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오빠 진짜 왔다!!"
열심히 달려간 레아는 레이에게 바로 콱 달라붙었다.
레아는 레이의 몸을 엉금엉금 기어오르려 했다가 손에서 목도리의 질감을 느끼고 해맑게 외쳤다.
"오빠 목도리 했다! 레아가 만든 목도리!"
나름 생색을 내본 레아는 뿌듯함을 느끼며 레이에게 딱 달라붙어 다시 꾸물거렸다.
허나 레이는 갑작스레 머리가 둔중하게 울려대는 탓에 레아가 뭐라고 외쳐댔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다만 비비적거려오는 작은 몸뚱이가 상당한 열기를 품고 있음은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열기의 근원이 무엇인지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레아의 심장 속 드래곤하트의 파편이 채 담아내지 못 한 용혈이 레아의 몸을 흐르고 있었다.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짙은 용혈을 타고난 탓에, 이대로 레아를 가만히 두면 성인은커녕 사춘기가 제대로 찾아오기도 전에 한계를 맞이할 터다.
레이가 열기를 느꼈듯, 레아 또한 최근 자기 몸에 이상한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끔씩 온몸이 화끈화끈하게 변해서 정신이 멍해지거나 끙끙 앓고는 했다.
하지만 원정을 떠난 레이를 걱정하느라 다들 정신이 팔려 있던 차에, 아프다고 칭얼거리기엔 눈치가 보여 말을 못 했다.
그래도 이제는 레이가 돌아왔으니 주변 눈치를 보며 풀이 죽어 지낼 필요가 없었다.
레아는 그동안 열이 나도 혼자 잘 참고 있었다고 자랑스레 고백하려 했다.
자기 오빠라면 괜히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하면서도 칭찬을 해줄 것이라고, 레아는 그리 믿었다.
하지만, 평소 같았으면 진즉 레아를 번쩍 들어 올려 뺨을 꼬집었을 레이가 아직까지 가만히 굳어 있었다.
레아는 자기 오빠가 왜 반응이 없나 의아했다.
잠시 고민한 레아는 레이가 두른 목도리의 끝을 붙잡고 살짝 당겨보았다.
톡톡, 그리 목도리를 당겨보자 레이의 시선이 그제야 레아를 향해 움직였다.
"...!"
레아는 흠칫 놀랐다.
레아를 응시하는 충혈된 레이의 눈동자에는 일그러진 적대감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오빠...?"
이리 뚜렷한 레이의 적의를 생전 처음 마주한 레아는 자기가 혹시 뭘 많이 잘못했나 싶어 어색하게 목도리에서 손을 뗐다.
그때 레아와 조금 간격을 두고 다가온 벨라가 레이를 크게 불렀다.
"아들!!"
벨라는 무사히 돌아온 레이를 꽉 끌어안았다.
벨라가 나타나니 무섭게 굳었던 레이의 표정도 풀어졌다.
레아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벨라를 따라서 다시 레이에게 달라붙었다.
벨라는 레이의 뺨을 쓰다듬더니 잔뜩 붉어진 눈시울에서 눈물을 닦아내며 물었다.
"우리 아들... 잘 다녀왔어? 다친 곳은 없고?"
"아... 응, 다녀왔어. 다친 곳... 어, 다친 곳 없어."
겉만 보아서는 레이 몸에 대단한 상처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안색이 참 피곤해 보였기에, 벨라는 정말 고생했다며 레이를 다시 안아주었다.
그렇게 벨라가 레이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는데 저택의 문이 열리며 알레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기사가 왔구나아...!!"
알레시아가 쪼르르 다가와 레이 곁에 섰다.
배가 꽤 많이 부풀어 있어서 굳이 찰싹 달라붙지는 않았다.
카렌이 알레시아를 뒤따라 레이에게 다가와 눈물을 훌쩍였다.
"레이... 흐윽...!"
울고는 있었지만 안도와 기쁨의 눈물이었다.
요하나는 카렌과 한 발 떨어져서 마찬가지로 눈시울을 붉히다가, 레이와 눈이 마주치자 잘 다녀왔냐고 물으며 솔직하게 웃어주었다.
