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는다.
색채가 바랜 풍경은 그저 어둡기만 했다.
이런 선택을 원치 않았고 이런 결말을 바라지 않았다.
그럼에도 단 한 사람의 소망을 지켜주기 위해, 레이는 후회를 외면하고 삶을 놓았다.
그 대가로 얻어낸 무한한 힘이 육신을 잠식한다.
코어가 팽창해 심장을 부수고, 물처럼 흘러내릴 지경까지 농축된 마나가 붉은 피를 밖으로 밀어낸다.
혈관을 뒤틀면서 가속한 마나는 이내 살가죽을 터뜨린 뒤 방울져서 떨어져 내렸다.
레이는 자신의 몸을 흐르기 시작한 경험해본 적 없던 고농도의 마나를 제대로 제어할 수가 없었다.
600년 전 하르시아는 이조차도 정밀하게 제어해내어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나, 레이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몸을 흐르는 마나를 굳이 정밀하게 제어할 필요는 없었다.
공간검의 기반이 되는 코어로부터 생성된 마나는 옅게 흩뿌리는 것만으로도 초월적인 존재의 권능마저 일부 상쇄할 수 있었다.
그리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마나가 물처럼 흐를 만큼 농축되었다.
절삭력을 부여하기 위해 검기나 검강을 피워 내는 공정을 거치지 않아도, 레이의 몸을 흐르는 마나는 이미 압도적인 폭력이었다.
"..."
레이가 모로스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모로스를 감싼 불균일한 광휘가 검신을 타고 흘러내리려 했다.
그 기괴한 광경을 앞에 두고 샤흐니는 공격이 아닌 방어를 위해 반사적으로 검을 세웠다.
촤악!
레이가 모로스를 휘둘렀다.
불균일하게 뭉쳐진 마나의 물방울이 레이가 그려낸 궤적을 따라 흩뿌려졌다.
그 물방울 중 하나가 샤흐니를 향했다.
샤흐니는 손가락 한 마디만한 크기의 물방울 하나를 베어내기 위해 검강이 솟아오른 검을 휘둘렀다.
막대한 절삭력과 견고함을 자랑하는 검강이 물방울과 맞닿았다.
그 직후, 물방울과 맞닿은 검강이 일방적으로 짓뭉개졌다.
"...!!!"
힘의 밀도가 너무나도 달랐다.
샤흐니의 검강은 절삭력을 자랑할 틈도 없이 삽시간에 짓뭉개졌고, 그 반동으로 인해 검이 중간부터 깨져나갔다.
물방울은 여전히 샤흐니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츠즉!
방어 아티펙트가 활성화되며 샤흐니를 보호하기 위한 장막이 생성됐다.
하지만 공간검을 사용하기 위해 정제된 마나의 물방울은 공간을 통째로 일그러뜨리며 장막을 부숴버렸다.
이 모든 게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시간 동안 이루어졌고, 물방울은 샤흐니의 갑주를 때렸다.
금속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샤흐니의 귓가를 울렸다.
쩌엉!!!!!!!
뒤로 튕겨져나간 샤흐니가 족히 수백 미터는 떨어져 있던 건물에 처박혔다.
레이가 흩뿌렸던 그 수많은 물방울 중 하나를 상쇄하기 위해 샤흐니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샤흐니가 막아내지 못 한 물방울은 잠시 하늘을 날았다가 앞을 막아서는 모든 것을 짓뭉갰다.
콰가가가가가강!!!!!!!!!!!!!!
굉음이 계속해서 지면을 뒤흔들었다.
레이의 앞을 막아섰던 병력이 일시에 박살났고 황도 일부 구역이 통째로 붕괴했다.
레이가 휘두른 검의 궤적에 휩쓸린 것들은 그 정체가 기사든 마법사든 민간인이든 건물이든 구분 없이 바스러졌다.
멀리까지 날아간 물방울들이 멋대로 쪼개져서 넓은 범위에 떨어져 내린 탓에 피해를 더욱 확산시켰다.
레이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을 들으며 검을 다시 쥐었다.
