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레이가 입술을 꽉 깨문 채 호흡을 골랐다.
초월적인 존재와 소통할 수 있는 그 영역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건 아무리 루나라고 해도 위험했다.
레이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지금 당장 레이가 루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킨 레이가 구덩이를 반구 형태로 덮고 있는 어둠을 향해 눈을 돌렸다.
프레체스로부터 뻗어나오는 어둠의 기류는 약해지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히 강맹해지기 시작했다.
라멘타가 그 광경을 보며 의아해했다.
"...통제할 수 없을 텐데."
프레체스가 지닌 변질된 권능의 융합체는 애초에 필멸자의 육신으로 제대로 다룰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악신들이 협력하여 축복을 내린 육신 정도는 되어야 일백 년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헌데 프레체스는, 썩어가는 육신에 남아 있는 변질된 권능을 모조리 토해내려는 것처럼 뿜어대고 있었다.
지금 상황을 보고 당장 예상되는 경우의 수는 '자폭' 하나였다.
설령 다른 의도가 있다고 해도 프레체스가 자멸하기 직전임은 확실했다.
통제도 제대로 안 되는 위험한 힘을 막무가내로 휘두르다 자멸할 적을 정면에서 상대해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라멘타는 일단 바람을 일으켜 레이와 안소니우스와 함께 뒤로 물러서려 했다.
헌데 그때, 미친듯이 회오리치며 일대를 긁어대던 변질된 권능이 점점 더 응축되기 시작했다.
"...?"
물러서려던 레이, 안소니우스, 그리고 라멘타는 동시에 의아함을 품었다.
바로 직전까지는 누가 와도 통제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변질된 권능이 하나로 응축되더니, 다시 어둠 속으로 잔잔히 가라앉았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
레아와 안소니우스가 침묵한 채 무기를 매만졌고 라멘타는 서클에 남은 마나의 잔량을 확인했다.
그리고, 프레체스가 모습을 감추고 있는 어둠 속에서 두 발로 선 무언가가 비틀거리며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신장이 3 미터는 되어보이는 그 괴생물체로부터, 쇠를 갈아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경에 기어들어와... 나의 비원을 망가뜨린 너희 모두를... 죽이겠다."
"..."
레이는 프레체스가 움직이고 있는, 육편을 이어붙여 만들어낸 '인형'을 바라보았다.
이전에 황도에서 마주쳤던 것에 비해서 지금 모습을 드러낸 프레체스의 마지막 인형은 참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부패한 사체들을 이곳저곳에서 주워서 억지로 기워 붙인 모양새였다.
정말 불쾌할 만큼 혐오스러운 모습이었으나, 레이는 그 존재가 자아내는 위압감에서 뚜렷한 기시감을 느꼈다.
워낙 독특한 위압감인지라 답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첫 번째 혼종이 남긴 육편에다 이것저것 뒤섞어 놨나 보네."
"...!"
첫 번째 혼종의 살덩이를 사용했다면 변질된 권능 또한 다뤄낼 수 있을 터다.
하지만 이미 영혼마저 소멸한 첫 번째 혼종의 육편을 이용한 것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이를 방증하듯 프레체스의 마지막 인형은 벌써부터 붕괴하려 하고 있었다.
저 인형을 움직이려고 변질된 권능을 마구잡이로 뽑아낸 프레체스의 섞어버린 육신 또한,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질 것이다.
"정말이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추잡하고 한심한 분풀이였다.
하지만, 한시적이나마 저 존재의 강대함은 궤를 달리했다.
프레체스는 자신이 만들어낸 마지막 인형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입이라 생각되는 기관을 달싹였다.
"나와 함께 가는 거다."
콰아아앙!!!
프레체스가 삽시간에 가속했고, 안소니우스가 그 앞을 막아섰다.
변질된 권능이 날카롭게 휘몰아치고 있는 프레체스의 칼날이 성검을 찍어눌렀다.
안소니우스는 제자리서 프레체스의 일격을 견뎌냈다가, 성검의 광휘마저 변질된 권능에 침식되어 빛을 잃어가는 꼴을 보고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성검만은 조금이라도 다를 줄 알았는데 침식을 제대로 막아낼 수 없는 건 똑같았다.
상성이 불리해도 정말 너무 불리했다.
콰앙!!!
