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레이는 로얄가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루나와 함께 조용히 로얄가드를 뒤따르던 레이는 팔찌를 툭툭 두드리며 속삭였다.
"아프텔."
아프텔은 레시나의 자아를 되찾아준 후에도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아프텔은 황실 마탑 등의 시설에 저장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기에, 레이는 기대를 품고 아프텔에게 물었다.
"혹시 뭐 아는 거 없어?"
[...]
잠시 침묵한 아프텔이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마경 원정이 시작된 이후 제국의 정보 보안이 강화되어 제가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이전보다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딱히 아는 게 없다고?"
[...예, 그렇습니다.]
"..."
레이는 상황을 이해했지만 약간의 찝찝함을 느꼈다.
이전에 아프텔은 열람이 불가능한 정보들도 우회적으로 접근해서 레이에게 힌트를 제공해주고는 했다.
헌데 이리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고 아프텔이 답하니 가슴이 많이 답답했다.
그때 앞서 가던 로얄가드가 레이와 루나를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프리슬란 후작님께서는 제국의 수호자와 독대하기를 청하셨습니다."
루나를 두고 따라오라는 소리였는데, 루나가 앞으로 나서기 전에 레이가 먼저 로얄가드에게 물었다.
"내 가족들이 지금 황도에 피신해있다고 들었는데."
"예, 그렇습니다. 다들 무사하십니다."
"그럼 루나를 그곳으로 안내해줄 사람을 한 명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로얄가드는 가까이서 뒤따르던 황실 직속 기사단원 한 명을 지목하여 안내역을 맡겼다.
그 사이 루나가 레이의 팔목을 강하게 쥐며 함께 움직이자는 의사를 내비쳤다.
현 상황이 그다지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루나 또한 진즉 눈치챘기에 레이를 홀로 두기엔 많이 불안했다.
그러나 레이는 환히 웃으며 루나를 먼저 보내려 했다.
"가서 먼저 인사 나누고 있어. 다들 무사하다는데, 혹시 다친 사람은 없나 모르겠네."
"..."
이제야 짐을 내려놓고 환히 웃을 수 있게 된 레이를 바라보며, 결국 루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루나는 레이에게 조심하라 당부한 뒤 황실 직속 기사단원의 안내를 받아 황도를 걸었다.
기사단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루나를 안내해주었다.
이내 커다란 저택에 도착한 기사단원이 뒤로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이곳입니다."
"..."
루나가 제자리에 서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데, 저택의 문이 벌컥 열리며 요하나가 뛰어나왔다.
"루나!!!"
다급하게 뛰쳐나온 요하나가 루나를 와락 껴안았다.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요하나는 루나를 꽉 껴안은 채 주변을 살폈다.
"레이는? 같이 안 왔어?"
"...황도에 있어. 곧 올 거야."
루나가 그리 답해주자 요하나는 팔에서 힘을 빼며 루나의 어깨 위에 이마를 콕 찍었다.
레이가 마경에서 생환했다는 정보를 얼마 전에 전해 듣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요하나는 혹시나 싶어 불안에 떨었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쳤는데, 레이와 동행했던 루나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나니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다행이야..."
완전히 안심한 요하나는 괜히 눈물이 차올라 코를 훌쩍였다.
루나가 가만히 어깨를 빌려주고 있는데, 저택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차례차례 들려왔다.
"돌아왔구나!"
알레시아가 나타나더니, 부푼 배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굳이 더 앞으로 내밀며 루나를 환영해주었다.
카렌 또한 저택에서 걸어 나와 활짝 웃으며 루나를 반긴 후, 레이가 무사하다는 루나의 이야기를 듣고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데런도, 지미도, 매튜도 다들 크게 다친 곳 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루나를 환영해주었다.
한편 레아는 벨라 뒤에 숨어서 작게 물었다.
"엄마, 오빠는 언제 와?"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 조금 뒤에 온대."
레아는 루나를 은근히 어색해하거나 껄끄러워했기에 직접 묻지는 못 하고 벨라에게 레이의 행방을 전해 들었다.
옛날에는 남들에게 하듯 루나에게도 살갑게 다가갔던 레아였지만 매번 싸늘한 시선을 느꼈던 탓에 지금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레아가 그리 루나의 눈치를 보는 사이 루나는 저택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
이상했다. 인근이 너무 조용했다.
일정 반경 밖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음은 많았지만, 저택 인근은 그저 고요했다.
저택을 중심으로 황도의 구획 일부를 아예 비워버렸다는 의미였다.
루나가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지미에게 물었다.
"...지미,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습격이 있었는데, 우리가 표적이었어. 레이와 가까운 사람들을 노렸지."
"..."
"그래서 황도 안쪽으로 피신하게 됐어. 기사단이 근처도 계속 순찰해주고... 안전해."
그리 말하는 지미의 표정 또한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무리 호의를 베푼다고 해도 황도의 구획 일부를 통째로 비운 후 기사단까지 활용해 인근을 계속 순찰한다?
이건 보호 목적이라기보다는... 완전히 가둬놓고 감시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지미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불만을 내비쳐 봤자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루나는 은색 눈동자로 지미를 마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지미, 다시 물을게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걸리는 게 하나라도 있으면 빨리 답하라는 압박에 지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프리슬란 후작님이 침입자를 격퇴하는데 도움을 주셨어."
"..."
