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학살이었다.
그리 불러야 옳았다.
단 한 명의 인물이 제국의 황도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값비싼 아티펙트가 쓰레기처럼 나뒹굴었고 제국의 고급 전력들이 벌레처럼 짓이겨졌다.
제국은 전투가 벌어질 것을 대비해 민간인들을 미리 통제했었지만, 무차별적인 공격이 쏟아지며 민간인 사상자도 급격히 늘어났다.
이토록 큰 피해를 입고도 제국이 지닌 전력은 여전히 너무나 강대했으나, 그럼에도 단시간만에 입은 손실이 뼈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 학살을 일으킨 자는 황성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때 제국의 수호자라 불리었던 레이의 모습은 기괴했다.
심장을 바스러뜨리고 팽창한 코어가 찢어진 살가죽 너머로 비쳤고, 무너져 가는 육신에선 묽어진 핏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자멸해가는 레이의 모습은 그저 끔찍했다.
그 누구도 레이의 외관을 보고 고귀한 희생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사술이었고, 움직이는 사체였으며, 악마의 노름에 놀아난 타락자의 비참한 말로였다.
모두가 레이의 몰골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레이의 모습은 동정이 아닌 공포와 혐오와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전장에 선 이들에게 레이의 과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레이는 단지 황도를 습격한 재앙이자 악마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의 고위층은 레이가 이런 선택을 하리라고 예상하지 못 했다.
레이가 이런 강대하고도 위협적인 힘을 숨기고 있으리라고도 예상하지 못 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 했다고 해서 이 사태에 대처하지 못 할 것은 없었다.
가장 축복받은 땅 아래 흐르는 영맥을 동력으로 하는 황도의 방위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로드 급 한둘은 군단의 도움 없이도 막아낼 수 있는 게 황도의 방위 시스템이었다.
제국의 고민은 '레이를 막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적은 피해로 레이를 막을 수 있는가'였다.
그리고 그 해답은 이미 나왔다.
신성 교단의 추기경, 그레고리우스가 넘실거리는 마나의 기류를 느끼며 양손을 마주 잡았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시니."
그레고리우스는 신성 교단에서 대표적인 친 황실파 인물이었다.
1000년의 역사 속에서 교단의 추기경 중 소수는 관례적으로 황제가 내정해놓은 자들이 임명되었는데, 그레고리우스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황제와 황실의 지지를 받고 그들의 입장을 일부 대변해주는 인물임과 동시에 성직자로서도 유명한 실력자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끔찍한 몰골의 재앙을 보았다.
축복이 가득했어야 할 개선식이 피와 비명으로 뒤덮여버린 광경을 바라보며 그레고리우스가 작게 읊조렸다.
"...우리를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는 뜻이리라."
츠즈즉!!
영맥을 흐르는 막대한 마나가 방위 시스템에 의해 집약되어 좁은 구역에 휘몰아쳤다.
그곳에는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다수의 성직자가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너울지는 마나의 격류를 느끼며 기도와 함께 축복을 이어갔다.
일백이 넘는 성직자들의 축복이 집중되자 이내 휘몰아치던 영맥의 마나가 변질되며 신성력에 가까운 성질을 띠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아닌 성직자들이 정면에 나서서 영맥의 마나를 축복한 이유는 마법보다는 신성력이 공간검에 대응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파괴력 자체는 한참 떨어지지만, 엘-람의 축복이 서린 신성력은 상성 면에서 공간검을 상대로도 결코 압도되지 않았다.
물론, 거슬리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
그레고리우스가 접한 정보 중에는 레이가 특정 종류의 신성 결계에 일부 '내성'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정보도 있었다.
레이가 정말로 '내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 내성이 공간검의 특성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타고난 것인지는 현재로선 알 방법이 없었다.
허나 그런 부차적인 문제들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지금 레이의 모습을 보고 악마와 연결지었으면 연결지었지 엘-람의 존재를 떠올리지는 못 할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학살자를 제압하고 재설계된 황도의 방위 시스템을 검증하기만 하면 되었다.
