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41화 (341/446)

341화

프레체스의 마지막 인형이 양단되었다.

억지로 이어붙여 수백 년의 세월을 유지시켰던 첫 번째 혼종의 육편이 마침내 바스러졌다.

대륙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그 추악한 과거의 유산이 소멸하며 변질된 권능을 제어해낼 수 있는 모든 매개체가 사라졌다.

스스슥-

일대에 가득했던 어둠이 서서히 증발하기 시작했다.

프레체스의 본신을 가리고 있던 어둠 또한 점차 사그라들었다.

프레체스는 마지막 발악을 이어가던 중 자신의 육신을 유지하던 드래곤하트마저 소모했었다.

이제 썩어 문드러진 살덩어리만 남아버린 프레체스의 육신은 어둠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게 증오에 잠식되어 대륙을 집어삼키려 했던 타락한 드래곤의 말로였다.

촤악-!

하이템플러답게 빠르게 신체를 회복한 안소니우스가 성검을 휘둘러 이미 옅어진 어둠을 떨쳐냈다.

어둠이 벗겨진 구덩이를 향해 다가가자, 끔찍한 악취와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는 프레체스의 육신이 구덩이 속에서 드러났다.

안소니우스는 아직 광휘를 잃지 않은 성검을 프레체스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프레체스를 향하던 성검의 끝을 레이가 손을 뻗어 막아섰다.

"..."

잠시 갈등한 안소니우스가 성검을 아래로 내리며 한발 물러서 주었다.

프레체스는 과거에 이미 곪아터져 사라져 버린 눈동자를 대신해 칙칙한 안광을 만들어내 레이를 보았다.

"너는..."

프레체스가 꺾여있는 목을 더욱 비틀어 레이를 향하게 하며 물었다.

"나를 증오하느냐?"

거칠게 갈라져 나간 목소리로 그리 물어오는 프레체스를 향해 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당신을 증오하지 않아."

"마지막까지 이리 심술을 부린 나를, 정녕 증오하지 않느냐?"

"그래, 나는 당신을 증오하지 않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레이가 착잡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당신의 삶을 동정해."

"...그렇군."

프레체스가 처음에 레이를 동정했듯, 레이 또한 프레체스를 동정했다.

그 얄팍했던 유대를 마지막 순간에 곱씹어 본 프레체스는 무너지고 있는 육신을 천천히 웅크렸다.

"너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다."

"..."

"그 짧은 시간이나마 네가 행복하기를 기원하겠다."

"그래, 그만 당신도... 그 오래된 고통에서 벗어나... 안식을 취하길 바라."

"...네게, 감사를 전한다."

칙칙했던 안광마저 사그라들고, 얼마 안 가 프레체스의 육신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주변에 아지랑이치던 어둠도 프레체스와 함께 끝을 맞이했다.

대륙을 침식하던 변질된 권능은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경의 확장은 저지되었고 대륙의 하늘은 앞으로도 푸르게 지상을 비추게 되었다.

세계수가 보여주었던 그 붉은 하늘로부터, 결국 대륙은 구원받게 되었다.

"끝이... 났구나."

레이는 자신의 역할이 이제야 완전히 끝났음을 느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허탈했고, 후련했으며, 또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대륙의 미래를 지켜낸 레이의 삶은 이제 끝자락에 다다라 있었다.

한계를 넘어서 혹사당한 온몸의 기관들은 신성력을 쏟아부어도 더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 한 채 고통만을 호소하고 있었다.

"괜찮아..."

레이는 구덩이로부터 몸을 돌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더 이상 검을 쥘 수도 없을 만큼 육신이 망가져 버렸으나, 그럼에도 괜찮았다.

모든 역할을 끝낸 레이는 이제 더는 투쟁하지 않아도 되었다. 발악하며 몸부림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레이는, 다만 몇 달 만이라도 멀쩡한 척 몸을 일으켜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다 괜찮으니까..."

레이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렇기에 레이는 더더욱 그 남은 시간을 아름답게 채워넣으리라고 다짐했다.

레이가 떠나고도 이 세상을 살아갈 이들이 모두 함께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추억할 수 있는...

그런 행복한 기억을 남겨두고 싶다는 게, 레이가 이루고자 하는 마지막 갈망이자 염원이었다.

레이는 눈동자가 반쯤 풀린 채 미래를 꿈꾸며 비틀거렸다.

그때 라멘타가 경고를 전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곳은 마경의 심부였다.

현재 와해되고 있을 마경의 병력이 대단히 위협적이지는 않겠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계선에 들어선 루나가 어떤 초월적인 존재와 접촉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츠즉-

어둠이 사라진 구덩이 근처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술식의 주축이 되었던 프레체스가 소멸하며 루나가 현실 차원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무사하면 다행이지만, 만약 루나가 악신과 접촉이라도 했다면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다.

라멘타가 일그러지는 공간을 주시하고 있자 안소니우스 또한 상황을 이해하고 성검을 다시 쥐었다.

레이는 굳이 두 사람을 말리지는 않았다.

그 대신 홀로 루나를 마중하기 위해 일그러지는 공간으로 다가갔다.

*

"..."

검게 물든 영역 안에서.

루나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약간의 이질감을 느끼고 긴장을 다시 끌어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약간의 이질감 외에 무언가를 명확히 감지하기는 힘들었다.

그리 방황하고 있는 루나의 귓가에 여인이 다시 한번 속삭였다.

"레아를 죽여."

"..."

여인의 목소리는 루나에게 닿지 않았다.

사실 여인 또한 자신의 목소리가 루나에게 닿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여인은 결과에 해당하는 존재였고, 그렇기에 원인이 되었던 사건의 큰 줄기에는 결코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아무리 여인이 과거의 시간대까지 간섭 가능한 초월적인 존재라 해도 자신이 태어나게 된 인과를 뒤트는 것만은 불가능했다.

