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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336화 (336/446)

336화

흐트러졌던 시야가 드디어 초점이 잡혔다.

레이는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자신이 그려낸 궤적을 눈에 담았다.

검붉은 하늘을 갈라낸 궤적 사이로 드러난 푸른 하늘이, 탁하게 물들어 있는 구름에 가려져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

악신들은 이 대륙에 저들의 영역을 넓히는 데 주력하기보다 침해 불가한 근거지를 우선 확보하기를 원했다.

그러한 악신들의 욕구에 의해 대륙에 마경이란 지옥이 탄생하게 되었다.

마경에는, 마경 내에서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제약'을 부여받은 대신 특수하고 강대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개체가 넘쳐났다.

마경을 늪처럼 뒤덮고 있던 악의는 수천 년에 걸쳐 응축되어 스스로 형상까지 이루고 침입자를 적대했다.

마경 안에서만큼은 한없이 무적에 가까운 존재들... 그런 것들을 걷어내기 위해.

그날 마경에 발을 들인 하르시아는 레이가 재현해낸 기술만 수십 번을 사용했다.

"..."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기술의 완성도에 있어 하르시아는 레이를 압도했다.

레이가 재현해낸 궤적에 비해 하르시아가 마경에 새겨넣었던 궤적은 더욱 날카롭고 정교했을 것이다.

레이는 차원의 파편을 완벽하게 통제해내지 못 하고 주위에 흩뿌려대다 스스로 상처까지 입었지만, 하르시아가 그랬을 리 없었다.

이 기술의 반동 또한 하르시아는 더욱 적절하게 제어해냈을 것이고 육신의 견고함 또한 레이를 앞섰다.

그러니까 하르시아라면... 이 기술을 짧은 기간 동안 수십 번까지도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을 분명 갖추고 있었다.

"..."

문제는, 아무리 하르시아라 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초월적인 섬멸기를 발현하기 위해선 육신에 정제되어 있는 에너지를 어마어마하게 소모해야 했다.

약간의 실수가 자멸로 이어졌기에 기술의 정교함이 필수였고, 그렇기에 절대권역으로 끌어온 외부의 마나를 함부로 사용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인간의 심장에 위치한 코어와 서클에 압축하고 저장할 수 있는 마나량은 아무리 대단한 강자로 해도 한계가 있었다.

'대여섯 번은 어렵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수십 번까지는...'

하르시아라 해도 힘들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마경에서는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마나를 얻기 어려워 소모한 마나를 회복하는 것도 까다로웠다.

"...그랬군, 그래서..."

그래서 하르시아는 결국 죽음을 택했다.

하르시아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그들은 필사적으로 선택지를 제한하고 선택을 강요했다.

레이는 하르시아가 마주했을, 그 악의와 두려움이 꾹꾹 눌러 담겨 있을 그날의 겁박을 곱씹어 보며 피식 웃었다.

표면으로 드러난 대부분의 진실을 유추할 수 있었음에도...

레이는 여전히 그날 이곳에 걸음을 내디뎠던 하르시아의 심정이 어떠하였을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후우..."

레이는 상념을 털어내며 그날 하르시아가 걸었던 궤적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프레체스와 남은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절대적인 거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타격대의 전진을 막을 수 있는 방해꾼의 유무가 중요했다.

그리고 현재, 프레체스가 준비했던 정예 전력이 전멸했다.

이제 마경에 남은 존재들 중 원정군의 타격대와 맞설 의지와 실력을 지닌 제대로 된 방해꾼은 극소수일 터다.

타격대는 더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쿠웅-

그때, 인근에서 워프 계열 마법의 파동이 연거푸 지면을 울렸다.

원정군의 전진 기지와 거점에 공세를 퍼붓던 마경의 병력들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역시..."

마경에서 원정군은 사용 못 하는 공간 이동 마법을 활용해, 악신의 추종자들이 원정군을 괴롭힐 수 있음은 예측하고 있었다.

허나 원정군의 타격대는 적병이 워프해 오는 것을 감지했음에도 아주 덤덤했다.

거점을 공격하던 마경의 병력 중 주의해야 할 개체는 기껏해야 아룬델 정도였다.

준 로드 급 전력도 거의 없는 저것들로는 타격대의 진군을 결코 막아 세울 수 없었다.

약간의 시간 벌이, 혹은 프레체스를 제거한 타격대의 퇴각을 까다롭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고작 그뿐이었다.

빠르게 나아가는 타격대를 향해 마물들이 먼저 달려들었다.

촤아악!!!!

알렉산데르가 휘두른 검의 궤적에 따라 마경에서 배양된 마물들이 터져나갔다.

레이는 전장의 측면과 후방에서 주로 몰려드는 마물과 마족들을 보며 조소했다.