이곳에는 데런도 있었고, 지미도 있었고, 매튜도 있었고, 디디에를 비롯한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들도 있었다.
레이는 요하나와 데런의 얼굴을 확인하고 잠시 당황했다.
요하나와 데런은 본래 이지스에 있었을 텐데 왜 이 곳으로 다 불러모은 것일까.
레이에게 인질이나 다름 없는 두 사람을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면 레이를 더욱 심란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
아니다.
제국은 일을 그리 복잡하게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다 죽여야 한다면 한곳으로 몰아넣고 확실하게 몰살시키는 게 편했다.
그런 의중을 내비침과 동시에 제국은, 레이가 잘못된 선택을 내렸을 때 잃어야 할 것들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
레이는 눈을 돌려 부풀어 오른 알레시아와 카렌의 배를 바라보았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들임에도 어쩐지 레이에게는 배 안의 아이들이 낯설지가 않았다.
세계수를 찾아갔을 때 체험했던 미래의 환영이 레이의 눈앞에 잠시 아른거렸다.
레이는 비록 아이들의 성장을 끝까지 지켜볼 수는 없을 테지만 그 아이들을 지켜내야 했다.
그리고 그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허리를 붙잡고 딱 붙어있는 뜨끈뜨끈한 무언가를 비틀고 자르기만 하면 되었다.
"..."
레이는 구역질이 나서 잠시 호흡을 골랐다.
울렁거리는 속이 몸의 문제 때문인지 정신적인 압박 때문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고 레이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지금 레이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어떻게 발악해도 레이와 그의 지인들은 황도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수많은 공적을 쌓았던 레이는 이제 칼질도 제대로 못 하는 반병신이었다.
지미와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들, 그리고 때때로 로드 급 이상의 활약을 발하는 루나가 함께 있었으나 황도를 벗어나기엔 너무나 초라한 전력이었다.
프레체스처럼 시스템의 허점을 찌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황도의 방위 시스템은 로드 급 한둘로 대적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부차적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소극적으로 운용할 뿐이지 제대로 활용하면 대마법사조차 화력으로 찍어누를 수 있었다.
또한 황도의 방위 시스템은 제국이 보유 중인 드래곤하트의 권능까지 간접적으로 운용 가능하게 설계되었기에 소드마스터가 펼쳐내는 절대권역에도 일부 대응해낼 수 있었다.
거기다...
제국의 최정예까지 황도에 다수 집결해서 레이에게 검을 겨눌 준비를 마친 채였다.
이런 상황에서 레이가 황도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했다.
지면에서 워프조차 제한되는 황도의 환경에서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어차피 레이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
"레이, 혹시 어디 다쳤느냐?"
멍하니 있는 레이에게 알레시아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레이는 뒤늦게 고개를 들어 알레시아를 마주 봤다.
"...아, 괜찮아. 괜찮은데... 어, 너는 괜찮지?"
"건강하도다! 뱃속의 아이도 발길질이 힘차구나!"
"아... 다행이야. 그, 카렌도 괜찮고?"
"응, 괜찮아. 다친 곳도 없고 아픈 곳도 없어. 레이도 정말 괜찮지?"
"어... 멀쩡해."
레이는 그리 말하고는, 카렌 뒤에 서 있던 요하나의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요하나는 갑자기 무슨 짓이냐고 말로만 틱틱거리며 활짝 웃었다.
다들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레이를 걱정하면서도 겉으로 보기엔 큰 상처가 없어 보였기에 일단은 캐묻지 않고 환영해주었다.
한편 레아는 자기 머리 위로 레이의 손이 다가오자 레이가 머리를 쓰다듬어줄 줄 알았다.
허나 레이는 우악스럽게 레아의 머리를 짓눌러 레아를 억지로 떼어냈다.
떨어져나온 레아는 세상 섭섭한 얼굴로 자기 오빠를 바라봤으나 레이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알레시아가 저택을 향해 레이와 함께 걸으며 입을 열었다.
