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51화 (351/446)

351화

"으음... 일단 두 사람 일로 와 볼래?"

중요하게 전할 말이 있다고 했던 레이가 카렌과 알레시아를 불렀다.

카렌과 알레시아는 별 의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에게 다가갔다.

카렌과 알레시아가 다가오자 레이는 두 사람을 돌려세운 뒤 뒷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직후 카렌과 알레시아가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무방비한 사람의 뒷목쯤에 마나를 소량 흘려 넣으면 이렇게 안전하게 기절시킬 수 있었다.

레이가 두 사람이 넘어지지 않게 몸으로 지탱해주며 다른 이들에게 눈짓했다.

요하나와 디디에가 레이의 돌발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기절한 카렌과 알레시아를 받아주었다.

요하나가 카렌을 안은 채 물었다.

"레이?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일이 좀 꼬였어."

레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태평했다.

"아무래도 황도를 벗어나서 남부로 가야 할 것 같아. 가서 알렉산데르랑 손잡아야겠어."

황실과 척을 지겠다는 소리를 레이가 너무나도 가볍게 입에 담았기에, 레이를 바라보고 있던 이들은 상황의 심각성이 전혀 와닿지가 않았다.

요하나는 잠시 멍하니 레이를 바라보다가 데런에게 카렌의 부축을 맡기고 레이와 거리를 좁혔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미안한데, 자세히 설명해주기엔 시간이 많이 부족해. 일단 협조해주면 좋겠어."

레이는 그리 양해를 구하고 작전을 설명했다.

"육로를 통해서 남부로 바로 이동하는 건 힘들어."

황도를 둘러싼 포위망도 남쪽이 가장 두터웠고 남부로 향하는 길목도 죄다 막아두었을 게 뻔했다.

"그러니 남부가 아닌 북서쪽으로 가서 워프게이트를 확보할 거야. 그걸 활용해 남부로 갈 거고, 되도록 필립스 백작님도 함께 모실 계획이야."

레이는 표정을 굳히고 있는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뼉을 몇 번 치고는 한 가지를 더 강하게 당부했다.

"다들 루나의 지시를 잘 들어야 해. 절대 흥분해서 멋대로 나서지 말고, 루나의 지시만 잘 들으면 문제없이 황도를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황도를... 황도에서 도망치는 거야?"

"뭐, 그렇지."

"그거... 정말 괜찮은 거야?"

불안해하는 요하나에게 레이가 마냥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위 바람 정령도 있어서 어렵지 않아. 걱정하지 마."

그 말을 듣고 디디에가 한숨을 푹 쉬었다.

레아의 혈통을 알고 있는 디디에는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답답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디디에가 레이를 짧게 질책했다.

"아가씨와 카렌을 기절시킨 건 성급한 조치였다."

임산부라서 움직임이 제한적이나 의식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이동에 훨씬 유리했다.

반박할 게 없는 정론인지라 레이가 미안한 기색을 내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해요. 두 사람을 설득하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요."

"..."

"어쨌든 모두 함께 움직이게 될 거야. 다만... 나는 잠깐 따로 움직이면서 시선을 분산시킬 거야."

"뭐?!"

요하나가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레이를 붙잡았다.

"그냥 같이 가면 되잖아! 위험하게 왜 따로 움직여?"

"안 위험해."

"위험하지 않다니, 말도 안 되는...!"

"요하나."

레이는 버럭 소리를 지르던 요하나의 뺨을 양손으로 꾹꾹 눌러 비볐다.

요하나는 곧장 애 취급하지 말라며 짜증을 내려 했지만, 레이가 한발 앞서 요하나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요하나가 잠시 말문이 막힌 사이.

레이는 요하나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가볍게 웃었다.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

"음... 그리고 목걸이가 진짜 예쁘기는 하네."

요하나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고 흡족해한 레이가 직접 목걸이를 풀어 요하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망가질 수 있으니까 일단 챙겨둬. 나랑 잠깐 떨어진 사이에 잃어버리지 말고."

"..."

황도를 탈출한다.

그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레이가 계속해서 너무나 쉽고 가볍게 취급하자 다들 설득되기 시작했다.

불세출의 영웅인 레이가 이리 자신감을 가진다는 건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하나도 레이를 향한 걱정을 내려놓지는 못 했지만 시간이 없다는 레이를 방해하고는 싶지 않아 자세하게 캐묻지를 못 했다.

