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43화 (343/446)

343화

아프텔.

리실로테가 제작한 인공지능.

리실로테가 아프텔을 제작하기 위해 복제한 인격의 원본은, 레시나였다.

600년 전 리실로테와 레시나는 오늘과 같은 기적의 순간이 찾아오리라고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먼 미래의 어느 날, 수많은 우연이 겹치고 겹쳐 오늘과 같은 기적이 찾아왔을 때.

이미 무너져 내린 레시나가 과거의 추억들을 되찾고 자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리실로테는 안배를 남겼다.

[...]

레시나와 접촉한 아프텔은 굳게 잠겨 있던 기억 정보들이 하나하나 풀려가는 걸 확인했다.

아프텔은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풀려나온 기억 정보들을 정렬했다.

그와 동시에 팔찌로부터 흘러나온 빛줄기가 고리 형태를 이루며 레시나를 감쌌다.

츠즉-

빛으로 이루어진 고리가 천천히 회전한다.

600년 전 이건 의미 없는 짓이라며 자조했던 레시나의 기억들이 빛의 고리에 녹아있었다.

빛의 고리는 이미 백지가 된 레시나의 영혼과 공명을 일으켰다.

지금 레시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완전히 바스러져 형체를 잃은 기억의 조각들뿐이었다.

그 의미 없는 조각들이, 빛의 고리와 공명하며 과거의 모습으로 점차 환원되기 시작했다.

츠즈즉-

바스러진 기억의 조각들이 빛의 고리에 기록되어 있는 기억 정보들을 토대로 다시금 형체를 이루어갔다.

빛의 고리와 감응해 변화를 맞이하는 레시나의 모습을, 모두가 침묵한 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상실했던 기억을 다시 새겨넣는다는 건 유례를 찾기 힘든 시도였다.

아무리 리실로테가 남긴 안배라고 해도 본래의 목적 대로 완벽히 작동하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레시나가 무사히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지도 불분명했으며, 설령 기억을 되찾았다고 해도 심각한 부작용이 찾아올 수도 있었다.

울트는 부디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되어 레시나가 무사히 기억을 되찾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레시나를 감싸고 있던 빛의 고리가 서서히 흐릿해지다 모습을 감추었다.

여전히 침묵만이 감도는 공간 속에서 레시나가 눈을 떴다.

"..."

어린아이의 것처럼 순진해 보이는 눈망울을 몇 번 감았다 뜬 레시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라멘타...? 아퀴타스...? 왜 여기에...?"

세계수의 수호자가 어째서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내 앞에 있는가.

더군다나 한 명도 아니라 두 명이었고, 거기서 더 나가 아퀴타스는 꽤 심각한 중상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레시나가 지니고 있는 엘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당혹스러워 하는 레시나에게 라멘타가 짧게 설명했다.

"하르시아 사후 600년이 흘렀다."

"...?"

"마경의 확장을 견인하던 개체가 소멸했고, 너는 사명에서 해방되었다."

"...!"

레시나는 마지막 기억보다 눈높이가 한참이 낮아졌음을 자각했다.

고개를 숙이자 완전히 퇴화하여 어린아이의 것처럼 보이는 자신의 육신이 눈에 들어왔다.

"..."

참 많이 혼란스러웠다.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레시나는 차분함을 잃지 않고 천천히 상황을 이해했다.

영락한 육신. 사라진 600년의 기억들. 리실로테가 남긴 안배. 그리고 동족들에게 버려진 레시나를 지키고자 했던 이들.

"..."

레시나가 어렵사리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조용히 레시나의 곁을 지키던 울트가 그에 호응하듯 무릎을 꿇었다.

레시나는 울트를 기억하지 못 했다. 울트에 관한 기억들은 그 전부가 흐릿하게 변질되어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레시나는 가슴이 아려오는 걸 느꼈다. 멋대로 눈가에 맺힌 눈물이, 자꾸만 의지에 반해 흘러내리려 했다.

"카시야스와... 관계가 어떻게..."

"제 선조이십니다."

"...이름을,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울트. 그리 불러주시면 됩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잃어버린 600년의 기억은 그저 모호할 뿐이었다.

그 무엇도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고 안개처럼 흩어지기만 했다.

그럼에도 레시나는 상처 입고 쇠약해진 울트의 육신을 보며 아픔을 느꼈다.

선조로부터 울트에게까지 이어진 이 희생과 헌신 덕분에 레시나는 이제까지 무사할 수 있었다.

레시나의 육신은 비록 퇴화했을지언정 600년의 세월 동안 흉터 하나 없이 소중하게 보호 받았다.

레시나는, 결국 눈물을 떨어뜨렸다.

"많이... 괴로웠나요...?"

너무나 많은 은혜를 빚지고도 그 희생과 헌신의 역사를 망각했다는 죄책감을 떨쳐내기가 힘겨웠다.

울트는 울먹임을 참아내려는 레시나를 향해 고개를 짧게 저은 후 웃음을 머금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노력이 보답 받지 못 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괜찮습니다."

가디 자작가의 시조로부터 이어진 오래된 염원은 최후의 수호자에 이르러서 결국 결실을 맺었다.

비록 그녀가 600년의 세월을 망각했다 해도, 그녀의 존재가 가디 자작가의 희생과 헌신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주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리 답해주는 울트의 뺨에 레시나가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울트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 서로의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

담담하게 울트와 레시나의 대화를 듣던 레이가 흠칫 놀랐다.

'어어...?'

설마 지금 입 맞추려는 건가?

레이는 레시나의 외관을 재차 확인했다.

나이 천 년 먹은 엘프라고 해도 외관은 그냥 꼬맹이었다.