"..."

여인의 속삭임은 부질없이 흩어졌고, 루나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속삭임을 멈춘 여인은 가만히 루나를 바라보다 처연하게 웃었다.

"...그날의 선택을 나는 영원히 후회할 거야."

후회하고 괴로워하며 언제까지고 고통받을 것이다.

가슴을 쥐어뜯고 눈물을 흘리며 원망을 토해낼 것이다.

그리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를 제대로 미워하지도 못 하고 그 힘겨운 시간을 견뎌내려 하겠지.

결국 그게 우리가 맞이해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여인은 그를 사랑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해피엔딩을 선물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마주 보고 있다.

"설령, 내가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나야만 하더라도."

츠즉-

프레체스가 소멸하며 루나가 서 있던 어둠 속에 실금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루나는 실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여인은 루나와 함께 걸으며 홀로 속삭였다.

"운명을 바꿀 수는 없어. 하지만..."

너무 늦어지기 전에.

그가 사랑했던 이들이 다들 먼저 떠나가고 홀로 남아버리기 전에.

"내가 이곳에 닿을 수 있도록."

그 염원을 담아, 여인은 루나에게 마지막 선물을 건넸다.

어둠 속을 흐르던 별빛이 여인의 인도에 따라 루나에게 향한다.

루나의 심장을 회전하던 4개의 서클 위로, 반투명한 별빛의 기류가 찰나의 순간 고리의 형태를 이루었다.

"...!"

무언가 변화를 감지한 루나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이미 그때는 검게 물든 영역이 산산이 깨져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경계선에서 벗어난 루나는 무사히 현실의 차원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루나는 검게 물든 영역에서 벗어나기 직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의아했으나, 완전히 엉망이 된 현실의 전장을 보고 더욱 당황했다.

"레이...!!"

"루나."

다급히 레이의 이름부터 외치는 루나를, 레이가 먼저 다가와서 안아주었다.

루나는 레이의 몸을 살피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서려 했으나 레이는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루나는 레이를 마주 안고서 레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

루나의 온기를 느끼며 레이는 울먹임을 억지로 삼켰다.

레이는 루나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나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안겼다.

그게 참 미안해서 자꾸만 번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아내며, 레이가 루나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만... 돌아가자."

그만 돌아가서, 이제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의 행복만을 위해 남은 삶을 보낼 것이다.

레이의 손아귀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루나 또한 마주 속삭였다.

"...그래요, 레이. 돌아가요. 모든 짐을 내려놓고, 그만 돌아가요."

역경과 고난으로 점철되었던 처참한 우리의 이야기가 결말만은 행복하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함께 돌아가요, 레이."

*

"우리가 이겼군."

울트가 뭉개진 왼쪽 팔을 지혈하며 중얼거렸다.

함께 싸웠던 아퀴타스 또한 몸이 멀쩡하지는 않았다.

살아있기는 했지만 안쪽의 장기가 많이 손상되데다 악신의 기운에 침식당하기까지 하여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오늘 입은 중상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세계수의 품에서 최소 수십 년은 치료에 전념해야 할 터였다.

그럼에도 울트와 아퀴타스는 결국 아룬델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프레체스가 공격 당해 마경 확장이 저지될 위기에 처하자 다급해진 아룬델이 무리하게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아룬델이 철저하게 자신의 장점을 활용해 전투를 이어갔다면 머리가 박살난 건 울트와 아퀴타스가 되었을 것이다.

울트는 물리적으로 완전히 뭉개버린 아룬델의 사체를 바라보다, 기이한 감각을 느끼고 자기 손을 돌아보았다.

"...!"

게네시스.

그 검게 물든 썩은 나뭇가지로부터 부정한 기운이 점차 빠져나가고 있었다.

"게네시스의 저주가... 약해지고 있어..."

프레체스의 완전한 소멸로 인해 게네시스에 가해지던 부하 또한 감소하기 시작했다.

울트는 자신이 평생 동안 쫓았던 비원이 이루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퀴타스는 오열하는 울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때, 레이가 향했던 곳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눈을 돌린 울트는 엉망이 된 레이, 안소니우스, 라멘타, 그리고 루나가 다가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살아있었군.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같은 말을 입에 담았다.

울트는 저주가 약해져 가는 게네시스를 말없이 레이에게 보여주고는, 레이와 짧게 포옹했다.

"약속은, 지키겠어."

레이는 울트를 구하고 울트의 비원을 이뤄주었다.

울트는 레이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남은 삶을 당신에게 헌신하리란 맹세를 다시 한번 반복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합류를 마친 이들은 마물과 마족들의 공세를 막아서던 알렉산데르에게 움직이기 전에 짧게 정비를 진행했다.

울트는 상처의 지혈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한 후 걸음을 옮기려다 레이가 손에 쥐고 있는 칼자루를 보고 의아함을 표했다.

"다 부서진 검을 왜 굳이...?"

검신이 박살 나서 칼자루만 남은 검을 왜 버리지 않고 지니고 있단 말인가.

울트가 그런 뜻을 담아 묻자 레이가 피식 웃었다.

"이름을 붙이려면 그래도 칼자루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레이는 그리 답하고는 과거에 제플린과 나눴던 대화를 짧게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들은 울트는 레이와 마찬가지로 웃음을 머금으며 다시 물었다.

"타락한 드래곤을 베어낸 검에 붙일 이름이라. 생각해둔 이름이라도 있는 건가?"

"글쎄. 제플린의 센스라면 용살검 같은 걸 가져다 붙일 것 같은데."

"구리군."

"그 작자 네이밍 센스가 영 별로기는 하지."

레이와 울트가 함께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최초의 맹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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