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레아는 자기 오빠에게 다가가며 눈치를 보았다.
레아는 오빠가 단지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안하기는 했다.
그래서 혹시나 오빠를 화나게 할 잘못을 저지른 적 있는지 열심히 고민해봤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봐도 레아는 최근 레이를 화나게 할만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
레아는 좀 많이 억울해졌다.
오빠가 돌아와서 기껏 긴장을 놓는가 했더니 다시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게 너무 싫었다.
만약 이게 오빠의 장난이라면 장난이 끝난 후 오빠에게 실컷 빽빽 대리라 다짐한 레아가 벨라에게 딱 붙어서 거리를 좁혔다.
그때까지 레이의 눈동자는 지면만 바라보며 초점이 잡혔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
멍하니 서 있던 레이는 가까이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흠칫 놀랐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난 레이는 잠시 또 멍하게 서 있다가 주변의 아무 저택이나 가리켰다.
"들어가서... 들어가서 얘기해요."
어차피 이 주변의 건물들은 전부 빈집이었다.
지금 이 주변에 남은 이들은, 죽어야 할 사람들과 그들을 감시하는 자들뿐이었다.
레이가 가까이 있던 빈 저택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벨라와 레아 또한 뒤를 따랐다.
벨라에게 딱 붙어서 저택에 발을 들인 레아는 비싸 보이는 물건이 가득한 저택 안을 돌아보며 두 눈을 반짝였다.
호기심에 휩싸인 레아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만져봐도 될까 안 될까 고민했다.
레아가 허락을 받기 위해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데, 지미가 그런 레아를 번쩍 들어 품에 안고서 조금 떨어져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지미가 레아와 함께 자리를 비켜주자 레이가 눈두덩이를 매만지며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벨라는 지미가 들어간 방을 잠시 돌아봤다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레이와 마주앉았다.
"우리 아들..."
벨라는 팔을 뻗어 레이의 손을 잡으며 재차 안도했다.
마경으로 향한 레이가 무사할까 벨라 또한 참 많이 걱정했었다.
벨라는 승전이니 패전이니 그런 것보다 레이가 무사하길 바랐고, 다행히도 레이는 이리 무사히 돌아왔다.
하지만 가족들의 품에 돌아온 레이의 안색은 어째 좋아 보이지가 않았다.
피로와 고민이 가득해 보이는 레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벨라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들, 엄마한테 할 말 있어?"
"..."
레이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 했다.
벨라는 무엇 때문에 레이가 이렇게 망설이는지 의아했다.
어쩌면, 앞으로의 출세를 위해 벨라와 아예 연을 끊자는 이야기를 꺼낼지도 몰랐다.
그거야 충격을 받을 수 있는 이야기이긴 했지만, 벨라는 자신의 존재와 신분이 레이에게 오점이 되었음을 내심 미안해하고 있었기에 그런 상황쯤은 언제든 각오하고 있었다.
벨라는 따뜻하게 웃으며 레이에게 다시 물었다.
"아들? 말해 봐. 걱정 말고."
"아... 어... 그니까..."
레이는 어딘가 모자란 사람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 그러니까 엄마... 어... 엄마..."
그리 계속해서 헤매고 헤맨 끝에.
레이는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자각도 못 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레아가 황족인 걸 들켰어."
"..."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정말 괜찮아. 레아만 죽이면 다 괜찮을 거야. 그럼 아무 문제 없어. 모두 행복할 수 있어."
"..."
벨라는 레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이의 목소리가 귓가에는 들리는데, 귓가에 들리는 말을 머리가 제대로 받아들이지를 못 했다.
레이는 정체를 들켰다고 했다. 그러니 죽여야 한다고 했다.
죽여...? 누구를...?
그러니까... 레아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럼 모두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아, 아들..."
벨라는 레이의 손을 감싸고 있던 손아귀에 반사적으로 힘을 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게... 그게 무슨 말이야...?"
레아를 죽여야 한다.
레아만 죽이면 아무 문제 없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고...?
벨라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 들었으리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들... 아니지? 엄마가, 엄마가 잘못 들은 거지?"
드드득
레이가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지미와 레아가 들어갔던 방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레이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싸구려 철검이 걸음에 맞춰 흔들렸다.
그 흔들리는 철검을 멍하니 바라보던 벨라는, 불현듯 불안이 차올라 레이를 막아 세우려 했다.
"아들...! 잠깐만...! 아들...!"
벨라가 레이의 걸음을 멈춰 세우려 했으나 레이는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힘과 덩치에서 밀려 바닥에 넘어진 벨라는 황급히 레이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들! 안 돼! 안 돼! 레이!! 그러면 안 돼!!"
벨라가 연거푸 소리를 지르며 레이의 발목을 꽉 안았으나 레이는 벨라를 질질 끌고 걸음을 옮겼다.
도저히 레이를 제지할 수 없자 벨라는 한 손으로 레이의 발목을 붙든 채 다급히 반대 손으로 바닥을 긁었다.
끽끽거리는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바닥의 홈에 끼어서 잠시잠깐 지지대 역할을 해주었던 벨라의 손톱이 삽시간에 부러지고 뽑혀나갔다.
핏물에 적셔진 벨라의 손은 자꾸만 미끄러졌다.
그럼에도 벨라는 어떻게든 무언가를 붙들고 레이를 멈춰 세우려 했고, 레이는 그 모든 걸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레이!!!"
