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49화 (349/446)

349화

"..."

레이가 검을 떨어뜨렸다.

지미가 곧장 벨라와 레아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레아는 벨라의 품에 안긴 채 계속해서 서럽게 울어댔다.

2층에 있는 방 안으로 세 사람이 몸을 숨긴 후에도, 세상 서럽게 울어대는 울음소리가 레이의 귓가를 계속해서 울렸다.

레이는 바닥에 이어진 혈흔을 돌아보며 그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침묵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데,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만 같던 레아의 울음소리가 어느 순간 뚝 멈추었다.

레이는 루나가 외부의 소음을 차단했음을 알았지만 아무 반응도 않고 자리를 지켰다.

레이의 눈동자는 공허해 보였으나 초점만은 뚜렷하게 잡혀 있었다.

루나는 그게 너무나 불안하게 다가왔다.

"레이."

"..."

"레이, 날 봐요."

"..."

레이가 그제야 루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루나는 격정을 머금은 은색 눈동자로 레이를 노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대체 뭘 고민하는 거예요?"

지금 레이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레아를 죽이냐 살리냐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레아를 목이 잘릴 것이고, 이제 남은 문제는 누구 손에 목이 잘리냐는 것뿐이었다.

레이가 그릇된 선택을 한다 해도 레아를 살릴 방법 따위는 없었다.

"레아 때문에 다 함께 죽자는 거예요? 당신의 아이를 품은 카렌과 알레시아도 함께? 그들이 당신에게 그리 하찮은 존재였나요?"

"내가... 내가 레아를 죽이면, 제국이 약속을 지킬까...?"

"레이!!!"

힐난의 감정이 가득 깃든 루나의 외침을 들으며 레이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래, 레이가 레아를 죽인다면... 제국은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실책을 행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이까지 죽고 난 이후에는 과연 제국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사후의 일을 방비해놓기에는 레이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고, 또한 어설프게 수상한 낌새를 드러내 봤자 목만 잘릴 터였다.

그러니 레아의 목을 벤 레이는 처신을 올바르게 하며 약속이 이행되기를 그저 바라야 했다.

어쩌면... 어쩌면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었다.

에른스트가 정녕 레이에게 호의를 가졌다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은 레이의 지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에른스트까지 사망했을 때쯤엔 그래도 다들 자기 기반쯤은 만들어 놓았을 터였다.

그러니 레이는 그냥... 남은 삶 동안 열심히 눈치만 보면 되었다.

레아를 잃고 실성한 벨라를 데리고 말이다.

아마 주변 눈치를 보느라 레아를 잃고 실성한 벨라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 할 것이다.

그게 레이에게 남은 최후였다.

"..."

"레이...!!"

루나가 침묵을 이어가던 레이를 기다리지 못 하고 레이의 멱살 아래를 붙잡았다.

"레아를 구할 수는 없어요...!! 그런 방법은 없어요...!! 레이도 알잖아요...!!"

"...그래."

레이 또한 레아를 구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설령, 만약에라도 레이가 희생해서 레아를 황도 밖으로 탈출시킨다고 해도 누가 레아를 원하겠는가.

남부? 남부 세력이나 교단이 과연 레아를 원할까?

"..."

레아는 위치가 참 애매한 존재였다.

제국과 황제를 흔들기에는 참으로 좋은 재료이자 수단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한 세력의 정면에 내세우기에는 하자 투성이였다.

멀쩡한 황족이 숙청을 피해서 도망쳤다면 그를 돕는다고 해도 부실하게나마 가져다 붙일 명분이 꽤 있었다.

하지만 황족을 황실로부터 은폐하고 키운 것은 궤가 다른 금기였다.

이건 심지어 황족 살해보다도 불순한 죄였다.

역적질이자 반역죄였으며 또한 혈통을 중시하는 귀족 사회의 터부였다.

아무리 기를 써도 가져다 붙일 명분 따위가 존재할 리 없었다.

그렇기에 레아는 그 존재 자체가 너무나 불순했다.

