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레이는 라멘타의 제안을 울트와 레시나에게 전했다.
울트와 레시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세계수의 영역에 함께 방문하겠다고 결정했다.
레이는 울트와 레시나의 의견을 존중해주었으나,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제국의 귀족인 울트는 본래 황도로 귀환해서 2차 개선식에 참여해야 했다.
멋대로 개선식에 불참했다가는 나중에 괜히 곤란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레이는 라멘타에게 울트에 관해 공문서라도 하나 정식으로 작성해서 제국에 전달해달라 요청했고, 라멘타가 그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 덕분에 울트는 약간이나마 더 마음 편하게 레시나와 함께 세계수의 영역으로 동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알렉산데르 또한 황도의 개선식에 참여하지 않으리라고 의사를 표했다.
황도의 개선식에 참여 않겠다며 알렉산데르가 내세운 명분은 역시나 부족함이 없었다.
마경에 진입하기 직전 메테오를 떨어뜨린 탓에 마경 인근에 건설되었던 방어진지가 박살이 난 상황이었다.
복구 작업 중이었지만 한두 달 만에 끝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마경의 세력들이 보복을 위해 움직인다면 위협적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남부에 남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겠다는 건데, 당연히 알렉산데르의 속내는 그리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
황도의 개선식에는 레이와 함께 안소니우스 또한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성검의 주인까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알렉산데르는 남부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열심히 손을 쓸 터다.
'신성 교단의 수뇌부가 안소니우스를 친황실파 인사에 가깝다고 평가하고 있으니...'
교단의 수뇌부 입장에서도 교단을 우선하는 알렉산데르의 영향력이 안소니우스에 밀려나는 걸 썩 달가워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러니 일단은 알렉산데르에게 힘을 실어주긴 할 터였다.
레이는 짧게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의자에 등을 턱 기댔다.
"거 까놓고 하나만 물읍시다."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위치까지 잠시 내려놓은 레이가 불량스러운 자세로 말을 이었다.
"아직도 자기 이름으로 나라 하나 세우거나 뭐 그런 걸 원하시나? 미련이 많이 남으셨어?"
레이와 마주앉아 있던 알렉산데르가 웃음을 머금더니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군. 그게 나를 고뇌하게 해."
알렉산데르가 지녔던 야망은 언제나 뚜렷했다.
알렉산데르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노래될 만큼 명예롭고 위대한 업적을 이뤄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각인하고자 했다.
그러한 욕망은 전혀 예상치 못 한 형태로나마 일부 이루어졌다.
과거의 알렉산데르였다면, 자신의 욕망을 일부 이루었다고 해도 더 높은 곳은 지향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경에서의 경험과 레이가 알려준 '진실'이 알렉산데르를 고뇌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고뇌이기도 했으며, 자신의 검과 욕망이 추구해야 할 방향성의 고뇌이기도 했다.
삶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활활 불타리라 여겼던 과거의 갈망을 상실한 알렉산데르는 아직까지 답을 내리지 못 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과연 이 고뇌와 방황 끝에 알렉산데르가 어떠한 결론에 다다를지, 알렉산데르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언젠가 가고자 하는 길을 걷기 위해서는 기반이 필요한 법이지."
그 기반이란 곧 권력이었다.
레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설령 길을 잃었다고 해도 가진 것을 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 아닌가.
알렉산데르다운 결정이었고, 레이는 알렉산데르와 같은 인간상을 싫어하지 않았다.
또한 알렉산데르는 때로는 자신의 야망보다 대의를 우선할 줄 아는 자였다.
레이는 마경에 함께해준 알렉산데르에게 호의와 감사의 뜻을 담아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당신이 나아갈 길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주기를 바라겠습니다."
"허허... 노력해 보지. 헌데, 우리가 다시 볼 수 있겠나?"
"힘들 겁니다."
"..."
레이를 가만히 바라본 알렉산데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맞잡았다.
"유감이군. 그대와 잠시나마 함께하게 되어 영광이었네."
"저 또한 영광이었습니다."
*
레이는 알렉산데르와 인사를 끝낸 후 복도를 걸었다.
알렉산데르가 남부에서의 주도권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리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가만히 넋 놓고 있다가는 안소니우스에게 주도권이 넘어갈 테니, 알렉산데르 또한 당연히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언젠가 알렉산데르가 과욕을 부리게 된다면 안소니우스가 충분히 억제제 역할을 해줄 것이다.
성검의 주인이자 레이와 함께 프레체스를 토벌한 용사.
그러한 절대적인 상징성을 안소니우스가 가지고 있는 이상, 실권의 유무를 떠나 발언권은 대단히 강력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속으로 중얼거린 레이가 잠시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황도로 귀환하기 전에 저들끼리 복장을 점검하는 원정군의 무리가 눈에 보였다.
그들은 마경에서의 혈전 탓에 육신이 많이 피폐해졌음에도 활기가 가득했다.
"하하하..."
레이는 그들을 바라보며 함께 웃었다.
이제 곧 사랑하는 모두의 곁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자연히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루나는 웃고 있는 레이를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조용히 지켜봤다.
"..."
레이가 웃는다.
레이는 루나의 기억에 남아있던 그 어느 때보다 밝고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웃음 너머에 항상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 오랜 고통을 견뎌낸 끝에 레이는 이제야 순수한 행복을 입가에 머금을 수 있었다.
삶의 끝자락에 와서야, 고뇌를 벗어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루나에게 고통이었고, 또한 유일한 위안이었다.
