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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342화 (342/446)

342화

알렉산데르는 전황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했다.

타격대가 나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너머에서 거대한 힘의 파동이 울려 퍼졌다.

그 거대한 힘을 내뿜는 존재의 정체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원정군의 최종 타격 목표이자 타락한 드래곤인 프레체스.

프레체스는 본래 혼종으로 개화하기 위해 머금었던 변질된 권능까지 토해내며 마지막까지 발악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저 너머에서 날뛰어대던 힘의 파동이 마침내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며 알렉산데르를 위시한 타격대를 밀어내려던 마물과 마족들이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물러나는 건가."

프레체스가 제거되었다고 해도 이곳은 여전히 마경이었다.

프레체스야 어찌 되었든 대륙의 정예병들이 마경에 발을 들였을 때 악착같이 달려들어 큰 피해를 입히는 게 마경의 세력들에게는 장기적으로 큰 이득이었다.

하지만 마경의 마족들은 단일 세력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

마경의 확장이 실패한 시점에서, 굳이 대국적인 판단 따위를 운운하며 먼저 나서서 자기 세력을 소모할 필요가 사라졌다.

원정군이 프레체스를 제거하고도 벌집을 쑤시듯 마경을 헤집고 다니지 않는다면 더는 대규모 공세를 취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

알렉산데르는 거대한 힘의 파동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프레체스의 발악은 알렉산데르를 비롯한 타격대의 예상보다 훨씬 거셌다.

과연 저곳으로 향한 인원이 프레체스가 자멸에 이를 때까지 무사히 버텨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화로 기록될 전쟁이... 끝났군."

"..."

알렉산데르와 함께 적들의 공세를 막아내던 대원들은 그제야 이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깨닫고 턱에 힘을 주었다.

그들은 전장 한가운데서 멍청하게 주저앉거나 괴성을 지르는 실책을 저지르진 않았으나, 그럼에도 잠깐 눈시울을 붉혔다.

이 전쟁을 승리하리라 기대했던 이들은 거의 없었다. 어떻게 잘 패배해야 할까 고민했던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허나 이 원정을 추진했던 영웅들은 자신이 옳았고 너희가 틀렸음을 결국 증명해내었다.

"사상자 보고하라."

알렉산데르는 적들의 공세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상자들을 먼저 확인했다.

이후 간단히 무장을 정비하며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판단을 내리려 했으나,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프레체스를 제거하기 위해 나뉘었던 타격대가 알렉산데르의 시야 끝자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다들 몰골이 엉망이었지만 목숨만은 간신히 붙어있는 듯했다.

그렇게 생존한 타격대가 전부 결집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원정군의 지원 병력 또한 타격대와 합류했다.

알렉산데르는 지원 병력을 이끌고 온 지휘관에게 지친 기색을 내보이면서도 웃음을 머금고 한마디 했다.

"목표한 바를 이루었으니, 그만 돌아가지."

알렉산데르의 짧은 선언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함성 소리를 알렉산데르가 적당히 제지했다.

아직은 방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곳은 마경이었고, 더군다나 원정군의 주력에 해당하는 타격대는 사망자는 적었으나 전력 손실이 상당했다.

알렉산데르, 안소니우스, 그리고 루나 정도를 제외하면 다들 제대로 된 전투 수행이 불가할 만큼 한계에 달해 있었다.

상황을 이해한 이들이 알렉산데르의 뜻에 따라 함성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희열을 감추지 못 하고 환히 웃었다.

알렉산데르를 선두로 한 타격대와 지원 병력은 빠르게 마경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임시 거점을 지키던 방위대와도 순차적으로 합류했다.

원정군은 물러나는 과정에서 적들의 산발적인 저항과 함정을 뚫어내야 했으나 큰 피해 없이 퇴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쪼개졌던 원정군이 하나로 규합될수록 잠시 사그라졌던 함성 또한 재차 크기를 키워 갔다.

승리를 거두고 물러나는 원정군은 함성을 내지르며 레이의 연설을 상기했다.