한 세력의 정면에 내세우기에는 명분도 시원찮을뿐더러 내부 반발도 무조건 터져 나왔다.

뭐, 그렇다고 해도... 그 '레이'의 혈육이라면 혹할 만했다.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이라는 상정성. 그리고 마경을 정벌한 힘.

그 둘을 모두 가진 레이가 레아와 함께한다면 명분이 많이 떨어져도 레아를 내세우는 건 충분히 매혹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레이가 멀쩡히 살아서 레아의 뒷배가 되어주었을 때 가정이었다.

레이가 죽으면 레아의 가치는 바로 반토막이 났다.

"..."

레이가 레아를 도피시키기 위해 황도에서 죽는다면...

황제를 견제하는 세력들에게는 도리어 레아의 존재가 달갑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레아는 레이가 역모를 꾸몄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황족의 특성이 워낙 뚜렷해 이견이 나올 수가 없었다.

허나 레아가 사라진다면, 레이가 역모를 꾸몄다는 주장을 황실이 증명할 수 없게 된다면...

아주 손쉽게 '황제가 영웅을 시기해 누명을 씌워 반역자로 만들고 죽여버렸다'는 식으로 여론을 호도할 수 있게 된다.

"..."

레아의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레이가 죽고 덩그러니 남은 레아는 써먹기가 복잡했다.

그러니 차라리 레아를 흔적도 없이 치우고 제국의 황제를 '영웅을 시기해 죽인 폭군'으로 호도하는 쪽이 훨씬 더 확실하게 황실을 흔들 수 있었으며 우호 세력 결집에도 유리했다.

알렉산데르라면 분명 거기까지 머리가 돌아갈 것이다.

그걸 모를만한 작자가 절대 아니었다.

어쩌면 더 좋은 선택지를 두고도 레아를 죽이지 않고 이용해먹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종국에는 버릴 것이다.

남부가 아닌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의탁하든... 레아는 반드시 버림받을 운명이었다.

"..."

벨라와 지미를 제외하고는, 과연 확실하게 레아의 편이 되어줄 개인이나 세력이 있을까?

레이의 지인들은 레아를 아끼고 사랑했으나, 그건 레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레이의 지인들이 레이라는 연결고리가 사라진 후에도 모든 것을 걸고 레아에게 헌신할 리가 없다. 도리어 레이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원망할 것이다.

레이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

헛웃음이 흘렀다.

레아를 아예 들키면 안 됐다.

레아는 처음부터 절대 들키면 안 되는 존재였다.

평생을 시골에서 벨라의 곁에 머물며 조용히 삶을 영위했어야 했다.

황족이라는 게 들키는 순간 레아는 미움받고 이용만 당하다가 죽을 운명이었다.

다른 이에게도 자신에게도 레아는 그저 재앙 덩어리였다.

레아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도와줄 이들은 가족 말고 아무도 없었다.

가족이 없으면 레아는 혼자였다.

레이는... 직접 짰다는 목도리를 선물하며 해맑게 웃던 레아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회한을 머금은 채 과거를 돌아보았다.

"내가... 내가 틀렸던 걸까... 내 선택이 잘못되었던 걸까..."

레이가 제대로 된 세력을 구축하지 않고 실권을 멀리한 것은 정치적인 위험을 낮추기 위한 나름의 처세였다. 그게 옳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했었다.

그것 말고도 레이는 많은 선택에 기로에 섰었고, 정답이라 생각하는 길을 골라왔다.

제국의 균열을 막아내고 인류가 힘을 합쳐 거대한 재앙에 대항하기를 택했다.

자신의 사후 대륙의 안정을 위해 안소니우스를 성검의 주인으로 내세우기를 택했다.

고작 몇 년을 더 연명하는 것보다, 최후까지 삶을 갈아내 푸른 하늘을 되찾아 오는 길을 택했다.

그 모든 선택이 틀렸나? 오판이었나?

아니, 옳은 선택이었다. 분명 옳은 선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선택이 맞물리고 맞물려서 결국 지금 이 꼴이었다.