워프 지점을 보건데 이건 본래 작전에 실패하고 퇴각하는 타격대를 잡아먹기 위해 준비해놓은 함정 같았다.

허나 그 함정은 결국 프레체스를 지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레이가 검을 휘두르는 알렉산데르에게 물었다.

"여기서 나누는 게 어때?"

"..."

타격대를 둘로 쪼개자는 소리였다.

굳이 여기서 타격대의 전력을 나눌 필요는 없었다.

타격대의 최종 표적인 프레체스는 한 지점에 몸을 파묻고 있기에 도주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기에 타격대는 적들의 물량공세를 모두 함께 차근차근 짓이기며 천천히 전진해도 프레체스를 놓칠 일은 없었다.

다만, 항복 따위의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전쟁에서 패배가 기정사실화된 프레체스에게 시간을 너무 주면 위험했다.

타락한 드래곤이 본래의 목적을 포기하고 수백 년간 변질되고 응축된 엘-람과 악신들의 권능으로 어떤 발악을 해올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프레체스가 자멸을 각오하고 수작을 버리기 전에 빠르게 마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알렉산데르도 그 점을 모르지 않았기에, 레이의 상태만 정상이었으면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그 몸으로 전투 수행이 가능한가?"

"괜찮아. 한 번쯤은... 더 움직일 수 있어."

"그렇다면... 알겠다. 내가 남지."

콰가가가강!!!!

알렉산데르가 이제 막 전개가 가능해진 절대권역을 펼치며 하늘에 광검을 생성해 지면을 폭격했다.

타격대 대원 중 준 로드 급 미만에 속하는 이들이 알렉산데르 곁에 남아 그를 보좌했다.

인근에 워프해서 몰려드는 잡것들을 알렉산데르와 그를 보좌하는 대원들이 잡아 죽이며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안소니우스를 선두로 한 타격대가 바람 정령의 도움을 받아 급격히 가속했다.

이내, 모두의 시야에 프레체스의 썩어가는 육신이 몸을 숨기고 있다는 장소가 보였다.

제국의 황성을 상기시키는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물을 확인하고서 타격대는 더더욱 가속했다.

인근을 지키고 있던 마물과 마족들이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타격대를 저지하려 했다.

콰앙!!! 쩌어억!!!

물론 숫자도 많지 않은 마물과 마족들이 타격대를 막아세울 수는 없었다.

악신의 의지에 잠식된 마족들이 몸을 내던졌으나 전력 차는 압도적이었다.

그들은 특히나 안소니우스에게 저항하지 못했다.

쩌억!!!

안소니우스가 철퇴를 휘둘러 마족의 머리를 터뜨렸다.

머리가 터져나간 마족은 성스러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갔다.

직전까지 최대한 신성력의 소모를 줄이려 했던 안소니우스는 더는 힘을 아끼지 않고 적을 분쇄했다.

그 찰나, 타격대를 보호하기 위해 전개되었던 아티펙트가 무언가에 반응했다.

콰드드드득!!!

먼 거리에서 쏘아진 탄환을 아티펙트가 막아냈다.

자율 방어 기능을 갖춘 대신 방어력은 좀 떨어지는 아티펙트였으나, 그렇다고 해도 한 번의 공격을 제대로 견디지 못하고 핵이 바스러졌다.

"사도가 왔나."

증오의 사도, 아룬델.

분명 마경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까다로운 적이었다.

허나 그의 능력이 은폐와 기습에 특화되었음을 고려하면, 전위를 단단하게 지켜줄 조력자가 없는 이상 위험성은 반감됐다.

콰앙!!! 콰아앙!!!

타격대는 멀리서 떨어져 내리는 저격을 잠시 동안 일방적으로 허용했다.

작정하고 시간을 끌기 위해 거리를 유지하며 저격을 이어가는 아룬델을 탐지하고 추적하여 무력화시키는 건 꽤나 지난한 일이었다.

하지만 타격대에도 아룬델과 같은 뿌리의 능력과 기술을 지닌 자가 존재했다.

콰드드득!!

아룬델이 쏘아낸 탄환을 아퀴타스가 쏘아낸 빛살이 요격해냈다.

거리를 좁혀오며 빛살을 쏘아내는 아퀴타스를 향해 아룬델이 분노했다.

"감히 마경에서 건방을 떠는 거냐!!"

뿌리가 같은 기술을 사용하는 만큼 아룬델과 아퀴타스는 서로의 은신을 쉽사리 감지했다.

그리고 압도당한 것은, 당연히 아퀴타스였다. 대륙도 아닌 마경 내에서 둘의 전력 차는 현격했다.

아룬델은 삽시간에 아퀴타스를 압도하고서 방해가 들어오기 전에 끝장을 내려 했다.