레이가 이야기를 마치며 손가락을 튕겼다.

"음... 그러면 일단.... 다들 무장 좀 점검하고 짐들 챙겨. 짐은 최대한 빠르고 가볍게 챙기고."

시간이 없다는 레이의 재촉에 결국 다들 답답해하면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레이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전조 없는 땅울림이 저택을 흔들고 지나갔다.

쿠웅-

"..."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땅울림의 진원으로 고개를 돌리자 동쪽 탑에서 치솟고 있는 용오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레이가 가만히 서서 용오름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도이아였다.

"프리슬란 후작님께서 지금이라도 선택을 되돌릴 수 있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흐음..."

숨을 크게 몰아쉰 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후작님께 죄송했다고 전해줄래?"

"알겠습니다."

아도이아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레이가 용오름을 바라보며 잠시 기다리자 기절한 레아를 안은 벨라와 지미가 루나와 함께 다가왔다.

레이는 방금 전 했던 설명을 벨라와 지미에게도 짧게 전했다.

"전 잠깐 주의를 끌어야 해서, 잠깐만 혼자 움직일 거예요."

"...주의를 끌어?"

지미가 반문했다.

지미는 레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었다.

검을 제대로 쥘 수 있기는커녕 똑바로 걷는 것도 힘들어할 만큼 몸이 망가져 있었다.

당장 픽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몸뚱이를 가지고 혼자 주의를 끌겠다고?

"레이, 너 지금..."

지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벨라가 울음을 터뜨렸다.

레이가 곧장 벨라를 안아주며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고, 우리 엄마는 또 왜 이러실까?"

"아들... 엄마가... 엄마가 미안해서... 아들이 엄마 때문에..."

"뭘 엄마 때문이야.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아들 걱정 좀 하지 마. 이렇게 듬직한 아들이 또 어디 있다고 자꾸 아들 걱정이야."

레이는 벨라를 토닥여주고는 벨라의 품에 안긴 레아를 바라보았다.

레아는 드래곤하트가 이식된 반동으로 인해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엄마 딸내미... 내 동생은 엄마가 잘 챙기고."

레이는 아무 근심이 없는 것처럼 낄낄 웃었다.

그렇게 벨라를 안심시키고 있자니, 저택에서 무장 점검을 마친 이들이 다급히 뛰어나왔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자 루나가 정령을 실체화시켰다.

그와 거의 동시에 머리 위에서 굉음이 터졌다.

쩌어어엉!!!!

떨어져내린 고화력의 포격을 루나가 펼쳐낸 투명한 장막이 막아냈다.

포격을 막아낸 투명한 장막은 건재했으나 레이 일행의 머리 위를 노리는 포격은 단발이 아니었다.

지금 머뭇거렸다가는 쏟아져 내리는 포격에 의해 아무것도 못 하고 잿더미가 되어버릴 터다.

얼른 움직여서 민간인이 거주하는 구역과 가까이 붙어 무차별적인 화력 투사를 제한해야 했다.

적어도 황도를 벗어날 때까지는 그렇게 움직여야 했다.

화아악!

최고위 바람 정령인 에이라가 레이를 제외한 다른 이들을 감쌌다.

레이는 고위 바람 정령인 칼가의 도움을 받아 잠깐 제국군의 시선을 끌다가, 거리가 너무 멀어져 루나와 칼가의 연결이 약해지기 전에 일행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적어도 레이가 설명해준 바에 의하면 그랬다.

상황이 다급했기에 인사를 제대로 나눌 시간도 없었다.

"그럼 다들 조금 이따 합류합시다."

레이는 여전히 덤덤하게 재회를 약속했다.

이윽고 에이라가 바람을 일으켜 포격이 떨어져 내리는 지점을 빠르게 벗어났다.

"레이...!"

에이라와 함께 멀어지던 요하나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몇 번이나 레이를 돌아봤다.

지미는 어째선지 단 한 번도 레이를 돌아보지 않았다. 참담함을 이겨내지 못 해 돌아볼 수가 없었다.

벨라는 에이라의 거센 기류에 적응하지 못 한 탓에 처음에는 품에 안은 레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쏟아야 했다.

그러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레이가 있던 방향을 돌아보자, 저 멀리서 레이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건물과 화염에 가려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다.