억지로 프레체스의 칼날을 쳐낸 안소니우스가 아직 기능하는 성물을 동시에 활성화시켰다.
프레체스는 틈을 주지 않고 안소니우스를 베어내려 했으나, 어디선가 쏘아진 황금색 창이 프레체스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가가강!!!
인근에 배치되어 있던 성물들이 안소니우스가 프레체스에게 기습적으로 새겨넣은 성흔에 반응해 연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프레체스의 주위에 박혀든 성물들은 서로 공명해 신성 결계를 생성했다.
신성 결계가 벌어준 찰나의 시간 동안 안소니우스는 무장을 재정비했다.
신성력이 푸르게 타오르는 지면 위에서 반투명한 갑주를 뒤집어 쓴 안소니우스가 빛의 사슬을 절그럭거리며 나아가 프레체스와 다시 충돌했다.
쩌엉!!!!
축복을 두른 성검이 둔기처럼 휘둘러져 프레체스를 가격했다.
육중한 광휘로 무장한 안소니우스가 전력을 다해 성검을 휘두를 때마다 지면이 흔들렸다.
중첩된 신성 결계와 무한히 솟아나는 빛의 사슬은 프레체스의 움직임을 억제해 무방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프레체스로부터 흘러나온 변질된 권능에 의해 신성 결계는 금방 무너져 내렸다.
콰득!!
신성 결계가 무너지자마자 프레체스는 커다란 손아귀를 뻗어 어렵지 않게 성검을 막아 세웠다.
그리고는 안소니우스로부터 휘몰아치는 빛의 사슬까지 단번에 끊어내더니 신경질적으로 안소니우스를 걷어찼다.
뻐억!!!!!
"...!!"
발길질의 충격을 상쇄 못 한 안소니우스가 저 멀리까지 튕겨져나갔다.
쿠웅!!
조금 전까지 흐릿하게만 보였던 절벽에 박혀들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춘 안소니우스가 핏물을 토했다.
거대한 성벽을 통째로 뒤덮고도 남을 방어 결계가 중첩된 반투명한 갑주가 벌써 금이 가서 바스러지려 했다.
연거푸 피를 토해낸 안소니우스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헛웃음을 터뜨렸다.
"후우..."
안소니우스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정교한 근접전이 그의 특기는 아니라고 해도 성검을 쥔 안소니우스의 전력은 분명 로드 급에 달했다.
하지만 정말로, 상성이 불리해도 너무 불리했다.
신성력을 기반으로 한 모든 힘이 프레체스 앞에서 반감되고 있었다.
한편, 프레체스는 안소니우스를 떨쳐내자마자 뒤에서 안소니우스를 지원하던 라멘타부터 먼저 처리하려 했다.
라멘타는 미약하게나마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지속된 연전으로 인해 라멘타는 서클의 마나가 거의 고갈난 상태였다.
남은 마나로도 잡병쯤은 쉽사리 처리할 수 있겠지만, 변질된 권능을 새까맣게 응축해서 휘두르는 프레체스에게 대항하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발이라도 묶으려면 고위 마법을 난사해야 했는데 이제는 그럴 마나가 남아있지 않았다.
"..."
프레체스가 급격히 거리를 좁혀왔다.
라멘타는 냉정하게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고선, 프레체스에게 되도록 큰 피해를 입힐 방법을 계산했다.
하지만 프레체스가 라멘타에게 다다르기 전에 레이가 앞을 막아섰다.
쩌억!!!
레이는 밀려나지 않았다.
수백 년 동안 변질되어 융합된 초월자들의 권능이든 다른 대단한 무엇이든.
공간검만큼은 그 어떤 종류의 힘에도 잡아먹히지 않고 빛을 발할 수 있었다.
레이로부터 번져나오는 냉기가 프레체스로부터 번져나오는 변질된 권능을 역으로 억눌렀다.
레이는 검을 맞댄 채, 프레체스가 조종하는 인형을 뒤덮고 있는 부서진 무구들의 조각 중 눈에 익은 것들을 다시 보았다.
그 조악하게 이어진 듯한 무구들의 조각 중에는...
레이가 환영 속에서 보았던 하르시아의 무구들 또한 일부 뒤섞여 있었다.
"하..."
육신과 혼이 소멸하고도 남아있던, 그의 유품이라 칭해도 좋을 것들이 눈앞에 있었다.