우리는 굴욕의 역사에 종말을 고했고, 마경이 막연하게 두려워해야만 하는 지옥이 아님을 증명해 냈다.

바로 우리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영속될 새로운 신화를 함께 이룩했음을 자각하며, 모두 함께 함성을 내질렀다.

원정군의 함성을 들으며 레이는 바람 정령에게 몸을 맡긴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살짝 숨이 가빠 보이는 레이에게 알렉산데르가 문득 물었다.

"마지막 적은 어떠했소?"

"마지막 적이라..."

프레체스의 최후를 떠올린 레이가 담담하게 답했다.

"안타까웠지."

"..."

알렉산데르가 잠시 레이의 답을 곱씹어보다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나, 다른 이들 앞에서는 표현을 달리하는 게 좋겠소."

"염두에 두지."

레이가 씁쓸히 웃으며 알렉산데르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저 너머에 마경과 대륙의 경계선이 보이고 있었다.

*

"승전입니다."

아도이아는 문서로 올린 보고서의 내용을 구두로 반복했다.

원정군의 사상자 숫자도 끔찍한 수준이었으나 그럼에도 결국 프레체스를 제거하는 데 성공, 승전했다.

더욱 긍정적인 점은 원정군의 최상위 전력이 거의 다 생존했다는 것이었다.

대륙을 지탱해줄 준 로드 급 이상의 인재를 거의 잃지 않았다는 건 굉장한 희소식이었다.

워낙 의미 깊은 승전인지라 전쟁에 참여했던 인물들과 나중에 정치적으로 좀 껄끄러워지는 경우가 분명 생기기는 하겠지만, 그런 문제를 굳이 지금 우선해서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제국의 소드마스터, 에른스트는 침묵한 채 아도이아의 보고를 듣다 짧게 물었다.

"제국의 수호자는?"

"...생환했습니다."

레이가 생환했다는 정보는 에른스트에게 전달된 문서에도 담겨 있었으며 조금 전에 아도이아가 구두로 보고한 내용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에른스트는 레이에 관해 다시 물었고, 아도이아는 했던 보고를 반복했다.

비록 온몸이 망가져서 검조차 제대로 쥘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해도 레이는 결국 살아 돌아왔다.

아도이아는, 레이가 생환했다는 보고를 전해 받은 에른스트의 표정이 너무나 싸늘하게 굳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도이아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단지 자기 역할을 끝낸 후 예를 갖추고 물러났다.

그때까지도 에른스트는 침묵한 채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원정군은 큰 피해 없이 마경에서 물러나는 데 성공했다.

그 직후 본격적으로 대륙 각지에 원정군의 승전 소식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위대한 승리를 거둔 원정군의 1차 개선식은 제국 남부의 교황청 인근에서 이루어졌다.

환영 인파가 아주 드글드글하게 모여있는 가운데.

레이는 군단의 선두를 알렉산데르에게 양보한 후 후방으로 가 모습을 감추려 했다.

"개선식을 앞두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오?"

레이가 물러서기 전에 알렉산데르가 묻자, 레이는 가볍게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굳이 1차 개선식에서 누가 먼저 머리를 들이미느냐 같은 것으로 기 싸움을 할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원정이 진행되는 내내 알렉산데르가 양보해준 것이 많았다.

특히, 프레체스와 마지막 결전 때 알렉산데르는 밀려오는 잡병들을 막아내는 역할을 자처했다.

지휘관으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으나 이는 가장 위대한 업적을 양보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레체스의 저항이 상상 이상으로 거세서 프레체스에게 향한 타격대가 공멸할 뻔하긴 했지만 말이다.

'뭐, 알렉산데르의 진정한 속내가 무엇이었든 간에...'

마경으로의 원정이 진행되는 동안 알렉산데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웅다웠다.

그러니 개선식의 주인공을 알렉산데르에게 온전히 양보해주는 것쯤은 생색내기도 되지 않았다.

레이가 거리를 벌리려고 하자 알렉산데르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나를 견제하고자 하지 않았소?"

