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잠시 갈무리되었던 적의가 서로를 향한다.
프레체스가 몸을 숨긴 어둠 속에서부터 강대한 기운이 번져 나와 주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항시 선두에 섰던 안소니우스가 일대를 뒤덮는 악의로부터 다른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성력을 발산했다.
신성 교단의 인물 중 당대 제일의 기재라 평가받는 하이템플러가 성검까지 활용해 증폭시킨 신성력이었다.
허나 자신 있게 신성력을 발산한 안소니우스는 곧장 눈살을 찌푸렸다.
"...!"
어둠 속에서 번져 나온 기운과 맞닿은 신성력이 급격히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번져 나온 기운은 신성력을 중화해서 약화시키고, 심지어 일부 변질시켜 자기 것으로 동화시켰다.
참으로 생소하고도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안소니우스가 미약하게 실소를 머금었다.
"하..."
안소니우스는 엘-람과 신성 교단에 맹목적인 신뢰 따위는 품고 있지 않았지만, 적어도 신성력의 절대성만큼은 신뢰했었다.
헌데 그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신뢰가 지금 이 순간 깨져나가고 있었다.
"확실히, 위험하군."
설명만 듣고 납득했던 혼종의 위험성을 직접 체감한 안소니우스가 신성력을 더욱 증폭시켰다.
지금 프레체스의 기운은 정제되지 않고 사방을 향해 마구잡이로 번져나가는 탓에 밀도가 낮았다.
상성이 말도 안 되게 나쁘기는 했지만, 증폭된 신성력으로 찍어누르면 타격대가 서 있는 공간 정도는 충분히 정화시킬 수 있었다.
라멘타까지 힘을 보태 일단 프레체스의 기운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한 후, 네 명의 타격대가 짧게 의견을 나누었다.
"정면에서 대항할 필요가 없다."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힘을 소모하도록 유도하면 되려나."
"시간이 여유롭지는 않지만, 일단 거리를 유지하며 추이를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군."
프레체스가 혼종으로 개화하는 데 이용하려 했던 힘을 소모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코앞까지 다가온 재앙을 막거나 미룰 수 있었다.
물론 여기까지 와서 불확실한 위험 요소를 남길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프레체스를 처단해야 했지만, 지금 당장은 발악하는 프레체스의 힘이 빠지길 기다리는 것도 괜찮은 선택처럼 보였다.
프레체스가 발악할 수 있는 수단이 이리 마구잡이로 변질된 권능을 토해내는 게 전부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럼 조금 물러나지."
합의를 마치고 일단 거리를 벌리려는 타격대를, 프레체스가 어둠 속에서 지켜보았다.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라도 프레체스는 자신의 오래된 비원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집과 증오밖에 남지 않은 드래곤은 어떻게든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찾아내고자 고뇌에 휩싸였다.
"..."
만약 힘의 소모를 최소화해서 마경을 침입한 이들을 몰아내거나 죽이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다시 수십 수백 년의 세월을 인고해서라도 부족한 힘을 채워 혼종으로의 부활을 이룰 수 있을까?
이 저주받은 땅에 묻혀 육신이 썩어가는 고통을 견뎌내는 것쯤은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부패해서 이미 기능을 거의 잃어버린 육신은...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될 것이다.
프레체스에게는, 더는 다른 무언가를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이대로 모든 게 끝나는 걸까.
"..."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설령 가망 없는 도박이라 할지라도, 프레체스는 마지막까지 발버둥치고자 했다.
츠즈즉!
프레체스는 비원이 좌절될 위기에 처했을 때를 대비해 구상했었던 최후의 발악을 시도했다.
전선이 너무나 빠르게 붕괴한 탓에 발악을 이어갈 제대로 된 준비도 갖추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프레체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츠즈즈즉!
썩어버린 육신이 무너져 내리는 것도 감수하며, 프레체스는 변질된 권능을 통제해서 술식을 짜내어 갔다.
무분별하게 휘몰아치던 변질된 권능이 프레체스의 의지에 따라 정제되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자 타격대 또한 이상을 알아차리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뭘 하려는 거지...?"