지금 행한 일격은 대단한 준비가 필요한 절기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검을 휘둘렀을 뿐이다.
이미 삶을 포기한 레이에게 무너지는 육신으로 검을 휘두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촤악!
레이는 손이 가는 대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방울진 마나가 검의 궤적을 따라 흩날리며 삽시간에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제어되지 않는 힘은 무차별적인 파괴 행위로 이어졌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계속해서 커졌다.
거리를 벌리고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다급히 마법을 발현해 레이를 겨누었다.
황도의 방위 시스템이 보조해준 덕분에 삽시간에 완성된 고위 마법들이 레이의 머리 위에 떨어져 내렸다.
콰아앙!!!!!
폭음이 울리며 강렬한 열기가 레이의 뺨을 달구었다.
하지만, 아무리 화력을 집중시켜도 레이를 집어삼킬 수가 없었다.
레이의 코어에서부터 물처럼 흘러내리는 마나는 그저 휘둘러지는 것만으로도 쏟아지는 고위 마법을 상쇄하고 집어삼켰다.
그리고, 레이가 마법을 상쇄하다가 검을 빙글 돌렸다.
콰가가가가강!!!!!!!
허공을 찢고 모습을 드러낸 마나의 폭우가 그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하지만 마나가 제대로 제어되지 않은 탓에 레이가 노렸던 마법사들의 머리 위가 아니라 다른 곳을 휩쓸었다.
레이는 개의치 않고 몇 번 더 검을 휘둘렀고, 이내 마법사들은 사상자를 내고 도주했다.
더는 마법이 쏟아지지 않자 레이는 삶을 버린 뒤 처음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 끔찍한 모습을 바라보며, 아직 숨이 붙은 누군가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네놈은... 악마인가?"
"..."
악마.
그 단어를 곱씹으며 레이는 공허하게 웃었다.
찢어져 나간 살갗이 너덜거리고 터져나간 가슴에서는 묽어진 피가 흘러내렸다.
이미 죽었어야 할 사체의 모습으로 걸음을 옮기는 레이는 괴물이었고 역병이었다.
스스로 파멸해가며 가까이 있는 것들을 함께 파멸시키는, 그런 역병이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별의 순간 담아가고 싶었던 소중하고 따뜻했던 기억들을 밀어낸다.
아무 지식도 없이 이 세상에 끌려 와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했던 그 순간만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그날 증오만을 품은 채 멋모르고 지껄였던, 그 최초의 바람만을 비어버린 가슴에 담았다.
"내가..."
레이는, 핏물을 뒤집어쓴 채 자신의 앞을 다시 막아선 샤흐니를 보았다.
샤흐니를 바라보는 레이의 눈동자엔 더는 고통과 후회의 감정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공허하고 작위적인 증오만이 눈동자에 남아 레이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레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그리고선 마치 읽어보라는 듯 검에 새겨진 문구를 샤흐니에게 향하게 하며, 짧게 읊조렸다.
"제국을."
제국에게.
"지울 거야."
영광을.
샤흐니는 말없이 검을 들었다.
레이와 샤흐니가 충돌했고, 수많은 제국의 군세가 레이를 향해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
갑작스럽게 굉음이 울렸다.
굉음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황도를 울렸다.
흡사 물방울처럼 뭉쳐있는 강대한 힘의 파편이 떨어져 내릴 때마다 높이 솟은 건물이 무너졌고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무차별적인 파괴는 민간인의 거주지역까지 큰 피해를 끼쳤다.
역모를 저지른 레이의 발악을 멈춰 세우기 위해 병력이 계속 움직이고 있으나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원이 필요한가?"
다카우스가 통신 아티펙트를 향해 물었다.
단시간만에 황도의 피해가 예상치를 까마득하게 초과했다.
레이가 가슴에 구멍까지 뚫린 채 자멸하고 있다고는 하나 레이의 발악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황도의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우선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이쪽은 여유가 있다."
[아니, 괜찮다. 저지 수단은 충분하다. 너는 도주하는 반역도들을 제압하는 데 집중해.]
"알겠다."