'아, 아니...'

이거 괜찮은 건가?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레이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레이가 전생을 살았던 대한민국에서 저 둘이 입 맞추는 장면이 창작물 따위에 표현됐다면 곧바로 신문 기사에 크게 실렸을 것이다.

남성향 소설 아동 성애 묘사 논란, 이대로 괜찮은가. 대처 미흡한 문피아(*최대 주주 네이버웹툰) 향해 비판 쏟아져. 대표이사 입장문 발표, "뭘 뽀뽀 가지고 유난이냐." 논란 더욱 불 지펴.

그런 아찔한 상상을 하며 레이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사이.

레시나가 울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 모습을 보고 레이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쯤이야 이 세계에서는 감사와 친애의 뜻을 담아 간간이 하는 행위였다.

그 후로 레시나와 울트는 한동안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며 울고 웃었다.

다른 이들은 둘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잠시 거리를 벌린 채 기다려 주었다.

기다림을 가지는 사이 라멘타가 레이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게네시스는 우리가 회수하겠다."

"어, 그래. 안 말릴게."

염치도 없냐고 힐난할 수도 있었지만 레이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수명도 얼마 안 남았는데 세계수의 수호자와 각을 세워서 얻을 게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설마... 맨입으로 가져가겠다는 건 아니지?"

"먼저 감사를 표하겠다."

"뭘 새삼스럽게."

"나의 권한으로 반출할 수 있는 어머니의 눈물이 소량 남았다. 저자에게 답례하도록 하지."

울트의 몸을 상하게 만들었던 것이 세계수의 저주였던 만큼, 세계수의 눈물은 울트가 몸을 회복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될 터다.

라멘타는 세계수의 눈물 외에도 자기 선에서 가능한 한 성의를 보이겠다고 말했다.

레이는 라멘타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고민하다 다른 것을 물었다.

"레시나의 처우는 어떻게 되지?"

"레시나가 어머니의 품에서 머무는 것은 불가능하다."

"..."

"하지만 마지막으로 단 한 번, 어머니의 품에 동행하도록 하겠다."

마지막이나마 레시나가 고향 땅을 잠시 밟을 수 있도록 조치해주겠다는 소리였다.

이리 되면 울트와 레시나는 라멘타와 함께 세계수의 영역으로 향해야 했다.

레이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레멘타를 쳐다봤다.

"혹시 이상한 생각 품고 있는 건 아니지?"

"아니다. 신뢰할 수 없다면 답례만 받아갈 대리인을 어머니의 품으로 보내도 된다."

"뭐... 일단 본인들 의사를 한 번 물어봐야겠네."

레이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울트와 레시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울트와 레시나의 사정을 알게 되었을 때만 해도 레이는 저 둘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그럼에도 레이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그 노력 덕분에 울트와 레시나는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었다.

레이는 굳이 뿌듯한 감정을 감추려 노력하지 않고 솔직하게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

스페라 프리슬란.

황도에 머물던 그녀도 원정군의 승전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원정군의 승전 소식에 이어 레이 또한 무사히 생환했음을 알게 된 스페라는 크게 안도한 후 작게 웃었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스페라는 레이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그리 중얼거렸다.

깡촌에서 올라와 우연찮게 증조부의 눈에 띈 또래의 소년.

그 소년이, 이제는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영웅이 되어 황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제국의 역사에 새겨질 가장 위대한 영웅과의 첫만남을 추억하며 미소 짓던 스페라는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

원정군의 출전 직후 스페라는 알레시아를 한 번 만났었다.

그때 알레시아는 스페라 앞에서 대놓고 배를 내밀며... 대단히 꼴받는 표정으로 히죽였었다.

자기가 이겼다는 듯 기세등등하게 까불어댔던 알레시아를 떠올린 스페라가 신음을 삼켰다.

짧은 인생을 돌이켜봐도 그날과 같은 굴욕을 느낀 경험이 더 있었는지 스페라는 의문이었다.

"근데... 레이의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사생아로 취급될 확률이 높을 텐데..."

황제가 만약 레이를 황실의 일원으로 들인다면 거의 무조건이었다.

물론 스페라는 굳이 그런 이야기를 알레시아 앞에서 떠들어댈만큼 성격이 나쁘지는 않았다.

"..."

뭐, 어쨌든.

스페라는 황도로 개선할 레이를 맞이할 생각에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에른스트에게 호출된 스페라는 충격적인 지시를 들어야 했다.

"네가 다녀와야 할 곳이 있구나."

"...네?"

"오늘 안에 출발하거라."

에른스트는 소화하는데 두 달은 걸릴 일정을 갑작스레 들이밀었다.

본래라면 에른스트의 명령에 순응했을 스페라라도 이번만큼은 '왜 하필 지금?'이라는 의문을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

개선식이 코앞이었다. 웬만하면 개선식을 보고 레이와 인사라도 한 번 나누고 일정을 이행하고 싶었다.

"그... 증조부님..."

스페라는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된 호칭을 입에 담으며 에른스트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에른스트는 스페라를 마주보지도 않고 강경하게 지시했다.

"다녀오거라."

에른스트의 목소리는 차갑게 굳어 있었다.

스페라는 에른스트가 이리 강경하게 나오는 연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으나,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평소답지 않게 애교도 들어주지 않는 에른스트를 뒤로 하며 스페라는 풀이 죽은 얼굴로 집무실을 나갔다.

에른스트는 스페라가 떠나고 나서도 한참을 더 자리에 앉아있다가 서랍을 열었다.

황실의 드래곤하트가 서랍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었다.

"네가...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 믿겠다."

최초의 맹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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