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하르시아는 필멸자들의 궁극적인 해방을 꿈꾸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세상 밖의 존재들에게 유린당하지 않고 오롯이 홀로 서길 바랐다.
그러한 비원을 이루기 위해, 하르시아는 별빛 너머의 존재조차 위협하고 견제할 수 있는 힘을 얻고자 했다.
수많은 고뇌와 실패가 뒤따른 끝에, 마침내 하르시아가 완성시킨 하나의 답이...
레이의 영혼에 깃들어 있었다.
츠즉-
인간이 살아가는 차원 너머에는 수많은 상위 차원이 존재했다.
이 수많은 차원 사이에는 서로의 간섭을 제한하는 '경계'가 장벽처럼 세워져 있었다.
이 경계의 존재로 인해 각기 다른 차원은 서로 과도한 영향을 끼치지 않고 안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하르시아가 창조한 이 기술은 그러한 차원 간의 안정을 고의로 무너뜨렸다.
츠즈즉-
레이가 손에 쥔 검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최상위 차원까지 도약해 있었다.
최상위 차원에서 잠시나마 형태를 유지한 한 자루의 검이, 존재의 소실을 뜻하는 점 차원을 향해 가파르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최상위 차원에서 점 차원까지. 양극단에 놓여있는 두 차원 사이에는 수많은 경계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허나 레이가 손에 쥔 검은 그 수많은 경계들을 일시에 붕괴시키며 점 차원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득!!!
본래 접촉은커녕 간섭조차 제한되었던 서로 다른 차원들이 경계의 붕괴로 인해 찰나의 순간 충돌한다.
이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반발이, 겹겹이 쌓여있던 차원들의 연쇄적인 충돌과 붕괴를 발생시켰다.
파드드드드득!!!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진 차원의 파편들이 서로 뒤섞여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차원 붕괴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뒤틀림이 레이의 손아귀에서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처럼 일렁거렸다.
레이는 이것들을 제어해내야만 했다.
이것들을 가공하고 제어해내서, 검의 궤적에 담아내 뻗어가게 만들어야 했다.
제어에 실패하면, 레이 본인이 연쇄적인 차원 붕괴 현상에 말려들어 소멸했다.
거기 말려드는 순간 육신은 물론이고 영혼조차 흔적도 남기지 못 하고 산산이 조각났다.
두려움이 밀려왔으나, 레이는 이겨냈다.
"..."
시간이 멈춰 선 듯한 침묵 속에서.
레이는 동조된 하르시아의 잔흔이 이끌어주는 방향으로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르시아에 비해 가진 재능이 부족했기에 검이 그려내는 궤적이 자꾸만 끊기려 했다.
레이는 만물을 꿰뚫어보는 권능을 활용해 엇나가려는 검의 궤적을 계속해서 다잡았다.
미약한 조정을 가할 때마다 거대한 압력이 육신을 짓이기려 했다.
팔다리가 금방이라도 좌우로 꺾여 뜯겨 나갈 것 같았으나 레이는 견뎌냈다.
그리고 마침내, 제국의 신검이 하나의 궤적을 완성했다.
레이에게 가까이 다가왔던 볼루프가 검의 궤적과 맞닿아 가장 먼저 소멸했다.
볼루프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린 검의 궤적이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궤적에 뒤섞여 있는 차원의 파편들이 계속해서 연쇄적인 차원 붕괴 현상을 일으키며 공간을 잠식했다.
이윽고 그 궤적은 불의 정령왕에게 닿았다.
자신의 권능을 토해내며 다가오는 궤적에 저항하려는 불의 정령왕을 바라보며 레이는 조소했다.
마경에 모습을 드러낸 불의 정령왕은 인간이 살아가는 차원보다 상위 차원의 위대한 지배자 중 하나였다.
허나 레이가 재현해낸 검격은, 불의 정령왕 따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존재를 베어내기 위해 창조된 기술이었다.
고작 불의 정령왕의 따위가 상쇄할 수도, 견뎌낼 수도 없었다.
결국 앞으로 뻗어나간 궤적은 불의 정령왕이란 존재를 이루던 모든 것을 파멸시켰다.
