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50화 (350/446)

350화

"..."

레이가 루나의 은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레이는 레아를 마주할 때보다 지금 루나를 마주보기가 훨씬 더 힘들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격정이 어린 루나의 시선을 피하지 못 한 채, 손에 쥐고 있던 드래곤하트를 다시 내밀었다.

"이게... 황실의 드래곤하트가 맞는지 확인해줘."

"..."

루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레이가 내민 드래곤하트를 당장 뺏어서 산산이 박살을 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기 어려웠다.

그것 말고도 온갖 결렬한 충동이 금방이라도 이성을 뒤틀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루나는 제자리서 손아귀를 몇 번이다 다시 말아쥐었다.

토해내지 못 한 감정을 억지로 억지로 삼킨 끝에...

루나는 레이의 손아귀에서 드래곤하트를 뺏어 들었다.

"..."

루나는 과거 황실의 드래곤하트가 깨져나가고 남은 파편을 레아에게 이식한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손에 쥔 것이 황실의 드래곤하트가 맞는지 감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레이가 건네준 물건은 확실히 황실의 드래곤하트가 맞았다.

제국을 건국한 시조룡의 드래곤하트 조각이었다.

헌데, 드래곤하트를 손에 쥐고 있자니 분명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잠시 정신을 집중하니 드래곤하트에 새겨져 있는 술식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드래곤하트 내부에 흐르는 용혈을 동력으로 삼아 새겨진 술식이었다.

루나는 얼마 안 가 술식의 용도가 무엇인지 파악해냈다.

"..."

드래곤하트에는 아공간과 관련된 술식이 새겨져 있었다. 정확히는 '아공간 수납' 술식이었다.

드래곤하트에 새겨져 있는 아공간 수납 술식은 일정 시간이 지나거나 일정 범위를 벗어나면 자동으로 발현되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걸 들고 황도를 벗어나거나, 혹은 1시간만 더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자동으로 술식이 발현될 것이다.

술식이 발현되면 드래곤하트는 아공간으로 모습을 감출 것이고, 술식을 새겨넣은 마법사가 준비해둔 좌표값과 열쇠가 없다면 아무리 루나라 해도 다시 꺼낼 수 없었다.

아공간에 진입하려는 드래곤하트를 억지로 막아세우면 최악의 경우 드래곤하트 내부의 용혈이 폭발할 터다.

"..."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기는 했다.

지금 당장 레아에게 이 드래곤하트를 이식하면 됐다.

황족의 심장에 드래곤하트를 이식하는 건 제국의 시조룡과 맺은 계약의 이행이자 권능을 기반으로 한 의식이었다.

일단 의식이 이루어지면 인간이 드래곤하트에 새겨넣은 술식 따위는 바로 소멸했다.

"..."

루나는 그 사실을 온갖 격렬한 충동을 참아내며 레이에게 설명해 주었다.

레이는 루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굳이 제국이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내어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두의 앞에서... 내가 저지른 죄를 실토하고 증명하기를 바랐나... 나를 죽이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레이가 레아에게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이식할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그리고 레아에게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이식한다면, 황성의 동쪽 탑에서 용오름이 치솟을 것이다.

모두가 하늘 높이 피어오른 용오름을 보며 레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깨달을 것이다.

"..."

그 결정적이고 상징적인 증거를 앞에 두고, 어느 누가 함부로 '황제가 영웅을 시기해서 누명을 씌웠다' 따위의 헛소리를 입에 담겠는가.

결국 제국이 레이에게 드래곤하트를 쥐여준 것은, 레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뒤따를 내부의 반발을 수월하게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까지 쉽지가 않네..."

그리 중얼거리는 레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레이는 드래곤하트를 건네준 에른스트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에른스트는 분명 레이가 그릇된 선택을 내리지 않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레이 또한 그걸 알았다.

그러나... 레이에게는 지켜야만 하는 존재가 있었다. 에른스트는 그걸 몰랐다.

"..."

이 세상에 환생한 후.

처음은 증오뿐이었다.

증오의 늪에 잠겨있던 레이를 벨라가 구해주었다.

벨라로 인해 처음으로 마음을 열게 된 레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사실 이 좆 같은 세상에도 나름 정을 붙였다.

하지만 레이가 이 세상에 정을 붙인 것은 단지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갈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이 허락되지 않은 세상은 레이에게 무가치했다.

그러니까... 레이는 언제든지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세상에 증오만을 머금었던, 그 시작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머리가 깨지거나 목을 맨 사체의 곁에서 옹알이를 하며 증오를 내뱉던 그 시작점에 닿고 나서야...

레이는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를 직시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 선택지를 고를 수 있었다.

"...루나, 내 심장에 쓰려던 발레리우스의 드래곤하트, 혹시 그걸로 본래 아티펙트의 기능을 재현해서 몸을 보호하는 데 사용할 수 있어?"

"...레이, 먼저 대답해요. 지금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예요?"

레이는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부로 가자."

"남부로 가자고요?"

"그래, 남부... 남부로 가면 될 것 같아."

"우리 모두 함께요?"

"...어, 함께 가자."

거짓말이었다.

남부로 가자는 것도, 함께 가자는 것도 전부 거짓말이었다.

루나는 레이에게 속지 않았고, 레이 또한 자기 거짓말을 루나가 간파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뻔뻔한 거짓말을 계속해서 입에 담았다.

"함께... 남부로 가자. 가서 다시 시작하자. 남 눈치 볼 일도 많겠지만, 함께... 노력해보자. 우리는 할 수 있을 거야."

레이의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 한 울먹임이 묻어나왔다.

목소리에 담겨 있는 떨림이, 레이가 지금 무엇을 각오했는가 말해주었다.