"나의 기사여, 이제 예정이 어떻게 되느냐? 혹 일정이 다 마무리되면 백작령에 들를 것이냐?"
알레시아는 조금 긴장한 채 레이의 답을 기다렸다.
알레시아 또한 레이가 필립스 백작령에 종속될 리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레이 성격에 알레시아나 카렌을 챙겨주기는 할 테지만, 또 얼마나 자주 볼 수 있을지는 확신이 안 섰다.
레이는 잠시 멍하니 알레시아의 배를 바라보다 되물었다.
"...얼마나 남았어?"
"날짜는 거의 다 채웠느니라!"
아직 여유는 좀 있었지만 이제 진짜 금방이었다. 카렌 또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앞서가던 요하나는 알레시아의 배를 슬쩍 돌아보더니 괜히 알레시아의 신경을 한 번 긁었다.
"애가 나온다고 이 배가 들어갈까요?"
"..."
알레시아도 그게 잠깐 걱정되었는지 침묵했다가 요하나의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레이는, 자신이 무사히 돌아왔기에 활기를 머금게 된 그녀들을 바라보다 제자리서 멈춰 섰다.
"...먼저 들어가 있어. 지미랑 잠깐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레이가 그리 부탁하자 지미와 루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먼저 저택으로 돌아갔다.
루나가 거리를 벌린 채 두 사람을 지켜보았고, 지미는 레이의 안색을 살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다지만 레이는 굉장히 피로해 보였고, 또한 영 얼이 빠진 것처럼 굴었다.
레이의 사정을 아는 지미가 착잡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냐?"
"아, 지미... 그러니까..."
레이는 하려던 말을 제대로 꺼내지도 못 하고 입을 어물거리며 자꾸만 방황했다.
"그게... 그러니까... 그런, 그... 괜찮다면... 그게..."
"레이."
묵직하게 울리는 지미의 목소리에, 레이는 몇 번 더 입을 뻐끔거리다 목구멍에 박혀 있던 말을 토해냈다.
"레아를 죽여야겠어요."
잠시 침묵이 일었다.
고개를 어설프게 숙이고 있던 레이는 지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 했다.
지미는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레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레아를 마지막까지 지켜주지 못 해서 미안하고, 나의 실수 탓에 결국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사과한 지미가 시큰거리는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쉬어. 내가... 내가 할게."
콱!
레이가 지미의 팔목을 붙들었다.
지미의 팔목은 덜덜 떨려대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레이는 떨려대는 것이 지미가 아니라 자신의 팔목임을 뒤늦게 눈치챘다.
레이는 반대손으로 떨려대는 팔목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건 내가... 내가 할 일이에요. 내가 해야만 해요. 그래야만 해요. 꼭 그래야 해요."
이건 증명의 과정이었다.
그러니까 반드시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레이가 직접 해야 했다.
더군다나 너무나도 많을 빚을 졌던 지미에게 이따위 마음의 짐을 떠넘길 수는 없었다.
지미는 레이를 바라보며 피가 새어나오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근데... 벨라에게는..."
"아... 해야죠. 말해야죠."
벨라를 설득하자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 설명은 해주어야 했다.
이제부터 우리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내가 당신의 아이를 살해할 거라고 설명을... 설명을...
레이는 계속해서 이어지던 생각을 발작적으로 끊어내고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 지미. 벨라랑 레아 좀 데려와 줄래요?"
"..."
지미는 뒤틀린 레이의 입꼬리를 바라보았다.
지미의 팔목을 붙든 레이의 손아귀는 여전히 덜덜 떨려대고 있었다.
그런 레이를 앞에 두고 지미는 차마 약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레이의 어깨 아래를 두드려준 지미가 알겠다고 답하고 등을 돌렸다.
얼마 안 가 벨라와 레아가 손을 잡고 나왔다.
벨라를 따라 나온 레아는 은근히 삐친 티를 내면서도, 자꾸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다 오빠의 짓궂은 장난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재차 활짝 웃었다.
레이는 더는 레아와 눈을 마주치지 못 했다.
최초의 맹세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