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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346화 (346/446)

346화

선을 넘어도 너무 많이 넘었다.

레이는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가장 중대한 죄를 범했다.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의 존재를 은폐한 것부터가 이미 역모와 다를 게 없었다.

레이는 거기서 그치기는커녕 더 나아가서 황실의 드래곤하트까지 빼돌려 숨겨둔 황족을 연명시키려 했다.

그 시점에서 어떤 그럴듯한 변명을 가져다 붙여도 레이는 반드시 참해야 할 대역죄인이었다.

"..."

만약 역모 혐의가 엮여있지 않았다고 해도... 레아의 존재는 결코 용인될 수 없었다.

황실로부터 고의로 은폐되어 길러졌던 황족을, 황실이 이제 와서 황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이런 선례를 만드는 건 제국과 황제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황실의 권위만 추락시킬 뿐이었다.

물론, 황제가 손해를 감수하고 황족인 레아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황제의 정통성이 확고한 상태였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현 제국의 황제는 대륙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그와 별개로 정통성 쪽에는 분명 하자가 있었다.

앞으로 황제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시기가 왔을 때 누군가 한 번쯤은 물고 늘어질 만한 약점이었다.

거기에 더해 레아를 비호하고자 한 혈육이... 그 누구도 아닌 '레이'였다.

레이가 누군인가?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이라고, 그리 기록되기에 충분한 공적을 나이 스물에 쌓은 자였다.

레이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었기에 황제는 레이를 굳이 억누르지 않고 대외적으로도 충분히 치켜세워주었다.

제국 수호 훈장을 수여했고 모로스 또한 정식으로 위임해주었다.

그런 레이가 비호한 황족이자 혈육이 레아였다.

이 정도 상징성이면 천하디 천한 창녀 태생이라는 오점조차 일부 무마 가능한 수준이었다.

레아를 황실 안으로 들인다면 당장은 크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추후 황제를 흔들 도구로 쓰이거나 제국에 혼란과 균열을 일으킬 조건은 아주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다.

이런 존재를 단순히 연민 탓에 자비를 베풀겠다고 살려두는 건, 그냥 미친 짓이었다.

"..."

빠드득!

생각에 잠겨있던 에른스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며 탁자의 모서리가 바스러졌다.

에른스트는, 레이가 역모 따위를 꿈꾸지 않았으리란 걸 모르지 않았다.

그 멍청하고도 미련한 놈이 레아가 태어난 날 참으로 병신 같은 선택을 내리기까지의 고뇌를, 에른스트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자기가 어머니라 부르는 이를 기만하고 슬프게 하지 않기를 위해, 단지 그것때문에 희생을 자처했을 터다.

"..."

에른스트는 레이와 적대하기를 감정적으로 바라지 않았고, 또한 실리적인 측면에서도 피하고 싶었다.

레이를 죽이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러한 행위가 불러올 후폭풍은 가볍지 않았다.

더군다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레이는 어차피 얼마 못 가 숨이 끊어질 것 아닌가.

아무것도 모른 체하고 레이의 죽음을 기다렸다가 레아를 제거하는 것이 가장 깔끔하다고 얼핏 생각되기도 했다.

레이가 죽은 뒤 불운한 사고 따위로 포장해서 레아를 제거하고 드래곤하트를 회수할 수 있다면 모든 게 깔끔했다.

"..."

그러나 이런 선택지를 고르는 건 불가능했다.

레이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레이에게 제공해야 했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레이가 지미로부터 습격 당시의 증언을 듣는다면.

에른스트와 레아가 가까이서 마주쳤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면.

그리고 에른스트가 레아의 존재를 눈치챘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면... 과연 그 뒤에는 어떻게 행동할까?

에른스트는 레이가 가장 우선시하는 것과 행동력을 이미 경험해보았다.

에른스트가 아는 레이는 혹시나 제국이 레아의 존재를 눈치챘으면 어쩌나 끝까지 불안에만 떨다 조용히 눈을 감을 인물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레이가 보여준 모습을 고려하면 분명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으려고 덤벼들 터다.