레이는 권능까지 사용했음에도 프레체스가 무엇을 노리는 지 바로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과연 수작을 부리려는 프레체스를 적극적으로 저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힘만 소모하도록 더욱 거리를 벌려야 하는가.
이 선택지를 두고 타격대가 잠깐 고민에 빠졌던 순간.
변질된 권능에 잠식되었던 일대의 공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드드득!
"...!"
도저히 경시하기 힘든 공간의 울림이 일대를 뒤덮었다.
아직까지 프레체스의 목적은 불분명했지만 가만히 방치할 수는 없었다.
라멘타가 9개의 서클을 전부 활성화시키며 마법을 전개해 폭격을 퍼부었고, 루나 또한 곧장 화력을 보탰다.
콰아아아아앙!!!!!
어쭙잖은 동산쯤은 단번에 평지로 만들어버릴 수준의 화력이 쏟아져 내리며 굉음이 울렸다.
프레체스가 몸을 숨기고 있던 구조물도 단번에 증발했다.
하지만 그 안에 가득했던 어둠이 두껍게 흐르며 쏟아지는 폭격을 막아냈다.
초월적인 존재들의 권능이 수백 년간 변질되고 뒤섞여서 탄생한 어둠의 기류는 아무리 화력을 쏟아내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어둠의 기류가 잠시 흐릿해졌다.
레이는 흐릿해진 어둠을 완전히 뚫어내기 위해 검 끝에 검강을 구체 형태로 집약시키려다, 실패했다.
"크읍...!"
갑작스레 올라온 구역질에 입에서 핏물을 흘린 레이가 잠시 비틀댔다.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대던 육신이 이제는 레이의 의지에 응해주지 못 하고 주저앉으려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라.'
레이는 억지로 호흡을 다잡으며 다시 검을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프레체스가 구현해낸 술식이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는 게 빨랐다.
츠즈즉!
프레체스와 타격대가 전투를 벌이던 일대의 공간이 통째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일그러지는 차원을 보고 그제야 답을 찾은 라멘타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건... 승천의 의식과 닮았군."
"뭐?"
레이가 당혹스러워하며 묻자, 루나와 짧게 의견을 나눈 라멘타가 설명을 덧붙였다.
"저 드래곤이 이 일대의 공간을 '경계선'과 가까운 영역으로 침범시키려 하고 있다."
승천의 의식과 유사했으나, 프레체스는 지금 초월적인 존재의 부름을 기다리지 않고 악신의 영향력이 닿는 영역까지 강제로 도약하려 하고 있었다.
이 오만하고 무리한 시도가 성공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실패해서 심각한 반동을 감당해야 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더군다나, 만약 성공한다고 해도 프레체스가 '원하는 것'을 얻기는 힘들었다.
경계선과 가까워져 프레체스가 별빛 너머의 존재인 악신들과 간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게 되더라도...
악신들이 프레체스를 한순간에 혼종으로 완성시켜주는 기적 따위를 내려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게 가능했으면 진즉 이 세상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레체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비원을 위해 발악하고자 했고, 그게 실패한다면 자신의 비원을 망가뜨린 이들에게 복수하고자 했다.
레이가 이를 악문 채 어둠 너머를 노려봤다.
"같이 죽자는 거냐...!"
이미 술식이 활성화되어 일대의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필멸자가 별빛 너머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은 찰나였으나, 그 짧은 시간마저도 필멸자에겐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악신 앞에 끌려가도 문제였고, 만약 프레체스와 타격대를 두고 서로 적대하는 초월적인 존재들이 동시에 영향력을 드러내며 별빛 너머에서 충돌한다면 그 여파만으로도 치명적이었다.
'당장 대처해야...!'
레이의 공간검이라면 프레체스의 술식이 완전히 활성화되기 전에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이고 강력한 술식을 도중에 무너뜨리면 그 후폭풍이 어떻게 돌아올지 예상이 안 갔다.
레이가 고민에 빠진 순간 루나가 허공을 움켜쥐었다.
트드득!
"?!"
이번에는 프레체스가 당혹했다.
프레체스가 전개하던 술식에 루나가 간섭하기 시작했다.
술식을 방해하는 것도 아니고, 술식의 구성을 보조해주듯 자연스레 개입하더니 서서히 술식을 변형하고 통제권을 강탈하려 하고 있었다.