"그건 그렇지만 당신과 척을 지고 싶은 것은 아닌지라. 받은 만큼 존중은 해드려야지."

레이가 반쯤 농담 삼아 그리 답하고는 지친 기색을 내보이며 군단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안소니우스도 정면에 나서려 하지는 않았기에 알렉산데르가 군단의 가장 앞에 섰다.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원정군을 향해 이내 땅이 울릴 만큼 쩌렁쩌렁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알렉산데르는 군단의 지휘관으로서 환영 인파의 환호를 한몸에 받으며 피식 웃었다.

"흠, 이것도 나쁘지는 않군."

알렉산데르가 본래 이루고자 했던 야망은 과거보다 더욱 이루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알렉산데르는 자신의 고향을 지켜냈으며, 주인공이 되지는 못 했다고 하나 새롭게 탄생한 가장 위대한 신화의 한 축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대륙이 망각한 진짜 신화의 적들을 곱씹을 기회 또한 얻게 되었다.

알렉산데르는 만족스럽고도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채 환호 속에서 개선했다.

*

원정군이 제국 남부에 개선한 후.

가장 먼저 부상자의 치료와 전사자의 명단이 작성이 시작되었다.

승전했다고는 하나 원정군의 희생 또한 많이 따랐다.

전장이 전장이었던 만큼 전사자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승전의 기쁨에 취했던 원정군은 마경에서 돌아오지 못 한 이들을 떠올리며 잠시 음울함에 잠겼다.

마경에서 돌아오지 못 한 전사자의 명단은 가장 거대한 비석에 새겨져 교황청 옆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이 죽은 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예우였다.

황도에 집결해서 마경으로 진군했던 원정군은 전사자의 명단이 작성된 이후 황도로 돌아가 두 번째 개선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남부의 성직자들도 제국민 신분인 만큼 원칙적으로는 황도로 동행해야 했으나, 알렉산데르는 그다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알렉산데르의 선택이야 어찌 되었든.

레이는 황도로 돌아가기 전에 끝마쳐야 할 일이 있었다.

"고모는 안 계신가..."

레이가 원정을 떠날 때만 해도 세리아는 교황청에 있었다.

하지만 원정이 진행되는 도중 악마 숭배자들의 습격을 받은 알슈테인 공작가가 지원을 요청했고, 세리아는 그 요청에 응해 공작가로 향했었다.

교황청은 세리아에게 저주를 상쇄해줄 성물을 제작해주었으나 이제는 그 성물도 더는 필요 없을 터다.

저주를 새겨넣은 아룬델이 죽었으니 말이다.

레이는 세리아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작성한 후, 팔찌를 매만지며 울트와 약속했던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에는 600년 전 하르시아와 함께했던 동료이자 영락한 영웅인 레시나가 울트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원정을 떠나기 전, 울트는 레시나가 남부에 머물 수 있도록 조치해달라고 레이에게 부탁했었다.

만약 마경 원정에 성공한다면 최대한 빠르게 레시나의 차도를 확인하고 무언가 조치가 필요하다면 바로 취하기 위해서였다.

레이가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세계수의 수호자인 라멘타와 아퀴타스도 울트와 함께 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

레이는 울트에게 몸을 기댄 채 멍청하게 손가락을 빨고 있는 레시나를 보았다.

레시나를 괴롭히던 세계수의 저주는 사라졌다. 선조가 이루지 못 한 비원을, 울트는 결국 이뤄냈다.

그러나 이미 잃어버린 것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레시나는 죽음을 앞두고 삶을 되찾았으나, 이미 자아를 잃고 백지만 남아 버렸다.

저주를 풀어낸 것만으로는 레시나가 맞이한 비극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

그리고, 찾아오지 않으리라 여겼던 기적을 대비하여 리실로테가 남긴 안배가 레이에게 있었다.

레이는 레시나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손을 붙잡았다.

잠시 레시나의 눈동자를 마주 본 레이가 자신의 팔찌를 레시나의 팔목에 채워주었다.

최초의 맹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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