그리고 레이 입장에서는, 자기 식구들을 챙겨 기습적으로 제국 남부로 몸을 빼는 것도 고려해볼 만한 해결책이었다.

몸이 다 망가진 레이는 검을 제대로 잡지도 못 하는 상황이었으나 그 상징성만큼은 눈부셨다.

헌데 레이가 남부로 도망가서 마경 원정의 최고 공로자 중 한 명인 알렉산데르와 손을 잡는다면, 수습이 안 됐다.

성검의 주인인 안소니우스가 이런 권력 싸움에 어떤 태도를 취할 지는 확실치 않았다.

아예 개입하지 않거나 서로의 입장을 중재하려 들 확률이 가장 높겠지만, 그리 가정해도 제국이 쪼개지는 건 금방이었다.

"..."

물론 레이가 남부로 도망쳐도 본격적인 내전 상황에 치달을 확률은 크게 높지 않았다.

알렉산데르나 신성 교단도 제국과 전면전을 벌이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황실의 사생아를 쥐고 제국을 흔드는 게 모양새가 좋은 것도 아니니 내부 반발도 상당할 터다.

그러니 레이가 죽고 나면, 안소니우스와 신성교단을 위시한 남부 세력들은 굳이 레아를 보호하겠다고 갈등을 극단까지 끌고 갈 이유가 적었다.

아마도 적당히 뻗대다가 황실에 협상을 제의해 레아를 황실에 넘기는 대신 저들이 원하는 걸 얻어내고자 할 확률이 가장 높았다.

협상이 잘 진행되어 상황이 적당히 무마되든, 혹은 혼란 속에서 악화일로를 걸어 거대한 내전이 터지든.

그때쯤이면 제국과 황실의 권위는 회복 불가한 타격을 입어 바닥에 처박힐 터다.

그밖에 레이에게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내어주지 않고 미끼 삼아 시간을 질질 끌어본다 같은 선택지가 있었지만...

변수가 너무 많았다.

"..."

레이가 레아를 황실로부터 숨기겠다고 결정한 시점에서.

레이와 황실은 '레아'에 관해 어중간한 합의 따위를 맺을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서로 의심을 품었기에 신뢰를 구축하는 건 불가능했고, 제국이라는 인류의 가장 거대한 상징과 권력이 엮여있는 이상 서로를 향한 의심은 계속해서 번지고 뒤틀리기만 할 터다.

만일 황제가 레이에게 레아를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겠다는 정신 나간 제의를 해도 레이가 황제를 신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황제가 진심으로 그런 제의를 건넸다고 해도 레이는 절대 믿지 않을 것이고, 황제 또한 레이가 순수하게 자신의 제의를 믿고 따르리라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황제도 레이도 서로가 멍청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끊임없이 의심이 계속되다가 어떻게든 폭탄이 터질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불안과 갈등의 싹은 철저하게 제거되어야만 했다.

레이를 죽여야 한다면, 레이와 혈연관계에 있거나 강한 유대 관계에 놓인 이들 또한 잔혹할 만큼 철저하게 소각해야 했다.

레이를 죽이고 레이의 지인들을 죽이는 건 어렵지는 않았지만 이런 결정을 쉽사리 내리기엔 제국 또한 잃을 것이 많았다.

요하나를 비롯한 레이와 친분이 있는 미래의 인재를 포기해야함은 물론이고 아무리 명분이 확실하다 해도 정치적 부담이 너무 거대했다.

그렇기에 황제와 에른스트는 레이에게 마지막 기회를 부여했다.

만일 실리적인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해도, 에른스트만은 어떻게든 레이에게 마지막 기회를 쥐여주었을 것이다.

"단 한 명..."

에른스트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홀로 중얼거렸다.

"단 한 명이면... 된다."

레이는 레아의 목만 베어오면 되었다.

레이는 레아의 목을 직접 베어옴으로써, 불안의 싹을 잘라냄과 동시에 자신의 실책을 반성하고 제국에 충성하겠다는 의지를 증명해야 했다.