하르시아가 이곳에 왔었다는 뚜렷한 증거를 바라보며 레이는 불쾌함보다는 안타까움을 품었다.
그 안타까움은 하르시아를 향한 감정이기도 했고, 또한 이곳에 있는 모두를 향한 감정이기도 했다.
카드드득!!!
프레체스가 분노를 토로하듯 레이를 향해 거칠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우악스럽게 휘두르는 검조차 레이는 막아내기가 힘들었는데, 검을 맞부딪칠수록 프레체스의 움직임이 점차 정교해졌다.
프레체스는 새로운 인형에 익숙해지면서 점점 더 완벽하게 자신의 검술을 구현해냈고, 또한 감정을 실어 검을 휘둘렀다.
잃어버린 자의 증오가 레이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 증오의 소나기를 받아내며, 레이가 손에 쥔 두 자루의 검은 빛을 잃어갔다.
으드득!
전투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이 꺾인 레이가 휘청이며 뒷걸음질 쳤다.
레이가 쥐고 있는 두 자루의 검에는 이미 검강이 벗겨져 나가고 한 줄기의 검기만이 간신히 남아 있었다.
억지로 몸을 쥐어짜서 검강을 생성해보려 해도 더는 체내의 마나가 제대로 흐르지 않았다.
"..."
레이는 자신이 정말 한계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심장에 위치한 코어와 서클은 여전히 강맹하게 회전하며 힘을 쏟아낼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육체가 더는 뒤를 받쳐주지 못했다.
이미 오랜 혹사를 견뎌낸 육체는 더는 레이의 의지에 감응하지 않고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콰앙!!!
위기의 순간 다시 합류한 안소니우스가 무너지려는 레이 대신 공격을 받아내며 소리쳤다.
"물러나!!"
지금은 물러나는 게 맞았다.
프레체스가 다루는 인형은 강력했지만, 그 잠깐의 전투 사이 여기저기 망가지기 시작한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무식하게 정면에서 상대하는 건 포기하고 어떻게든 시간을 끌며 자멸을 유도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미 자기 죽음을 받아들인 채 끝없는 증오만을 연료 삼아 움직이는 프레체스가 과연 쉽사리 무너질까.
안소니우스를 방패 삼는다고 해도 프레체스에게 도망치는 게 가능할지 장담하기 힘들었다.
설령 도망치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
레이는 도망칠 수 없었다.
강력한 우군이자 미래에 중재자 역할을 해야하는 안소니우스를 여기서 잃을 수는 없었다.
루나도 어서 빨리 저 너머의 영역에서 구해내야 했고, 더군다나 루나가 현실로 귀환했을 때 프레체스에게 공격받을 위험을 남겨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레이는 도망칠 수 없었고, 이 마지막 전투를 이겨내야만 했다.
"..."
프레체스는 지키고자 했던 모든 걸 잃었기에 필사적이었고, 레이는 지켜야만 하는 존재가 있었기에 검을 다시 쥐었다.
하지만 의지만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이미 한계에 달한 레이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얼마 없었다.
'내게... 남은 건... 그걸... 쓴다면...'
이 전투를 이겨낼 수는 있겠지만.
안 된다.
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선택은 할 수 없었다.
레이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했다.
가서 동생 녀석 문제도 마저 해결해줘야 했고, 거짓말을 고백하고 사과도 해야 했고, 그리고 루나를... 루나의 마음을 단 한 번이라도 돌리기 위해 노력해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설령 홀로 걸을 수도 일어날 수도 없는 불구가 되어서라도 살아서 돌아가야 했다.
푸욱!
과거에 황제에게 받았던 단검을, 레이가 심장에 찔러넣었다.
단검에 응축되어 있던 신성력이 피에 반응해 심장에서부터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한계에 이른 레이의 육체에 이 단검은 회복제가 아닌 일시적인 각성제 역할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상관 없었다. 어차피 이게 레이의 마지막 전투였다.
코어와 서클에서 휘몰아치던 마나가 일시적으로 회복된 육체를 타고 흐르며 거칠게 요동쳤다.
레이는 무너져내리는 육신의 비명을 들으며 몸에 가둔 마나를 다시 한 번 증폭시켰다.
카드득!!!
안소니우스를 짓이기려던 프레체스의 검격을 레이가 막아냈다.
레이의 움직임이 뚝뚝 끊겨나가기 시작했다.
갈림길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