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어디..."
제국의 소드마스터 에른스트 프리슬란.
명실상부 현 제국의 최고 전력과 당면한 리실로테가 심장의 서클을 점검했다.
추적을 뿌리치는 과정에서 7개 중 하나가 완전히 붕괴했고 남은 6개의 서클도 붕괴 직전이었다.
여기에 더해 리실로테에게 남은 건 아티펙트 알레아와 혼을 기반으로 한 분신들뿐.
에른스트를 상대하기에 열약하기 짝이 없는 전력이었으나, 정보우위만큼은 리실로테가 지니고 있었다.
츠즉!
실체화한 분신들이 빛으로 이루어진 병기를 손에 쥐었다.
절대권역 안에서도 분신들의 병기는 빛을 잃지 않고 환히 빛났다.
이 병기들은 알레아에 잡아먹힌 영혼을 동력으로 삼아 빚어졌다.
소울웨폰, 그러한 명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병기들이었다.
"네게도 색다를 거야."
소울웨폰은 리실로테가 말년에 개념을 완성하고 창조해낸 고유한 계열의 병기에 가까웠다.
영혼을 제물 삼은 이 병기는 명백한 금기였고, 또한 그녀가 잃었던 것에 대한 집착의 결과물 중 하나였다.
절대권역의 영향조차 받지 않고 자유롭게 제어되는 소울웨폰의 출현에 에른스트는 강한 생소함을 느꼈다.
경계심이 들었지만... 뭐, 그렇다고 해서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물러설 이유는 없었다.
찰나의 순간 에른스트가 쥐고 있던 대검의 형상이 흐릿해졌다.
쩌어억!!!
대검에 타격 당한 분신 하나의 몸이 옆으로 꺾이며 소울웨폰 또한 절반 이상 바스러졌다.
박살난 첫 번째 분신이 지면에 추락하기도 전에 두 번째와 세 번째 분신 또한 연이어 박살이 났다.
에른스트가 그려낸 검의 궤적을 뒤늦게 인지한 리실로테가 고민에 잠긴 것처럼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지금 에른스트는 자기 전력을 완전히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후방에 있는 헬름 가문의 영주성에 혹시라도 다른 적대자가 나타나 위협을 가할 것을 우려해 집중을 분산시킨 채 힘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른스트의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역시 상대가 안 되나..."
리실로테 또한 이 정도 격차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급조한 것에 가까운 어설픈 신병기 따위로 소드마스터를 제대로 맞상대할 수 있으리란 착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다만, 소울웨폰에 관한 정보가 에른스트에게 전무하다는 점을 이용한다면 발목을 잠깐 붙드는 것 정도는 시도해볼 만했다.
콰득!!!
벌써 여섯 번째 분신의 가슴이 꿰뚫렸다.
그 순간 여섯 번째 분신이 가슴을 부수고 지나간 에른스트의 대검을 붙잡으며 미약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력을 발산했다.
그와 동시에 이미 고꾸라져 있던 분신들의 소울웨폰이 붕괴하기 시작하며 은밀하게 지면을 잠식했다.
리실로테가 지금 전개하려는 기술은, '마나 대신 영혼을 동력 삼아 구축되는 결계' 정도로 정의할 수 있었다.
마나를 기반으로 한 결계가 아닌 만큼 상대가 절대권역을 펼친 소드마스터라 해도 아주 잠깐 동안은 움직임을 제약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볼 만했다.
츠즉!
0.2초 정도만 더 에른스트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도 리실로테가 결계를 전개했을 것이다.
허나 그 전에 붉은 고리가 에른스트의 황금색 눈동자를 감쌌다.
두 번째 개안이 이루어지며 인간이 자각 못 할 정보가 에른스트의 뇌리에 입력되었다.
시야 너머로 미래를 투영한 에른스트가 검을 움직였다.
콰가가가각!!!!!
리실로테가 전개하려 한 결계의 주축이 되는 분신들이 단숨에 흔적도 남기지 못 하고 바스러졌다.
에른스트는 리실로테가 당황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코앞까지 짓쳐 들어 검을 내리그었다.
떨어져 내리는 검격을 바라보며 리실로테가 입술을 달싹였다.