다가오는 파멸에 저항하듯 아지랑이처럼 휘날리던 불꽃들도 얼마 못 가 넓게 번지며 형태를 잃었다.
상위 차원을 지배하던 위대한 존재는 그렇게 소멸했다.
트득!!!
그와 동시에 레이를 보호하고 있던 실드 또한 균열을 일으켰다. 예정된 결과였다.
레이는 하르시아의 기술을 성공적으로 재현했으나, 역량이 부족했던 탓에 차원의 파편들을 완전히 제어해내지는 못 했다.
제어되지 못 한 채 멋대로 번져나간 차원의 파편들이 초고밀도로 응축된 실드를 물을 가르듯 파고들었다.
차원의 파편들이 레이의 살갗을 헤집었다. 그와 동시에 기술의 반동이 레이의 육신을 덮쳤다.
"...!!"
레이가 해낼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뒤틀리려 했다.
찢어진 살갗 사이로 피가 터져 나오며 주변을 적셨다.
레이는 이 기술은 이제 더는 사용하지 못한다.
시도하려고 했다간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온몸이 부서질 것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기회를 레이는 충분히 가치 있게 사용했다.
프레체스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었을 정령왕이 소멸했다.
그에 더해 레이에게 가까이 접근했던 마족들 또한 차원의 파편들에 휘말려 찢겨나갔다.
사지가 잘려나가도 악신의 축복 아래 쉽사리 회복해서 다시 덤벼들던 마족들이었으나 이번만은 그게 불가능했다.
차원의 파편은 겉으로 보이는 육신 뿐만 아니라 무형의 권능과 영혼까지 짓이길 수 있었다.
차원의 파편에 휩쓸려 곤죽이 된 것은 마족의 육신만이 아니었기에 목숨이 붙어있다라도 당장 회복은 불가했다.
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마경의 전력은 거의 전멸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프레체스... 모아두었던 최정예 전력을 대부분 소실하고 정령왕이란 우군까지 잃어버린 네게 이제는 무엇이 더 남아 있을까...'
레이는 하늘을 가르고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져 있는 검의 궤적을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알렉산데르 또한 레이와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일그러진 웃음을 머금었다.
믿을 수 없는 경이로움이 가슴을 뒤흔들었으나, 차마 억누를 수 없는 씁쓸함 또한 그의 입가에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우리가 망각했던... 신화의 단편인가..."
하르시아는 저리 초월적인 검격을 마경에서만 최소 수십 번을 사용했다. 그리고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 잊혔다.
알렉산데르는 자꾸만 떠오르는 허망한 감정으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해 고개를 짧게 저었다.
한편, 루나는 곧바로 레이에게 달려갔다.
아직 레이의 주변을 흐르던 차원의 파편들이 루나의 살갗을 할퀴었지만 루나는 무시했다.
갑옷이 박살나며 주저앉으려던 레이는, 옆에서 누군가가 몸을 받쳐 주는 것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루나?"
"레이...!"
바로 옆에 서 있을 루나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왜 위험하게 가까이 오냐, 레이는 무심코 그런 말을 지껄이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루나는 아직까지 남아 흐르는 차원의 파편들로부터 레이를 보호하며 레이의 부상을 살폈다.
이미 약해진 육체로 무리한 기술을 사용한 탓에 몸 전체가 거의 안에서부터 파열되려고 했다.
당장 조치가 필요했다.
그때, 루나에 이어 차원의 파편을 헤치고 가까이 다가온 라멘타가 세계수의 눈물이라 불리는 액체가 든 병을 레이에게 던져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 상흔을 남긴 존재가 너였군."
"..."
레이는 일단 루나의 도움을 받아 병에 든 액체를 입안에 흘려 넣었다.
엘프들이 가장 귀히 여기는 물품답게 효과는 상당히 신속하고 대단했다.
역사상 최초로 세계수의 눈물을 두 번이나 받아마신 인간이 된 레이는 그나마 몸의 감각이 조금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너희 어머니께서 나한테 헛짓거리를 하시기에 칼침 좀 놔드렸지. 그래서... 보복이라도 하시게?"
"100년 정도 고민해보겠다."