다카우스가 통솔 중인 군단은 도주하는 제국의 반역도를 쫓고 있었다.
반역도들이 민간인 거주지를 끼고 바람 정령을 활용해 움직이고 있어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사실 작정하고 달려들었으면 진즉 끝낼 수 있었다.
도주하는 반역도를 완벽하게 가두기 위해 인근에 투입된 전력만 해도 로드 급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시간을 끈 건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쪽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지원을 가야 했다.
"나도 나서야겠군."
탑 위에 자리를 잡고 상황을 지켜보던 다카우스가 저 아래서 도망 다니고 있던 반역도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헌데, 직전까지 황도를 벗어날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반역도들이 제자리에 멈춰있었다.
다카우스는 반역도들이 무엇을 노리고 갑자기 멈춰 섰는지 예상이 가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
도망치던 이들을 돕던 최고위 바람정령, 에이라를 멈춰 세운 것은 루나였다.
루나는 잠시만 머뭇거려도 곧장 공격이 쏟아진다는 걸 알았음에도 제자리서 멈춰 섰다.
"레이...?"
루나는 레이가 무엇을 각오했는지 모르지 않았다. 모르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레이는 자신의 죽음을 각오했고 루나가 그 사실을 외면해주기를 바랐다.
루나는 레이의 마지막 바람을 결국 외면치 못 했기에 레이를 붙잡지 못 했다.
하지만, 레이가 각오한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츠즉
서클에 새겨진 맹약이 반응한다.
서로의 인연을 묶어, 언제나 상대의 존재를 느끼고 찾아갈 수 있게 해주는 맹약이었다.
설령 레이가 삶의 끝자락에 이르더라도 이 맹약만은 꺼지지 않고 루나와 레이를 이어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맹약은 루나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안식처이자 희망이었다.
헌데, 죽음이 찾아와도 끊어지지 말았어야 할 맹약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루나는 그제야 레이가 무엇을 각오했는지 깨달았고, 그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맹약과 함께, 맹약이 새겨져 있던 그의 영혼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루나는 멍하니 서서 저 너머에서 파멸을 머금고 휘몰아치는 광휘를 바라보았다.
무방비해보이는 루나를 향해 제국의 기사 하나가 검을 휘둘렀으나, 닿지 못 했다.
검을 휘두르다 덜컥 굳은 기사는 허공에 떠오르더니 거대한 손아귀에 붙잡힌 것처럼 찌그러 들기 시작했다.
루나는 지면을 흐르는 핏물을 밟고 걸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됐어."
이제는 됐다.
이제는, 착한 마법사 흉내 따위는 부리지 않을 것이다.
레이와의 약속도 남아있는 인연들도 이제는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냥... 모든 게 미웠다.
이 세상이 싫었다.
"내 삶이 다할 때까지..."
은폐되어있던 4개의 서클이 모습을 드러냈다.
4개의 서클 아래로 그림자처럼 보이는 미약한 기류가 찰나 간 점멸했다가 모습을 감추었다.
다음 순간 루나의 서클과 공명해 집약된 마나의 덩어리들이 뇌전이 되어 지상에 내리꽂혔다.
"너희를 죽일 거야."
루나에게 적의를 품고 가까이 다가왔던 모든 것들이 일시에 증발했다.
*
안소니우스는 황도 인근의 도시에서 용오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단의 고위층에 속하는 인물이 긴밀히 전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기에 이곳에 왔지만, 정작 안소니우스를 불러낸 자는 이곳에 없었다.
그렇다고 안소니우스가 위험한 함정 따위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이건 단지, 현재 황도에서 벌어지는 일에 안소니우스가 곧장 개입하지 못하도록 시간을 약간 끌기 위한 유인이었다.
반역죄를 저지른 자가 원정을 함께한 '전우'인 만큼 안소니우스가 충동적으로 상황에 개입할 것을 염려한 조치였다.
용오름이 발생하고 나서야 상황을 전해 들은 안소니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안소니우스가 잠시 벽에 걸어둔 성검이 한 번 덜컥였다.
원점회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