"훌륭하네."
소드마스터.
그 초월적인 경지의 다음 단계를 정의하는 단어는 대륙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르시아 정도를 제외하면 소드마스터란 카테고리를 아예 벗어난 수준의 강자가 이제까지 존재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들인 이들 사이에도 크고 작은 격차가 존재했다.
그리고 리실로테가 장담하건대... 에른스트 프리슬란은 하르시아 이후 가장 수준 높게 완성된 소드마스터였다.
단지 제국 내부에 존속되어 있었기에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 세상의 이면을 보는 기술을 완성하고 전수 가능한 단계까지 이론화시킨 그의 천재성은 근 수백 년간 배출된 무수한 인재들 중에서도 가히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쩌어엉!!!
리실로테가 서클 하나를 통째로 붕괴시켜 만들어낸 반발력으로 에른스트의 일격을 비틀었다.
아슬아슬하게 리실로테를 스쳐 간 일격은 곧장 궤적을 바꾸어 다시 리실로테를 노렸다.
리실로테는 분신 하나를 방패로 삼아 공격을 회피하고는 장난스럽게 투덜댔다.
"버거워라. 황제의 곁을 지켜야 할 존재가 왜 여기까지 와서는 나를 괴롭힐까..."
"..."
내색은 안 했으나 당혹스러운 건 에른스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적에서조차 접했던 기억이 없는 괴이한 힘을 사용하는 리실로테는 에른스트에게도 껄끄러웠다.
어떤 수작질을 시도할지 모르니, 변수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제거해야 했다.
에른스트가 단번에 리실로테를 뭉개버리기 위해 대검에 마나를 응축시켰다.
츠즈즈즉!
절대권역에 감응해 요동치는 마나의 기류를 두르고 에른스트가 가속했다.
리실로테 또한 회피를 포기하고 에른스트를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어차피 꼼수가 통할 상대가 아니니 리실로테에게 남은 선택지는 정면 돌파뿐이었다.
콰가가가가각!!!!!
리실로테가 다루던 분신이 방패 역할을 하다 전부 분쇄되어 조각났다.
에른스트는, 분신을 모조리 미끼로 던지고 옆을 지나치려는 리실로테를 향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리 될 것이라 예상했던 리실로테가 서클 세 개를 동시에 붕괴시키며 하나의 마법을 완벽하게 급조했다.
앱솔루트 실드.
최상위 방어 마법 중 하나였다.
허나 대마법사의 육신으로 전개한 것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앱솔루트 실드로는 에른스트의 전력이 담긴 일격을 완전히 상쇄할 수 없었다.
빠드드드득!!!
에른스트의 검격이 앱솔루트 실드를 무너뜨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리실로테의 팔을 베어내고 허리를 깊게 파고들었다.
배 속 장기가 뭉개져서 휘날릴 만큼 명백한 치명상이었으나 몸이 양단되지 않은 시점에서 리실로테는 목적을 이루었다.
한 번 더 검을 휘두르려는 에른스트를 향해 리실로테가 한계까지 폭주한 아티펙트, 알레아를 내리꽂았다.
콰아아앙!!!
알레아에 자리 잡고 있던, 본래 리실로테의 것이었던 서클이 완전 붕괴 수순에 들어서며 거대한 힘으로 에른스트를 짓눌렀다.
물론 그래 봤자 벌 수 있는 시간은 찰나였으나 리실로테에겐 충분했다.
알레아가 소멸해가며 육체의 통제권 또한 느슨해지는 것을 느끼며, 리실로테는 영주성의 결계를 뚫고 자신의 표적이 위치한 곳으로 몸을 낙하시켰다.
콰앙!!!
리실로테가 벽을 부수고 방에 진입하자마자 고요하게 일렁이는 검강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600년 전 전쟁영웅의 기술을 계승한 지미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리실로테는 서클 하나를 더 소비했다.
쿠웅!!!
"!!"
지미는 몸을 밀어내는 막대한 반발력을 견디지 못하고 벽을 부수고 밖으로 튕겨 나갔다.
만약 지미가 리실로테의 공격을 작정하고 흘려내려 했다면 절반 이상 흘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가까이 있던 벨라와 레아가 다칠 수 있어 결국 자기 몸으로 충격을 전부 흡수했다.