"하... 하..."

어쩌면 그 모든 선택이 맞물렸기에 레이가 최후의 기회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레아만 죽이면 이 모든 뒤틀림이 순리를 찾아 정돈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이는... 벨라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레아를 죽일 수 없었고...

그것 외의 다른 선택지는 더는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하하하..."

레이는 황제라도 죽이는 망상을 해보았다.

황제를 죽이고 레이도 죽는다면 다른 이들이 홀로 남은 레아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라도 해줄까?

그럴 리가 없다. 살아남은 다른 황족을 내세워 레아를 잡아 죽이려 할 것이다.

그렇게 정의를 바로 세워 명분까지 챙기고 입맛대로 황제를 다루며 영향력을 확대할 것이다.

설령 남은 황족이 레아 말고 없다고 해도 레아를 황가의 후계로 인정해줄 이들은 없었다.

"더는... 내게... 남은 게..."

더는 레이에게 남은 게 없다.

벨라와 레아를 구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기적처럼 황도를 빠져나간다 해도 영원히 도망자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레이와 가까웠던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레이는 몇 번째인지 모를 구역질을 느끼며 손아귀를 말아쥐었다.

성검... 그게 남아있기는 했다.

레이는 여전히 성검에 관한 최상위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자기 권한을 일부 안소니우스에게 양도한데다가 제자리에 박혀있던 성검의 봉인이 풀린 상황인지라 당장 손 뻗어서 부르는 건 좀 힘들었지만, 시야 안에만 있으면 불러들일 수 있었다.

당장 안소니우스와 접촉하는 것도 하려고만 들면 어찌 가능하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달라질 게 뭐가 있는가.

레이에게 성검은 대단한 도움이 되는 병기가 아니었고, 레이가 성검을 쥔 채 까분다면 제국은 더욱 레이를 잡아 죽이려 할 것이다.

어차피 대외적인 상징성은 안소니우스가 다 가져간 상황에서, 자기 누이를 위해 균형과 안정을 추구하는 안소니우스가 레이의 편을 들어줄 가능성도 낮았다.

"..."

사령검.

그게 있기는 했지만...

사용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 그런 걸 레이가 드는 순간 레이와 레이의 지인들은 제국이 아닌 대륙의 역적이 된다.

레이와 관계된 모두가 도망자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

레이는 막막한 어둠 속에서 방황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좌절과 슬픔이 레이의 목을 옥죄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더는 두 눈의 초점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레이는 오직 벨라를 위해 세상을 구하고자 했다.

벨라가 있었기에 레이는 처음으로 마음을 열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다른 이에게 애정을 품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레이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세상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리 노력하다 뒤늦게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후회했고,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희생을 자처했다.

그러니까 레이에게 세상의 안정과 평화 따위는 항상 수단이었지 가치를 지니지 않았다.

레이는 그 변치 않았던 진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나서야 자신이 이제 무엇을 두고 고뇌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루나."

레이가, 품에서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꺼내 루나에게 내밀었다.

"루나, 이걸..."

쫘악!!

레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루나가 레이의 뺨을 후려쳤다.

루나는 고작 뺨을 맞고 휘청거리는 레이를 벽까지 밀치며 소리쳤다.

"레이, 정신 좀 차려요!!"

"..."

"레이...! 레이...!"

연거푸 레이의 이름을 부른 루나가 결국 눈시울을 붉히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내가 지켜줄게요. 내가 당신이 사랑한 사람들을 지켜줄 테니까... 이제 그만 고집 부리고 레아를 죽여요."

루나는 억눌린 신음을 짜내듯 고통스러워하며 레이에게 호소했다.

레이는 무심코 루나의 눈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차마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지 못 한 채 반쯤 주저앉았다.

"루나, 나는... 나는 너희를 지킬 거야..."

"..."

"그리고... 레아도 지켜야 해."

루나가 다시 한 번 레이의 뺨을 후려쳤다.

최초의 맹세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