허나 그보다 먼저, 기이한 발작이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

아퀴타스가 잠시 이목을 끌어준 사이.

세계수의 저주를 뒤집어 쓴 울트가 게네시스를 손에 쥐고 거리를 좁혔다.

무엇 하나 뜻대로 풀리지 않는 전장 위에서, 아룬델은 들끓는 괴성을 토해내며 탄환을 쏘아댔다.

콰가강!!!

탄환을 막아낸 울트가 반발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 틈에 아룬델은 몸을 움직여 게네시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콰앙!!! 콰아앙!!! 카드득!!

서로가 필사적으로 거리를 좁히거나 벌리기 위해 몸을 은폐하고 허상을 만들어내며 난전을 펼쳤다.

이미 한참 떨어진 거리에서 격돌하는 그들을 뒤로하고 레이가 몸을 돌렸다.

안소니우스가 레이의 판단에 짧게 반대를 표했다.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마무리를 하고 함께 가야 하지 않겠나? 이미 우리는 힘을 많이 소모했다."

여기서 또 나뉘면 프레체스에게 향하는 타격대는 레이, 안소니우스, 라멘타, 루나만 남는다.

레이, 안소니우스, 라멘타는 이미 힘을 상당히 소모했다. 루나의 능력은 정령을 다루는데 특화된 듯싶었고 말이다.

레이가 무어라 답하려는데 프레체스가 몸을 숨기고 있는 구조물로부터 강력한 에너지의 파동이 느껴졌다.

쿠우웅-!

"...황성을 조악하게 모방해놨네."

레이는 조악하다고 깎아내렸으나 마경의 심부에 위치한 구조물로부터 일렁거리는 에너지의 밀도는 결코 조악하지 않았다.

열선 형태의 포격이 시작되려함과 동시에 얼마 남지 않은 마물과 마족들이 달려들어 타격대의 회피를 방해하려 했다.

안소니우스가 하나 남은 방어용 성물을 사용해야 하나 고민했으나, 필요 없는 고민이었다.

마지막 방해물을 치워내기 위해.

루나가 전력을 드러냈다.

쩌어어어엉!!!

네 개의 서클이 공명을 일으키며 지면을 낙뢰로 물들였다.

얼마 남지 않았던 마족과 마물들이 증발하듯 쓸려나갔다.

일대를 짓누르려하는 루나를 향해 포격이 시작됐다.

촤아아아악!!!!!

악신의 축복까지 더해져 막대한 화력을 구현해낸 포격이 루나가 일으킨 장벽에 막혀 방향이 꺾인 채 대지를 마구잡이로 긁어냈다.

안소니우스가 성검을 들어 올리려다 말고 떫은 표정으로 루나를 돌아보았다.

감춰둔 게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으나 이건 상상을 많이 웃돌았다.

안소니우스의 시선을 무시하며, 루나가 덤덤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에이라, 칼가."

이제까지 루나도 힘의 소모가 전혀 없었던 건 결코 아니었다.

라멘타와 연계하는 식으로 마법을 발현해 직접적으로 힘이 드러나는 걸 숨겼을 뿐, 서클에 깃든 마나는 계속해서 소모했었다.

타격대를 태워내려는 강대한 화력을 굳이 정면에서 역으로 집어삼킬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얼마 안 가, 루나의 명령을 듣고 비행한 에이라와 칼가가 열선을 쏘아내던 구조물의 상부를 타격해 문제를 일으켰다.

트드득!!

머리 위에 쏟아지던 포격이 멈추었다.

원정군의 타격대는 남아있는 무장들을 전부 전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타격대를 견제 가능한 최정예 전력을 프레체스가 소실한 시점에서, 이미 전쟁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레이가 프레체스의 존재감을 가까이서 느끼며 홀로 속삭였다.

"프레체스."

이제는 그만...

"이 이야기의 결말을 맺자."

*

"곤란하네."

헬름 자작령의 영주성을 배경으로 검을 뽑아내는 에른스트를 바라보며, 리실로테가 중얼거렸다.

예기치 못한 변수의 출현 탓에 최선을 다해 속도를 높였으나 간발의 차로 늦어버렸다.

"제치는 건 불가능하고..."

제국의 소드마스터라는 칭호는 결코 허명 따위가 아니었다.

특히나 '에른스트 프리슬란'이란 존재에 한해서는, 제국의 소드마스터라는 뻔하디 뻔한 칭호가 도리어 그의 진정한 저력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상성까지 고려하면 600년 전 리실로테가 완벽히 부활해도 아무 준비 없이 에른스트를 이 거리에서 맞상대하는 건 어려웠다.

"흠... 발악해볼까."

에른스트로부터 전개되는 절대권역을 느끼며 리실로테가 싱긋 웃었다.

그녀의 표적이 영주성 안에서 느껴졌다.

갈림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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