"하, 농담도 할 줄 아네."
콰드득!
소음이 들렸다.
뒤로 물러나 있던 타격대가 박살이 나 있는 마족들을 확실히 제거하기 위해 공격을 박아넣는 소리였다.
몇놈이 도망가려 했지만 곧장 저격당해 속도를 잃고 타격대에게 포위됐다.
저쪽은 레이가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금방 해결될 일이었다.
루나의 도움으로 다시 균형을 잡은 레이가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서 늦장을 부릴 수는 없었다. 어서 프레체스를 제거해야 이 전쟁을 끝마칠 수 있었다.
호흡을 고른 레이가, 걸음을 내딛기 전에 가까이 다가온 알렉산데르에게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멋진... 풍경이지 않나?"
"...그래, 멋진 풍경이군."
하늘에 새겨진 궤적을 바라보며 알렉산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데르의 눈가에 담긴 풍경은 저 멀리서도 보였다.
검붉은 하늘에 새겨진 궤적 너머로 푸른 하늘이 넘실거린다.
그 괴이한 풍경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륙의 원정군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은 하르시아가 무엇을 희생하고 무엇을 이루었는지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허나 대륙이 망각한 신화를 마경은 기억하고 있었다.
수백 년을 넘게 존재했던 오래된 마족들이 섬뜩한 울림과 함께 하늘이 갈라져 나가는 모습을 보며 몸을 굳혔다.
그들이 그토록 지우고자 하던 악몽이 재현되며 심장 깊숙이 억눌렀던 공포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원정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마족들은 지금 원정군의 가장 중요한 거점 중 한 곳을 궤멸시키기 직전이었다.
허나 악신의 축복을 휘감고 살육을 즐기던 마족 중 몇몇이, 갈라져 나간 하늘을 보고 결국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발작하며 멀리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이상 행동을 보이는 마족들을 원정군은 역시나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 원정군을 공격하는데 동원되었던 소수의 화염 정령이 갑자기 몸을 비틀어댔다.
"끼에에엑!!!"
불의 정령왕이 강제한 탓에 본신으로 마경에 발을 들였던 화염 정령들은 얼마 못 가 정령계로 되돌아가거나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 죽었다.
그 모습을 본 마족들은 불의 정령왕이 영향력을 잃거나 소멸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룬델은, 그 600년 전 악몽의 흔적이 다시금 마경을 유린하기 시작했음을 깨닫고 괴성을 내질렀다.
"하르시아아아!!!!!"
공포와 분노가 맞물린 괴성이 마경을 메아리쳤다.
원정군은 여전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유추조차 하지 못했다.
헌데, 마족들이 갑자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거점에 남아있던 원정군들은 궤멸 직전이었던 전력으로 도저히 그들을 쫓을 수는 없었다.
일단 전진 기지에 상황을 보고한 후 대기하고 있는데, 강력한 마법 반응이 인근에서 연거푸 울려 퍼졌다.
원정군의 마법사들이 다급히 의견을 나눈 끝에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공간 이동 계열 마법입니다."
"...!"
마경 안에서 마족들이 워프 계열 마법으로 원정군을 괴롭힐 수 있음은 예상하고 있었다.
헌데 지금 상황에서 갑자기 워프 계열 마법을 사용한다는 건...
파울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하늘의 궤적을 올려다본 순간 때마침 타격대로부터 짧은 통신이 전해졌다.
최종 목표 지점을 수 km 앞두고 적의 최정예라 판단되는 전력을 격파. 최종 목표 지점을 향해 전진 중.
그제야 파울라는 웃음을 머금을 수 있었다.
거점을 공격하던 놈들이 왜 그렇게 허겁지겁 몸을 뺐는지 이제 이해됐다.
허나 거점을 공격하던 놈들이라 해봐야 준 로드 급 이상 전력은 거의 없었다.
저들이 뒤늦게 몰려간다고 해봐야 타격대를 막아세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타격대가 프레체스를 제거하고 물러나는 걸 방해할 수는 있을 터다.
파울라가 거점을 지키던 원정군에게 통신을 전달했다.
"우리도 움직인다. 타격대를 지원할 준비를 하라."
갈림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