으득
서랍장을 붙잡은 벨라의 손가락이 뒤로 꺾이며 부러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때, 지미가 방문을 벌컥 열더니 눈앞의 광경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저 너머에서부터 이어진 핏자국이 벨라를 향해 있는 것을 보고 지미는 곧장 벨라부터 레이에게서 떼어냈다.
벨라가 지미의 손을 뿌리치려고 발버둥치며 소리쳤다.
"레이!! 안 돼!! 레이!!!"
"벨라, 잠깐 진정해!"
지미는 지나치게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벨라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버둥거리는 벨라는 지미조차 곤혼스럽게 할 만큼 괴력을 냈다.
차라리 상대가 몸이 튼튼한 기사였다면 쉽게 제압했겠지만, 평범한 일반인을 무식하게 힘으로 억눌렀다가는 크게 다칠 수도 있었기에 지미는 곤혹스러워 하며 벨라를 말렸다.
그리고, 지미를 따라 방에서 나오려던 레아가 문앞에서 레이와 마주쳤다.
소리를 지르는 엄마와 그걸 말리려는 아빠,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오빠까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레아는 겁에 질린 채, 레이에게 도움을 구하듯 손을 뻗었다.
"오빠...?"
뻑!
시야가 휙 바뀌었다.
무언가 쿵 거리는 소리가 울린 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켁켁거린 레아는 간신히 막힌 숨을 토해내며 바닥을 더듬었다.
자신이 걷어차였다는 걸 자각하기도 못 하고 레아가 힘겹게 고개를 든 순간.
시퍼렇게 선 칼날이 레아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싸구려 철검이었으나 사람의 살갗을 갈라내기에는 충분했다.
레아는 예기가 서린 칼날을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검을 쥔 레이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레아에게 검을 겨눈 레이의 눈빛에는, 명백한 적의가 서려 있었다.
"...!"
이제까지 억지로 묻어두었던 끔찍한 경험들이 되살아나서 레아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레아를 해치려 했던 그 악당들의 흉측한 모습이 레이의 얼굴에 겹쳐 보였다.
저건 오빠가 아니다. 오빠가 아닌 가짜였다. 오빠 흉내를 내는 악당이었다.
레아는 금세 파랗게 질려 끅끅댔다.
그 광경을 보며 지미는 재차 당황했다.
"레이, 잠깐...!"
지미 또한 레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레아를 포기해야 그나마 살 수 있는 사람은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지미가 생각한 헤어짐은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
구역질날만큼 위선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지미는 레아에게 마지막까지 행복한 기억만 남겨주고 싶었다.
잘 놀아주고... 맛있는 것도 먹이고... 잘 재워 놓고... 그다음에 숨을 끊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레이의 행동은 지미의 예상을 너무나 벗어나 있었다.
당황한 지미는 결국 품 안에서 버둥거리던 벨라를 놓아주었다.
벨라는 황급히 뛰어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 하던 레아를 끌어안았다.
"우리 딸...! 우리 딸...!"
벨라가 피범벅이 된 손으로 레아를 꽉 끌어안은 채 몸을 벌벌 떨었다.
끅끅대던 레아는 벨라의 품에 안기고 나서야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레아의 울음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꼴을 보던 지미는 반쯤 얼이 빠진 채 자기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때까지도, 레이는 여전히 레아를 향해 칼 끝을 겨누고 있었다.
벨라는 레아를 품에 안은 채 기어가듯 레이에게 다가갔다.
품 속의 레아를 겨눈 검을 맨손으로 쥐고 옆으로 밀어낸 벨라는,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새빨갛게 변한 손으로 레이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레이에게 빌었다.
"아들... 아들 동생이잖아, 응? 아들 동생이잖아... 다른...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벨라는 같은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하지만 여전히 차갑게 내려앉은 레이의 눈동자를 보고 결국 오열했다.
"아들... 나는... 나는 우리 딸 없으면 못 사는데...! 우리 딸이...! 우리 딸을...! 아들 제발... 엄마가 제발 부탁할게... 엄마는 어떻게 돼도 괜찮으니까... 우리 딸은 안 돼..."
"..."
레이는 고민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며 애원하는, 이 중년에 접어든 추한 여자는 누구인가.
레이는 벨라를 바라보며 생소함을 느꼈다.
한집에서 살며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추억을 쌓으며 지냈던 시간이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서 레이는 벨라를 바라보며 잠시 생소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벨라의 눈가에 새겨진 주름을 거슬러 따라가다 보면 먼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들으며 자신이 가졌던 것을 전부 잃고 나서도...
오늘부터 내 아들 하자고... 아들 덕분에 엄마가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고... 그리 속삭여주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날 레이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갓난아기의 손아귀로 벨라의 손가락을 움켜쥐며 맹세했다.
그래, 오직 당신을 위해... 멸망을 막아보겠다고.
"..."
당신의 삶을 위해, 또한 당신을 기만하지 않고 진실된 행복을 선물하기 위해 삶을 걸었다.
헌데... 나는 지금 무엇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포기하려 하는가.
레이는 벨라의 품에 안긴, 벨라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그 아이를 바라봤다.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던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
방의 구석에서 몸을 은폐한 채 날카로운 마나의 기류를 갈아내고 있던 루나가 레이를 돌아봤다.
루나가 은색 눈동자에 격정을 담아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레이,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말아요."
"루나."
레이는 공허한 눈으로 창문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 손에 쥐었던 검을 떨어뜨렸다.
"그러지 마."
최초의 맹세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