"...!!!"
프레체스는 루나가 행하려는 말도 안 되는 기만을 감지하고 변질된 권능을 브레스처럼 토해내며 루나의 시도를 억누르려 했다.
라멘타 또한 상황을 인지하고 루나를 보조함과 동시에 변질된 권능으로 이루어진 브레스를 막아낼 장벽을 겹겹이 세웠다.
까드드드드득!!!!!!
일그러진 차원 속에서 거대한 힘이 맞부딪치며 여기저기 균열을 일으켰다.
이대로는 프레체스의 술식도 실패하겠지만, 이 단계에서 술식이 붕괴하면 모두가 위험했다.
"라멘타."
루나가 눈짓하자 라멘타가 얼마 남지 않은 서클의 마나를 대량으로 소모했다.
수백 개의 반투명한 푸른 구체가 허공에서 빚어지더니 뇌전을 쏟아내며 프레체스를 잠시 잠깐 찍어눌렀다.
콰가가강!!!
허나 대량의 마나를 소모했음에도 프레체스를 제압하거나 밀어낼 수는 없었다.
도리어 프레체스는 쏟아지는 뇌전을 변질된 권능으로 밀어낸 후 술식의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고개를 들었으나, 그때는 이미 검게 빛나는 무언가가 바로 앞에 다가와 있었다.
반물질.
일그러진 차원 속에서도 쌍소멸 반응을 일으킨 반물질이 강렬한 열기를 토해냈다.
화아아악!!!!
순수한 물리력은 마나를 다루는 상대에게 효율이 좋지 못했으나, 변질된 권능으로 모든 종류의 힘을 압도하던 프레체스에게는 도리어 꽤 효과적이었다.
갑작스레 발생한 강렬한 열기로 인해 프레체스가 술식의 통제권을 상실하고 어둠과 함께 밑으로 푹 꺼졌다.
기회를 잡은 루나는 프레체스가 다시 개입해오기 전에 자기 힘으로 술식을 마저 완성시켰다.
레이의 걱정대로, 이 술식은 중간에 무너뜨려 버리기엔 위험이 너무 컸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이 영역에서 무사히 내보내기 위해서는...
루나만은 이 영역에 남아 끝까지 술식을 유지하다가 잠시 '경계선'에 발을 들여야 했다.
레이는 뒤늦게 루나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채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루나!!!"
"걱정 마요. 나는 괜찮으니까, 조심해요, 레이."
"잠깐...!!"
레이가 루나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손끝이 미처 루나에게 닿기도 전에 시야가 일그러지더니 현실 차원으로 튕겨 나왔다.
"큭...!!"
비틀거리다 앞으로 넘어진 레이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안소니우스와 라멘타가 어지럼증을 이겨내며 균형을 잡는 모습이 보였다.
레이가 곧장 라멘타에게 소리쳤다.
"라멘타! 루나는?!"
"프레체스가 펼치려던 술식을 승천의 의식에 가까운 형태로 변형시켰다. 이전에 어머니의 품에서 네가 겪었던 것과 같다. 얼마 안 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냥 기다려야 해?"
"본래 술식의 주체가 되었던 존재를 제거한다면 경계선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짧아지긴 할 것이다."
콰아앙!!!
라멘타가 설명을 끝마침과 동시에 어둠이 자욱했던 장소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술식에 실패한데다 루나의 인도도 받지 못하고 일그러진 차원에서 벗어난 프레체스는 그에 상응하는 반동을 감당해야 했다.
어지간한 생명체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허나 레이도 안소니우스도 라멘타도, 상황을 그리 낙관하지 않았다.
"..."
프레체스는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조소했다.
비원을 이루기 위한 최후의 발악조차 허무하게 짓밟혔다.
프레체스는 실패했고, 이제 타락한 드래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잃어버린 자의 증오뿐이었다.
"나의 비원을 망가뜨린 너희를... 죽이겠다."
증오밖에 남지 않은 울먹이는 자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결국 그것뿐이었다.
"나와 함께 가자."
프레체스에게 남은 마지막 인형이 눈을 떴다.
갈림길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