잠깐 침묵한 루나는 문득 시야 끝에 보이던 동쪽 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성의 동쪽에 세워진 저 탑에서, 바로 제국 황족의 용오름 의식이 치러졌다.
동쪽 탑은 아직까지도 기능이 정지하지 않고 활성화된 상태였다.
동쪽 탑의 기능을 유지해봤자 재설계한 황도의 방위 시스템과 충돌만 일으킬 터다.
헌데 방위 시스템의 재설계가 끝난 뒤에도.... 어째서 아직까지 탑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
루나는 그런 의문을 품었다가,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울리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루나의 시선이 향하는 끝에는, 황족을 닮은 붉은 눈을 지닌 아이가 벨라의 품에 안겨 있었다.
*
레이는 에른스트에게 향하며 목도리를 목에 감았다.
목도리는 레아에게 받은 첫 선물이었는데, 레이에게 의미가 깊다기보다는 레아에게 의미가 깊었다.
자기가 처음 준 선물을 가족이 착용하고 다니는 모습을 본다면 그게 또 나름의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레이는 레아에게 보여주기 위해 목도리를 감아보며, 에른스트의 집무실로 안내받았다.
"..."
레이가 집무실로 들어섰을 때 에른스트는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는 에른스트에게 뭐라고 첫마디를 꺼내야 하나 잠시 혼란스러워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개선식도 중단하고 자신을 찾았는지 알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때 에른스트가 먼저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해낼 것이라 믿었다."
에른스트는 따뜻하게 웃어주며 레이를 상찬했다.
"우리 모두가 네게 은혜를 입었다. 고맙구나."
호의적인 에른스트의 목소리를 듣고 긴장이 풀린 레이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황제 폐하의 은총과 후작님의 지원이 없었다면 저 홀로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겸양을 떤 레이가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
"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이름은 제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기록될 것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였고, 레이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레이는 치적에 관한 화제는 뒤로 미루고 이게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인지 먼저 설명을 듣고 싶었다.
"근데 황도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개선식까지 중단하고 절 부르신 걸 보니 가벼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레이."
"예."
"황제 폐하께서 나에게 모로스를 회수하라 명하셨다."
"어..."
에른스트가 갑자기 모로스 얘기를 꺼내니 레이가 잠깐 얼을 탔다.
"아니... 그... 지금 후작님께 바로 반환하면 되는 겁니까?"
"그리하면 된다."
레이의 마음 속에서 의아함이 다시 차올랐다.
모로스는 개선식 막바지에 레이가 직접 황제 앞에서 반환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헌데 그걸 어째서 에른스트가 지금 돌려달라 하는지 많이 혼란스러웠지만...
레이는 이번에도 부정적인 생각들을 억누른 채 그냥 에른스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아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제국의 신검을 에른스트가 받아쥐었다.
제국에게 영광을.
모로스의 검신에 적혀 있는 글귀를 바라보던 에른스트는 덤덤한 목소리로 레이에게 물었다.
"무리하였다고 들었다. 얼마나 남았느냐?"
"음... 멀쩡한 척하며 걸어 다닐 수 있는 것도 기껏해야 몇 달이겠지요."
"제국은 모든 역량을 동원해 너를 살필 것이다. 벌써 좌절하지 말거라. 일단..."
에른스트는 서랍을 열더니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레이 앞으로 내밀었다.
"네게는 이것이 필요하겠구나. 가져가거라."
"아... 감사합니다."
레이가 화색했다.
황실의 드래곤하트에 관한 이야기는 꺼낼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에른스트가 이리 먼저 물건을 내어주니 굉장히 마음이 편해졌다.
정말 좋아하는 레이를 향해 에른스트가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너에게 하사하신 귀중한 신물이니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이제 네 문제를 함께 극복해 보자꾸나."
"예, 알겠습니다."
레이가 가볍게 예의를 차리고는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품에 챙겼다.
마음이 든든해진 레이가 웃음을 머금자 에른스트도 마주 웃어주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 보아라."
돌아가란다고 레이는 또 예를 갖추고 진짜 물러나려 했다.
지금 상황이 무엇하나 정상적이지 않았으나, 그걸 고민하며 어기적거리기엔 레이는 너무 지쳐 있었다.
휘청이지 않고 똑바로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이제는 마냥 쉽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레이는 마음 속 불안을 직시하지 못한 채 그저 회피하려고만 했다.
에른스트는 그 초라해진 레이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마지막 자비를 베풀었다.
"한 명이면 된다."
"...예?"
"단 한 명만, 네 손으로 죽이면 된다."
"..."
레이가 침묵한 채 몸을 굳히자, 에른스트가 레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며 인자하게 웃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두 명을 직접 참하라 명하셨으나, 괜찮다. 한 명이면 된다. 그리하면, 내가 너의 편이 되어주겠다. 약속하마."
에른스트는 레이의 어깨를 약하게 내리누르며 흔들리는 레이의 눈동자를 마주 봤다.
"레이, 아직은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다. 어렵지 않다. 단 한 명만 죽이면 된다. 단 한 명만 죽이면, 모든 게 순리를 따라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에른스트는 자꾸만 초점이 어긋나려는 레이의 눈동자를 손을 뻗어 억지로 고정시키고는,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목소리로 레이에게 속삭였다.
"레이, 명심해라. 너는, 제국 역사의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기록되어야만 한다."
자그마한 실수 하나만 바로잡는다면, 분명 그리될 수 있을 터다.
실수를 바로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단 한 명이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