지미를 떨쳐낸 리실로테는 곧장 레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으나, 그때 이미 에른스트가 리실로테의 바로 뒤에서 손을 뻗고 있었다.
"...!"
리실로테는 에른스트의 손아귀를 막아 세우려 하며, 동시에 벨라의 품에 안겨 있는 레아를 향해 거칠게 다듬어진 마나의 기류를 흩뿌렸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리실로테가 펼쳐낸 장막을 너무나 쉽사리 광검으로 찢어내고는 리실로테, 정확히는 일피림의 목을 붙잡아 뜯어냈다.
에른스트는 이 괴이한 침입자의 목을 뜯어내면서도 벨라와 레아를 향하던 공격 또한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허공에 생성된 광검들이 이미 그녀들을 지키기 위해 자리를 잡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에른스트가 굳이 거기까지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었다.
투둑...
목에서 뜯겨나간 일피림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일피림의 머리는 어째서인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에른스트는 손아귀에서 핏물을 뚝뚝 흘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벨라와 레아는 갑작스러운 굉음과 코앞에서 터진 강대한 마나의 기류를 견디지 못하고 혼절해 있었다.
의식은 잃었으나 두 사람 다 큰 상처 없이 무사했다.
리실로테가 마지막 순간 흩뿌린 마나의 기류는 두 사람을 조금도 해치지 못했다.
벨라의 품에 안겨있던 레아가 정신을 잃기 직전 본능적으로 발현한 용혈의 화염이 다가오던 위협을 완전히 불태워버렸으니까.
"..."
제자리서 멍청하게 멈춰 서버린 에른스트가 황금색 눈동자로 레아를 응시했다.
결코 존재하지 말아야 할 황족이 거기 있었다.
*
프레체스는 원정군의 궤멸을 원했다.
그렇기에 병력을 나눠서 원정군의 후방 거점을 무너뜨려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심지어 한정적으로 사용 가능한 대규모 워프 또한 원정군의 주력을 전멸시키는 데 활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집착과 오만이 프레체스의 패착이었다.
잡스러운 수작을 부리지 않고 원정군의 타격대를 저지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면, 설령 마경의 주력이 단번에 무너졌다고 해도 전황을 수습할 기회가 한두 번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병력을 쪼개서 운용한 프레체스는 무너지는 전황을 수습하지 못했다.
마경의 세력들 중 프레체스와 느슨하게 연합되어 있던 이들은 레이가 재현해낸 하르시아의 궤적을 보고 아예 발을 빼기도 했다.
마족이 악신들에게 잠식된 존재라고는 하나 생존 욕구 정도는 강하게 지닌 경우가 많았기에 이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집결했던 마경의 주 전력은 박살났고 원래 계획도 글러먹은 것 같은데 왜 굳이 삶과 영혼의 희생까지 각오하며 발악을 해야되는가.
차라리 힘을 안배했다가 추후 마경에 자기 세력을 넓히는데 써먹자고, 그리 생각하는 마족들이 늘어났다.
일원화된 것처럼 움직이던 마경의 악의들은 느리지만 차근차근 와해되고 있었다.
"네가 졌어, 프레체스."
레이는 루나의 폭격에 의해 반쯤 뜯겨나간 구조물 앞에 서서 그 안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군."
프레체스 또한 자신이 패배했음을 자각했다.
오래된 비원이 결국 멀어져감을 느끼며, 프레체스는 체내에 깃들어 있던 변질된 권능의 기류를 서서히 흘려내기 시작했다.
본래 대륙을 침식할 혼종으로서 부활하기 위해 쌓아올리던 힘을 사용한다는 것은... 패배의 방증이자, 비원을 이루는 데 실패한 자의 추악한 발악이었다.
레이가 프레체스를 향해 담담하게 물었다.
"마지막까지 증오를 품어야겠어?"
"..."
레이의 얼굴에 드러난 씁쓸함을 어둠 속에서 읽어낸 프레체스가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지만 내게 남은 것이 이것밖에 없구나."
"그래, 유감이군."
레이가 허공에서 제국의 신검을 뽑아냈다.
"끝을 보자."
갈림길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