루나는 그 초라해 빠진 레이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마지막까지... 마지막까지 나를 이렇게 기만해야겠나요? 내게 미안하지도 않아요? 내가... 나는 당신에게 그렇게 하찮은 존재였나요...?"

"..."

레이는 루나의 호소에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루나는 레이에게 너무나도 많은 헌신을 베풀었으나, 결국 레이가 마지막까지 우선한 것은 루나가 아닌 벨라였다.

레이는 몰려오는 가슴의 통증을 참으며 그 이기적이고 비정한 고백을 루나에게 전했다.

"나는... 벨라를 지켜야 돼."

"레이!!!!!"

츠즈즉!

루나의 손아귀 위로 마법진이 전개되었다.

막대한 마나를 머금은 마법진은 2층에 있는 벨라와 레아를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루나는 마법진을 전개한 채 형형히 빛나는 은색 눈동자로 레이를 노려보았다.

나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구원하겠다며 삶을 깎아내고, 이제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안식을 얻지 못 하고 숨을 헐떡이는 레이를 노려보았다.

삶의 끝자락에 와서야 머금을 수 있었던 행복이 깃든 미소가 더는 레이의 입가에 보이지 않았다.

루나는 그 미소를 레이에게 되찾아주고 싶었으나, 그게 이제는 불가능한 꿈이 되어버렸음을 알고 있었다.

"..."

결국 루나는, 전개했던 마법진을 활성화시키지 못 하고 팔을 떨어뜨렸다.

"이럴 거면..."

루나는 레이와 함께 주저앉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럴 거면... 그날 왜 나를 구했나요...?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할 거면... 그냥 내버려 두지... 왜 나를 구했나요...?"

"..."

"이제는... 이제는 당신을... 미워하고 싶어요..."

"..."

오열하는 루나를, 레이는 자신이 그럴 자격이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천천히 안아주었다.

루나에게 저지른 잘못이 너무 많았다.

뒤늦게나마 그 잘못에 대해 속죄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우리의 이별은 슬프지만 아름다울 것이라 망상했었다.

"..."

이런 건... 레이가 바라던 이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마지막까지 루나를 우선해주지 못 했다.

레이는 루나와 함께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남부로 가자는 건 거짓이다.

함께 가자는 것도 거짓이다.

하지만 너희를 지킬 것이란 약속만은 진실이었다.

내가 이루었던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너희가 설 곳을 남겨줄 것이다.

*

레이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아까 레이가 불러냈던 지미, 벨라, 레아 세 사람을 제외하고든 다들 한 곳에 모여 레이를 바라보았다.

레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한 명씩 마주보았다.

그후 부풀어 있는 카렌과 알레시아의 배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음..."

레이가 뒷목을 긁적이며 잠깐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 전할 중요한 내용이 있는데..."

*

루나가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있는 방문을 열자 벨라에게 딱 달라붙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레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겁을 엄청나게 먹은 레아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벨라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보며 루나가 중얼거렸다.

"너를, 진즉 죽였어야 했는데..."

기회가 있었지만 잡지 못 했다.

레아를 죽이지도 못 했고 레이의 고집을 꺾지도 못 했다. 그 대가가 이렇게 돌아왔다.

"너는... 끔찍한 괴물이야. 너는 레이를 잡아먹고 우리를 구렁텅이에 빠뜨렸어."

지금 당장에라도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고 싶었다.

루나는 그러한 적의를 숨기지 않으며, 레이에게 받은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허공에 띄웠다.

*

용오름 의식.

제국의 건국과 함께 시작된 유서 깊은 행사였다.

평범한 이들은 용오름 의식의 실체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 했다.

하지만 제국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고위 귀족쯤 되면 용오름 의식에 관한 전후 사정 정도는 대략적으로 꿰고 있었다.

황족이 일곱 번째 탄생일을 맞으면 심장에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이식하는 절차를 밟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게 용오름이었다.

제국의 시조룡과 맺은 계약과 공명해 발생하는 용오름은 마법으로 피워내는 불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용오름을 모방해 마법으로 비슷한 현상을 꾸며낼 수는 있겠지만, 그 본질을 재현하는 건 불가능했다.

과거부터 용오름 의식이 치러지던 동쪽 탑의 기능은 현재 활성화되어 있었으나 앞으로 한동안은 용오름 의식이 진행될 일이 없었다.

헌데, 동쪽 탑에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쿠웅-

작은 진동이 땅을 울린다.

그와 함께 황도 곳곳에 위치한 드래곤하트가 빛을 발하며 동쪽 탑에 불길을 일으켰다.

동쪽 탑 내부에서 응집된 불길은 계속해서 크기를 키우더니, 이내 푸른 하늘을 향해 번져나갔다.

제국의 개국과 함께 지속되었던 시조룡과의 계약이 다시 한 번 이루어졌음을 축복하며 권능으로 빚어진 따뜻한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황성에서 침묵한 채 동쪽 탑만 지켜보던 에른스트가 손에 닿는 거대한 탁자를 옆으로 던져버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쩌엉!!

분개하는 제국의 소드마스터로부터 번져나간 힘의 기류가 사방에 균열을 일으켰다.

제국의 소드마스터는 평정을 잃고 경련하는 손아귀를 말아쥐며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레이...!! 네놈이 정녕...!!!"

용오름을 보며 감정을 통제해내지 못 한 자는 에른스트만이 아니었다.

황도와 가까이 있던 모두가 하늘 높이 치솟는 용오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대기하던 로얄가드 다카우스가 참담함을 이기지 못 하고 두 눈을 가렸다.

두 눈을 가린 채 잠시 입을 달싹이던 다카우스는 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검을 뽑아냈다.

"황명이다."

대기하던 제국의 군단이 다카우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국의 반역자를... 참하라."

최초의 맹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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