성직자들의 기도가 계속 이어졌고, 레이는 그들을 향해 검을 빙글 돌렸다.
콰가가가가가강!!!!!!!!!!
도약된 마나의 물방울이 허공을 찢고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내린 물방울은 성직자들이 서 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을 초토화시켰다.
레이는 제대로 제어되지 않는 힘을 휘두르며 무분별한 파괴를 일으켰다.
계속된 폭격으로 인해 성직자들 또한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으나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레이는 검을 휘둘러서 확실하게 성직자들을 타격할 수 있는 거리에 접근했다.
그와 동시에 영맥으로부터 집약된 마나가 충분히 신성력이라 부를 수 있는 수준까지 변질됐다.
마침내 목표한 바를 달성한 그레고리우스가 양손을 뗐다.
"부디 우리를 가여이 여기고 옳은 길로 인도하시어..."
화아악!
신성력으로 빚어진 거대한 검이 허공에서 생성되었다.
그건 검의 형상을 모방한 강력한 신성 결계 덩어리에 가까웠다.
쐐애액!!!
거대한 빛의 검이 레이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일대의 하늘이 빛으로 뒤덮이며 거대한 방패가, 거대한 창이, 거대한 둔기가, 거대한 손아귀가, 그리고 날개가 뻗어나온 거대한 천사의 형상이 순차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뒤덮은 그 모든 형상들이 레이를 향해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레이는 검을 휘둘러 그것들을 전부 부수고자 했다.
!!!!!!!!!!!!!!!!!!!
지면을 뒤흔드는 굉음과 섬광이 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감각을 앗아갔다.
이건 그 어떤 과장도 섞이지 않은 무한한 힘의 충돌이었다.
폭주하는 코어로부터 흘러넘치는 마나와 황도 아래 흐르는 영맥의 마나가 무한하게 쏟아져 나왔다.
인간의 다루기엔 너무나 막대한 마나였기에 양측 다 섬세한 기술의 활용은 불가능했다.
간신히 형태만 갖춘 공격을 쏟아내며 오직 상대를 힘으로 찍어누르기 위해 서로가 발악했다.
그리고, 결국 힘에서 찍어눌러진 것은 레이였다.
으드드득!!!!!
레이의 코어는 무한한 힘을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레이는 혼자였고, 그 무한한 힘을 오직 자신의 육신으로 다루어야 했다.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육신을 조금이라도 더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의 출력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성직자들의 숫자는 수백이었다.
수백의 성직자들 중 다수가 이런 축성과 결계 구축 작업에 상당한 역량을 지닌 자들이었고, 방위 시스템의 보조까지 받고 있었다.
혼자인 레이는 이러한 격차를 뒤집을 수가 없었다.
그레고리우스는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광휘를 마주하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저 앞에 보이는 레이는 신성 결계에 계속해서 억눌리며 점점 더 움직임이 제약되고 있었다.
레이는 실제로 몇몇 종류의 신성 결계에 내성을 지닌듯싶었으나, 그레고리우스는 레이가 내성을 지니지 못 한 신성 결계를 쏟아붓는 것으로 간단히 문제를 해결했다.
트드득!
중첩된 신성결계로 인해 레이의 움직임이 거의 다 억눌렸다.
그레고리우스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직접 신성 결계를 뒤집어쓰며 레이에게 다가갔다.
수많은 신성 결계를 갑옷처럼 두른 그레고리우스는 곧 빛의 거인으로 화하여 한참 위에서 레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가 신성력으로 빚어진 거대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엘-람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를."
"..."
레이는 몸을 억누르는 압력을 느끼며 갈라진 웃음을 토해냈다.
레이는 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을수록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착란을 느꼈다.
이 세상에서 눈을 떴던 처음에는 모든 게 좆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뒤에도 좆 같았다.
