지 번져 나오는 힘의 파동을 느끼다가 결국 직접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성검이 크게 덜컥이는 소리가 안소니우스의 귓가를 울렸다.
덜컥!!
"...!!!!!"
안소니우스가 반사적으로 방패를 바닥에 꽂았다.
방패로부터 신성 결계가 전개되며 방 내부의 모든 존재를 한정된 공간에 가두었다.
허나 신성 결계를 활용해 벽을 세운 것은 안소니우스의 실책이었다.
단숨에 신성 결계를 뭉개버린 성검이 안소니우스가 미처 제지할 틈도 없이 하늘로 솟구쳤다.
하늘을 가른 성검이 누구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지는 분명했다.
함께 있던 템플러들이 잠깐 얼을 탄 사이, 안소니우스가 벽을 부수며 뛰쳐나갔다.
콰앙!!
미리 증폭시켜 놓았던 신성력이 안소니우스의 체내를 충만하게 채웠다.
마경에서의 혈전을 통해 가진 재능을 더욱 확실하게 개화시킨 안소니우스는 성검이 없다 해도 이미 정상 가까이에 다가서 있었다.
지면을 찍어 밟으며 삽시간에 도시를 주파한 안소니우스가 몸을 띄우더니 레이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쩌엉!!
레이가 뒤로 밀려났고, 안소니우스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
"레이, 너는 나와 거래를 했다. 헌데 지금 대체 뭐 하자는 거냐."
안소니우스는 자신의 누이를 지키고 편안히 하기 위해 균형, 평화, 그리고 안정을 원했다.
레이가 제시한 중재자의 역할을 받아들였고, 까마득한 위험을 감수해가며 권위와 상징성을 취했다.
헌데 그 모든 과정과 노력을 레이가 무의미한 것으로 되돌리려 하고 있었다.
악마의 하수인보다 끔찍한 몰골로 제국과 교단의 상징성을 양손에 쥐고 있는 레이는, 거대한 혼란과 균열의 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레이가 이곳에서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이번 사건의 여파는 대륙을 뒤흔들 것이다.
레이를 악마의 하수인이라 칭해야 할지 숭고한 순교자로 칭해야 할지 온갖 세력이 저들의 이익에 따라 눈치를 보며 말장난을 치려고 들 것이다.
안소니우스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었다.
"황족을 은폐한 게 사실인가?"
"..."
레이는 묵묵부답이었다.
안소니우스는 레이에게 강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동안 사람을 믿지 않았기에 멀게만 느껴졌던 감정이 안소니우스를 뒤흔들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쩌엉!!!!!!
안소니우스는 고함과 함께 레이와 충돌했다.
개선식에서 활용하기 위해 지급받은 성물들이 섬광을 토해내며 안소니우스의 육신을 가속시켰다.
레이는 벼락처럼 치고 들어오는 안소니우스의 일격을 모로스로 막아냈다가 뒤로 주르륵 밀려나야 했다.
안소니우스는 레이가 손에 쥔 성검의 기능을 자신에게 끌어 와 신성력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안소니우스의 재능이 탁월한 덕분이기도 했고, 레이가 안소니우스에게 인도한 권한을 박탈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안소니우스는 잠시잠깐 레이와 대등하게 맞부딪쳤다.
하지만, 레이가 성검을 휘두른 순간 안소니우스를 수호하던 방패가 유리처럼 깨져나갔다.
파가가가각!!!
안소니우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건 예정된 결과였다.
허나 상황을 예측했다고 해도 극복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안소니우스는 레이가 성검을 활용해 공세를 취하자마자 삽시간에 밀려났다.
주변 일대를 통째로 박살 내며 안소니우스를 밀어붙인 레이는 거대한 저택 안에 안소니우스를 박아넣었다.
콰앙!!!!!
안소니우스는 건물의 지하까지 파고들었다.
대피가 이미 끝난 건물이라 안에 사람은 없었다.
자욱하게 터져나간 흙먼지가 시야를 가린 사이 안소니우스는 검을 다시 쥐었다.
지금 안소니우스의 역량으로 레이를 홀로 맞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성검과 직접 맞닿는 것만 주의한다면 아예 무력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안소니우스가 그렇게 상황을 계산하고 있는데, 흙먼지 속에서 레이가 나타났다.
"안소니우스."
레이가 성검을 던졌다.
"우리의 계약을 바꾸자."
카앙!
레이가 던진 성검이 안소니우스의 발밑에 박혔다.
안소니우스가 레이의 의도를 파악 못 하고 잠깐 멍하니 성검을 바라봤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성검을 넘겨줄 테니 네 편을 들어달라는 건가?"
"아니. 너는 오늘 마지막까지 내게 대적해야 해."
안소니우스는 레이가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이는 당혹스러워하는 안소니우스를 앞에 두고 눈빛을 어둡게 가라앉혔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막연한 확률에 기댄 채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망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낙관적인 사고에 의지하다가 결국 여기까지 추락했다.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할 수는 없다.
'철저하게...'
철저하게 너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배제할 것이다.
단 하나의 활로만을 내어준 채 목을 조를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그리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네 복수를 돕겠다. 그게 이 계약의 대가야."
"..."
여전히 안소니우스는 레이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개의치 않고 안소니우스를 가까이서 마주 보고 섰다.
"우리에겐 처음부터 진실된 구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어. 네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처음부터 무의미했지."
"..."
"진실을 알려줄 테니, 네가 직접 그 끔찍한 치부를 들춰내고, 네 삶을 진정으로 유린한 존재들을 깨닫도록 해. 그리고..."
"..."
"네가 그들을 심판하는 거다."
레이는 안소니우스가 중재자로 남기를 바랐다.
그래서 거짓을 입에 담았고, 그건 분명 레이의 이기심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에게 진실을 고백할 수 있었다.
"안소니우스, 네가... 네가 그들의..."
레이가 안소니우스의 손아귀에 성검을 쥐여주며 흐느끼듯 웃었다.
"종말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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