"..."

레이는 불길 너머를 바라보며 잠깐 망설였다가 등을 돌렸다.

그렇게 등을 돌려 걷기 시작한 레이는 얼마 못 가 신음을 길게 뱉었다.

가슴의 통증이 워낙 심해서 숨을 제대로 쉬기가 어려웠다.

허리를 어설프게 수그린 레이는 결국 칼가의 도움을 받아 다시 몸을 옮겼다.

칼가가 바람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인간의 삶은 정말 짧군.]

"그래서... 나 죽기 전에 욕이라도 한 번 하게?"

[굴욕적인 경험을 했지만, 덕분에 재미는 있었다.]

"여기가 놀이터냐? 하... 역시 니들은 좆 같은 새끼들이야."

피식 웃은 레이가 손을 저었다.

"이제 그만 가 봐. 가서 루나를 도와줘."

[...알겠다.]

칼가도 떠났다.

완전히 혼자가 된 레이는 참고 있던 구역질을 했다.

입에서는 알맹이가 거의 없는 붉은 토사물이 흘러나왔다.

비틀거린 레이는 다시 최선을 다해 걸었다.

저 앞에서 무장을 갖춘 이들이 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실 직속 기사단인 엘룬 기사단의 단장 샤흐니.

그를 필두로 한 제국의 고위 전력들이 다수 포진해서 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각 개인의 역량도 뛰어났으며 무장 상태와 병종의 조합까지 완벽했다.

레이가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었다고 해도 홀로 대적하기에는 힘든 전력이었다.

더군다나 제국에는 저들 수준의 고위 전력이 넘쳐났고, 원정 직후인지라 그들 중 다수가 오롯이 황도에 집결해 있었다.

샤흐니가 레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투항을 권한다."

황명은 반역자를 참하라는 것이었다.

이제 와서 투항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체가 비교적 온전히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얻을 게 없었다.

그럼에도 샤흐니는 투항을 우선 권했다.

비틀거리던 레이는 제자리에서 멈춰선 채 샤흐니를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네게 가담한 무리들이 도주하는 건 불가능하다."

루나가 최고위 바람 정령을 다룰 수 있다는 건 제국도 잘 알고 있었다.

최고위 바람 정령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수단이 얼마 없는 것은 맞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만약 황도를 탈출하기 위해 바람 정령을 타고 고도를 높인다면 막대한 화력으로 요격해버리면 됐다.

레이와 루나도 그 사실을 알기에 민간인 거주구에 가까이 붙어 이동하기를 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황도를 벗어나려는 순간 제국의 최정예 병력에게 포위될 수밖에 없었다.

남부로 바로 향하는 대신 포위망이 비교적 헐거운 방향을 노렸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제국의 군단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포위망을 조정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숫자와 전력을 지닌 제국이 반역도들을 단숨에 밀어붙여 참하지 않은 것은, 단지 조금은 반역도들에게 '피해'를 입는 게 호의적인 여론을 구축하는데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네게 가담한 반역도들이 몸부림칠수록 제국의 군단은 더욱 두터워져 너희의 목을 조를 것이다."

설령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가 반역도들 사이에 숨어있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다.

재설계된 황도의 방위 시스템 아래 제국의 정예 군단이 집결한 이상 로드 급 여럿이 함께 몰려와도 대처 가능한 수준이었다.

레이도 그걸 잘 알았다. 잘 알고 있음에도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걔들을 왜 신경 써...? 너희는 황제를 지켜야 하잖아."

"...?"

"거기 신경 쓸 겨를이 어딨어. 전부 몰려와서라도 나를... 나를 막아야지..."

"..."

샤흐니는 레이의 몰골을 다시 살폈다.

안색은 곧 죽을 사람처럼 질려 있었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몸을 떨고 있었다.

아티펙트는커녕 금속으로 된 갑주조차 챙겨입지 못 했고, 그런 레이가 지닌 날붙이라고는 레아를 베겠다며 주웠던 철검 하나였다.

샤흐니는 굳이 이 자리에서 레이의 목을 베고 싶지 않았다.

허나 레이가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베어야만 했다.

"..."

샤흐니를 비롯해 레이를 막아선 이들이 레이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레이는 그들의 적의를 느끼며 실실거리고 웃다가, 이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문득, 마경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꾸었던 행복한 꿈이 떠올랐다.