그리하면 제국은 레이의 흉을 덮어주고 제국의 위대한 영웅이었다고 영원토록 칭송해줄 것이다.

이는 레이가 저지른 죄의 무게에 비해 유례없이 자비로운 조치였으며, 또한 레이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만약에라도 레이가 황제의 자비를 거부한다면.

레이가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 죽을 것이다.

레아의 목은 레이의 죄를 증명하기 위해 광장에 걸릴 것이고, 다른 이들은 사체조차 찾지 못 하게 조각나서 흩뿌려질 것이다.

레이가 레아를 데리고 포위를 뚫고 나가 황도를 벗어날 가능성은 전무했다.

황제는 원정군의 일부가 배반할 가능성까지 고려해 추가 병력을 황도에 집결시키고 있었다.

에른스트가 레이의 곁에서 탈출을 돕는다는 말도 안 되는 가정까지 더해도 탈출 가능성은 전무했다.

영광이 가득해야 했을 개선식은 끔찍한 숙청의 장으로 변할 것이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지금 이 모든 걱정과 긴장이 그저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얼마 안 가 레이는 레아의 목을 베어서 당당하게 내밀 것이다.

그럼 황제는 짓궂은 장난을 끝내고 다시 개선식을 진행할 것이고, 레이는 모두의 환호 속에서 제국의 영웅으로 기록될 것이다.

둘도 아닌 단 한 명의 목만 있으면, 모든 일이 순리대로 돌아가 마무리될 수 있었다.

레아의 목을 베는 건 어렵지 않았다.

레이가 과연 자기 동생을 사랑할까?

그럴 리가 없다. 자기 어미를 향한 연민 탓에 살려두었을 뿐 동생은 입안의 가시 같은 존재였을 터다.

설령 동생에게 연민을 품고 있다고 해도 레이가 레아를 선택할 리 없었다.

뱃속에 있는 자기 아이와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의 삶을 전부 포기하고, 동생 하나를 살리겠다고 발악하는 걸 선택할 리 없었다.

그러지 말아야만 했다.

덜컥

에른스트가 검을 쥐고 집무실을 떠났다.

황성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에른스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홀로 되뇌었다.

"나는, 네가 옳은 선택을 하리라 믿겠다."

단 한 명이면 됐다.

*

레이는 아도이아의 안내를 받으며 텅 빈 거리를 걸었다.

육신은 삐걱거리며 멋대로 휘청이려 했고 등과 가슴이 특히나 아팠다.

이제 레이에게는 무언가를 새로 준비할 힘도 시간도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과오를 되돌릴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음에, 레이는 문득 자기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과한 욕심을 부려 괜히 고생했구나 싶었다.

병신 같은 고집을 부려 괜히 무거운 짐 덩이만 어깨에 올려놓고 제 살을 깎아 먹었다.

그래도 결국 레이는 이루고자 했던 것을 대부분 이루었고 뒤틀려 있는 상황을 되돌릴 기회도 얻었다.

홀로 히죽이던 레이는, 저택 앞에 도착하고 나서 섬찟하게 표정을 굳혔다.

마침 벨라와 함께 저택 앞에 나와서 서성이고 있던 레아가 레이를 발견하고 힘껏 외쳤다.

"오빠 왔다!!!!!"

레아는 곧장 레이에게 달려갔다.

레이에게 달려가는 레아의 입가에는 함박웃음이 맺혔다.

요 근래 레아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자꾸 지내는 환경도 바뀌었고, 다들 레이를 걱정하느라 분위기도 음울했고, 심지어 습격도 받아서 기절까지 했었다.

레아는 이 모든 불안과 불행이 레이가 돌아오면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마침내 너무나 기다리던 오빠가 돌아왔다.

레아는 자기가 선물한 목도리를 오빠가 목에 두르고 있는 것을 보고 괜히 뿌듯해하며 더욱 빠르게 달렸다.

그리 해맑게 웃으며 달려오는 레아를 바라보며, 레이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최초의 맹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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