레이는 새로운 세상에서 눈을 떴고, 강제된 운명 속에서 '나의 삶'을 희생하는 길을 받아들였다.
그건 사랑하는 이들을 구하기 위한 선택이었고, 레이는 '구원자'의 역할을 자처하며 세상의 멸망을 막아내고자 했다.
처절한 투쟁 끝에 레이는 멸망을 이겨냈다.
해피엔딩을 맞이한 것이라 굳게 믿었던 레이는 사랑하는 이들을 구할 수 있었음에 만족하고 안도했다.
하지만, 하지만 사실은... 마음 한 편으론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레이의 시작은 증오였다.
그리고 그 증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레이는 자신을 이 세상에 던져버린 잡놈을 증오했고, 그 잡놈이 가려놓은 치부를 혐오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외면했으나, 레이의 마음 한편에는 영원히 해소되지 못 할 증오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증오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억눌러 놓았던 증오와 혐오를 이제는 드러낼 수 있었다.
"나는..."
레이는 주먹을 내려치려는 그레고리우스를 향해 웃음을 머금었다.
그 광기 어린 웃음은 언뜻 시원해 보였다.
"네놈들이 따르는 그 끔찍한 잡놈을 혐오해."
그러니까.
"그 잡놈이 가꾸어낸 세상을... 파괴할 거야."
그 무엇도 아닌...
"그 빌어먹을 개새끼가 내게 내어준 힘으로."
눈에 밟히던 이 좆 같은 세상을 파괴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레이가 외면했던 자신만의 바람이자 갈망이었다.
"너희는, 실수한 거야."
트드드득!
심장을 잡아먹은 코어의 폭주는 멈추지 않는다.
이건 단순한 폭주가 아니라, 엘-람과 맺은 계약이자, 저주이며, 결속의 증거였고, 또한 권능이었다.
흐드러진 엘-람의 권능이 저 멀리까지 번져나가서 무언가를 자극했다.
웃음을 머금고 있던 레이는 이미 뒤틀린 입꼬리를 더더욱 뒤틀었다.
그런 레이를 향해 그레고리우스의 주먹이 떨어져 내렸다.
꽈아아아앙!!!!!!
거대한 충격이 레이의 몸을 짓눌렀다.
이미 반쯤 붕괴되었던 신체가 그레고리우스의 공격을 견디지 못 하고 무너지려 했다.
그럼에도 레이는 웃음을 머금고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연결이 끊어졌던 성검이 레이로부터 번져 나온 엘-람의 권능에 반응했다.
성검이 레이의 존재를 다시 감지했고, 레이는 머리 위로 뻗은 손을 움켜쥐었다.
"내게, 와라."
성검은, 완벽히 짜여진 시스템 속에서 구동되는 병기였다.
설령 성검을 창조하게 한 초월자가 개입하려 해도 성검은 독립된 시스템 속에서 움직였다.
그리고 현재 성검에 대한 최상위 권한은, 레이가 지니고 있었다.
화아악!!!
그레고리우스가 두 번째 주먹을 뻗었고, 하나의 빛줄기가 하늘을 갈랐다.
그레고리우스의 주먹이 레이를 찍어누르려던 찰나.
하늘을 갈라낸 빛줄기가 레이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파가가가가가가가각!!!!!!!!!!!!!!
레이를 짓누르고 있던 수많은 신성 결계들이 한순간에 바스러졌다.
레이를 찍어누르려던 그레고리우스의 거대한 주먹 또한 빛의 파편이 되어 산산이 깨져나갔다.
그레고리우스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앞에 두고 레이에게 떨어져 내린 한 자루의 검을 바라보았다.
레이가, 레아를 베겠다고 주워왔던 철검을 버리고 새로운 검을 손에 쥐었다.
"말했잖아."
레이는 흐느낌인지 조소인지 모를 기괴한 떨림을 흥얼거리며 그레고리우스에게 다가갔다.
"너희는, 실수했다고."
원점회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