"..."
루나가 레이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았다.
레이는 손아귀에 힘을 준 채 루나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함께 눈시울을 붉히고는, 이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
원정군의 복귀가 시작되었다.
황도 인근의 워프게이트가 가동되며 레이가 원정군의 선두로 워프게이트를 통과했다.
승전을 거둔 제국의 군단이 워프게이트에서 순차적으로 열을 맞춰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원정군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인파의 함성 소리가 공기를 우렁차게 울렸다.
환영 인파를 이루는 이들은 최선을 다해 함성을 쏟아내며 원정군의 승전을 축하하고 환호했다.
그들의 반짝이는 눈빛에는 동경이 가득했고, 그들 중에는 너무나 흥분해서 간간이 혼절하는 이들도 발생했다.
하지만 환영 인파는 원정군이 기대했던 것보다 상당히 단출했다.
워프게이트를 통과한 원정군들은 환영 인파를 둘러보며 저들끼리 속삭였다.
"원정 중에 황도가 크게 습격당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
"그래서 그런가...? 남부는 지금보다 다섯 배는 많았던 것 같은데..."
마경 원정이 진행되는 사이 대륙 각지에서 산발적인 습격이 있었다는 소식을, 원정군은 남부에 개선한 후에 들을 수 있었다.
악마 숭배자들이 그렇게 행동하리란 건 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황도까지 습격 당했고, 피해가 상당했다는 소식은 원정군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황제를 수호하는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직접 나서서 적을 척살해야 했다는 불확실한 소문까지 들려오는 중이었다.
다들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여겼으나, 남부에 비해 한참 조촐한 환영 인파를 보니 뜬소문이라 생각했던 정보에 신뢰가 갔다.
"..."
레이 또한 황도가 습격당했다는 정보를 미리 접했었다.
처음에는 걱정했으나, 레이의 지인들은 황도 안으로 피신하여 다들 무사하다고 확답을 받아서 안도했었다.
헌데 지금 상황을 보니 황도에 자행된 습격이 레이의 생각보다 위협적이었던 것 같았다.
"..."
짧은 기간 동안 황도가 두 번이나 크게 위협당했다.
그러니 또 다른 습격을 경계하며 만약을 대비해 환영 인파를 제한하는 것도 합리적이라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합리만큼이나 중요한 게 바로 권위였다.
제국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외부의 위협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화려하게 개선식을 여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이렇게 겁먹은 티를 내며 몸을 움츠린다면 제국의 권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원정군이 승전함으로써 대륙이 안정을 되찾아가는 시점 아니던가.
굳이 허세를 부리지 않아도 충분히 목에 힘을 줄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제국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상황이 좀 이상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더 있나?'
레이는 잠시 고민했지만 머리가 복잡해지기 전에 억지로 불안을 지워냈다.
더 이상 무언가를 고뇌하며 심력을 쏟기에는, 레이는 너무 지쳐있었다.
이제는 그만 마음을 편히 먹은 채 자잘한 문제들에는 눈을 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레이는 가슴 깊숙이에 피어오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원정군은 워프게이트를 통과한 후 본래 황성 앞까지 행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워프게이트를 통과한 원정군이 황도에 진입하기도 전에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원정군의 병사들은 환영 인파의 열혈한 환호를 받으면서도 속으로 투덜댔다.
그들이 상상했던 화려한 개선식에 비해 지금 진행되는 개선식은 괴리감이 너무 컸다.
차마 불만을 내비치지는 못 했지만, 현 상황에 대해 원정군의 모두가 의아함을 품고 있기는 했다.
그때 로얄가드 여러 명이 원정군을 향해 다가와 황도에서 급히 논의해야 할 사안이 있다며 원정군의 지휘관 급 인물을 몇 데려갔다.
레이에게도 로얄가드가 한 명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프리슬란 후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레이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에른스트를 만난다면 현 사태에 대한 의문 또한 해결할 수 있을 터다.
레이는 루나와 함께 로얄가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원정군의 대다수가 눈치를 보며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원정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이자 로얄가드인 파울라만은 대놓고 떫은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로얄가드, 다카우스를 향해 파울라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대접이 왜 이렇게 시원찮아? 누가 보면 패전하고 기어들어오는 줄 알겠어."
친분이 꽤 깊기에 할 수 있는 투덜거림이었다. 상황이 그만큼 이상하기도 했고 말이다.
파울라는 상황 설명 좀 해보라는 얼굴로 다카우스를 노려봤으나, 다카우스는 굳은 얼굴로 자기 할 말을 했다.
"군단을... 통솔할 준비를 해라."
"...뭐?"
"만약 황명이 내려오면... 원정군에 속한 이들은 네가 통솔하여 진형을 갖추게 해야 한다."
다카우스는 그리 말하며 명령이 떨어지면 어느 지점에 원정군을 배치해야 하는 지 표시된 작전서를 파울라에게 건넸다.
파울라는 작전서를 보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너 지금 반역 모의라도 하냐?"
작전서를 그대로 따른다면 황도를 포위하듯 병력을 전개하게 된다.
파울라는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저으면서도 다시 물었다.
"아니면... 황도에 숨어든 쥐새끼라도 잡아 죽여야 하는 거야?"
"쥐새끼라..."
쥐새끼란 단어를 몇 번이나 곱씹은 다카우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군."
아직은 그 무엇도 결정되지 않았다.
작전서를 포함한 이 모든 게 자그마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혹은 악몽이 될 수도 있었다.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곧 판가름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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