그 꿈 속에서 레이는 두 아이를 안은 채 등에 레아를 매달고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그게 현실 같았다. 눈을 감으면, 지금 이 악몽에서 깨어나 다시 사랑하는 이들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

쏟아지는 차가운 적의를 앞에 두고, 레이는 마지막으로 그런 망상을 해보았다.

츠즉!

레이가 지닌 서클 위의 술식이 활성화됐다.

이지스에서 만난 리실로테의 환영이 건넨 술식이었다.

리실로테는 하르시아를 죽게 둔 제국을 향한 감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화풀이에 가까운 장치를 남겨둔 것일 터다.

츠즈즉!

이 술식은 일회용이다.

그리고 단 한 번, 이 술식을 활용해 다른 이에게 넘어간 모로스를 불러올 수 있었다. 그 기능이 전부였다.

공간의 틈새가 벌어지며, 제국의 신검이 레이 앞에 툭 떨어져 박혔다.

칵!

"..."

회수되었다던 제국의 신검이 레이 앞에 나타나자 샤흐니는 약간 당황했다.

약간 당황했을 뿐, 그 이상의 감흥은 느끼지 못 했다.

레이가 지금 모로스 좀 손에 쥔다고 무언가 바뀔 게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샤흐니는 지금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어 모로스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검을 배우다 보면 자연스레 상대의 호흡과 심장 박동에 집중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샤흐니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그렇기에 이상을 감지했다.

샤흐니가 아무리 집중해보아도...

레이에게서 심장의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전에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 이후로, 레이는 그저 고요했다.

그때 레이가 피를 왈칵 토해냈다.

레이는 모로스를 제대로 잡지도 못 하고 흐려진 눈동자로 비틀댔다.

앞으로 고꾸라질뻔한 몸을 간신히 멈춰 세운 레이가 의지를 다잡듯 중얼거렸다.

"엄마... 걱정하지 마."

레이에게서 재차 피가 쏟아졌다.

헌데 입에서 토해낸 피가 아니었다.

명치에 가까운 살갗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피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피는 계속해서 쏟아져 내렸다.

"...?"

그 괴기스러운 광경을 마주한 제국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 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그들은 알지 못 했다.

대륙은 600년 전 신화를 망각했으니까, 알 수가 없었다.

으드득!

본래 레이의 심장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코어가 계속해서 팽창했다.

이미 심장을 짓이겨서 바스러뜨린 코어가 서클까지 집어삼켰다.

코어는 탐욕스럽게 서클을 삼켰지만, 이질적인 힘을 지닌 서클과 융화되지 못 하고 결국 서로를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까드드득!!

600년 전.

하르시아는 홀로 마경을 부술 힘을 얻기 위해 엘-람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엘-람은, '제약이 부여된 자신의 사도'에게 과거에 하르시아와 맺었던 계약을 심으려 했다.

자신의 사도가 최후까지 사도로써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그리고 사도의 역할을 다한 '불순물'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될 수 있도록.

하르시아와 맺었던 파멸의 계약을 사도에게 강제로 심으려 했다.

그건 계약이란 이름의 저주였다.

계약에 동의하는 순간부터 육신과 영혼의 완전한 소멸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 존재의 종말을 대가로 바쳐 한시적으로 얻어낼 수 있는 건...

무한한 힘.

주르륵!

심장을 부수고 가슴에 자리한 레이의 코어로부터 액화된 마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과거 드래곤이 지녔던 용혈보다도 더욱 농축된 마나의 물결이 핏물을 밀어내고 레이의 혈관을 파고들었다.

용혈을 한참 상회하는 농도의 마나를 인간의 육신은 견뎌내지 못 한다.

이제 레이에게 남은 시간은 찰나였다.

레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떴다.

시야에 담기는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레이는 사라진 심장 대신 가슴을 메우는 후회로부터 눈을 돌리며, 모로스를 손에 쥐었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

되돌릴 수 없는 파멸을 머금고 피어난 광휘가 모로스를 감싼다.

"나의 모든 걸 바쳐서라도..."

망각된 신화를 이루어낸 그 처절한 희생이...

"당신의 소망을 이루어줄게."

600년의 시간을 건너 제국을 향했다.

최초의 맹세 (1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