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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334화 (334/446)

334화

"?!"

볼루프는 순간 섬똑함을 느꼈다.

레이의 눈빛은 트라우마라고 칭해도 종을 그날의 악몽을 찰나의 순간이나마 떠올리게 만들었다.

일순 몸이 군었던 볼루프는 고위 바람 정령 칼가가 머리 위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뒤늦게 눈치쳤다.

칼가의 존재를 감지한 볼루프가 황급히 몸을 움직였으나, 레이가 그보다 빨리 검을 휘돌렸다.

최악!!

레이의 참격이 볼루프의 어깨를 갈라냈다.

칼가의 방해 탓에 회피가 늦었던 볼루프가 다급하게 거리를 벌렸다.

레이는 볼루프를 쫓지 않고 지친 기색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레이를 향해 칼가가 호소했다.

[일족의 지배자. 너희가 정령왕이라 부르는 저 존재를 저지해야 한다...!]

칼가는 몹시도 분개하고 있었다.

불의 정령왕이 마경이란 공간과 계약을 맺었다?

이는 결국 마경이란 공간을 계약서 삼아서, 마경을 가꾸어낸 악신들과 간접적으로 계악을 맺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다수의 정령들은 이제까지 '암흑 정령'이라 불리는 부류들에게 큰 관심이나 경각심을 가지지 않았다.

소수의 정령이 이질적인 힘을 머금고 타락했다고 해도 정령이 살아가는 차원에 대단한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령계에서 암흑 정령들은, 인간 사회로 비유하자면 조금 과격하게 노는 약쟁이 정도의 취급이었다.

허나 일족의 지배자가 악신들과 간접적으로 계약을 맺고 다른 차원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사안의 중대함이 달랐다.

불의 정령왕이 계속해서 계악을 유지하며 마경에서 힘을 사용한다면... 어쩌면 마경의 오염이 '정렁계'까지 번질 수 있었다.

불의 정렁왕은 지금 자기 탐욕 때문에 정렁이 살아가는 차원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었다.

[일족의 지배자를 돌려보내야 한다!]

칼가는 레이에게 처음 칼침을 맞았을 때보다도 더욱 뚜렷하게 격앙된 감정을 드러냈다.

허나 레이는 불의 정령왕을 응시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해."

[제발 협력하겠다! 너 또한 저 존재를 밀어내야 하지 않나!!]

"...."

칼가가 호소했으나 레이는 더는 답하지 않고 불안정한 호흡을 진정시키기 위해 집중했다.

숨을 물아쉬는 레이의 모습을 지켜보며, 볼루프는 가슴에 일었던 서늘한 공포를 밀어내고 안정을 되찾았다.

하르시아의 흉내를 내며 하르시아의 기술 몇 개를 재현할 수 있다고 해도 저건 명백히 가짜였다.

볼루프는 그 명백한 진실을 마음에 되새긴 채 손아귀에서 뻗어나온 날붙이를 들어 올렸다.

"과연 얼마나 더 발악을 이어갈 수 있을까?"

카가각!!!

볼루프는 전위로 나선 알렉산데르와 다시 무기를 맞부됬쳤다.

아주 잠시 동안 원정군의 타격대가 이 전장에서 우위를 점했다.

허나 불의 정령왕이 전장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타격대는 급격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콰아앙!!! 콰아아앙!!!

기화된 암석이 공기와 섞여 이글거리는 전장의 한복판에 연거푸 추가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거대한 존재감을 발하는 불의 정령왕이 시선을 옮겨갈 때마다 전조 없이 열기가 들끓어대며 타격대를 덮쳤다.

최상급 아티펙트와 성물. 그리고 방어를 위해 전개된 마법이 없었다면 이미 타격대의 절반 이상이 전사했을 터다.

허나 온갓 축복을 뒤집어썼음에도 이 들끓는 지옥 속에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타들어가는 목구멍이 바짝 조여오고 무기를 붙잡은 손아귀가 그대로 눌어붙는다.

그럼에도 타격대는 괴성에 가까운 신음을 토해내며 병기를 휘둘렀다.

콰아앙!!!

계속해서 응축된 열기가 폭발을 일으킨다.

이 전조 없는 열기의 폭발은 아무리 타격대가 발악해도 진형의 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마족들은 열기로 인한 육체 손상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타격대를 밀어붙였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아직 아티펙트의 기능이 유지되고 있을 때, 어떻게든 불의 정령왕을 무력화시켜 상황을 반전시켜야 했다.

허나 대체 어떻게?

불의 정령왕의 본신을 공격해서 정령계로 물러나게 하는 건... 이론적으로 가능은 하겠지만.

당장 일방적으로 일려나고 있는 타격대의 전력을 더 쪼개서 정령왕에 접근시키는 건 너무나 무리한 시도였다.

그렇다면... 불의 정령왕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화염 정령들을 저격하는 데 집중해야 할까?

과연 열마나 많은 화염 정령을 제거해야 불의 정령왕을 충분히 약화시킬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이는 타격대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콰아앙!!!

"크아아악!!"

타격대의 기사는 방호 기능을 상실한 갑주가 녹아내려 어께 근육을 적시는 것을 느끼면서도 검을 붙잡고 마족의 목을 찍어눌렀다.

알렉산데르가 곤장 그 기사를 불잡고 갑주를 뜯어낸 뒤 뒤로 던저버리며 볼루프의 검을 막아냈다.

카각!!!

불리한 자세에서 공격을 막아낸 알렉산데르가 몸을 휘청였다.

아직도 절대권역을 다시 사용하기 위해선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절대권역이라 해도, 마나가 아닌 권능이 기반이 된 불의 정령왕의 열기를 차단할 수가 없었다.

볼루프가 알렉산데르를 밀어붙이며 입꼬리를 찢었다.

"자, 이제 어찌할 작정이나? 이리 발악만 이어가다 타죽기를 원하느냐?"

"..."

알렉산데르 또한 알 수가 없었다.

정령과의 전투에 관계된 능력과 판단력만큼은 레이가 알렉산데르보다 멍백하게 뛰어났다.

그렇기에 지금 타격대는 레이가 무언가 결정을 내려주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자꾸만 고개를 치켜드는 좌절을 외면하며 레이가 의견을 개진할 때까지 어떻게든 전장을 사수하기 위해 악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정령왕을 무력화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를 실패한 레이는 아직까지 숨을 몰아쉬며 침묵하고 있었다.

이미 패잔병의 몰골을 하고 있는 타격대를 볼루프는 광소하며 비웃었다.

볼루프의 거친 웃음소리가 타격대의 뇌리를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때, 레이가 마침내 입을 열였다.

"퇴각한다. 물러서."

레이의 목소리를 들은 타격대 대원들이 일순 표정을 굳힌 채 머못거렸다.

레이는 그 잠깐의 망설임조차 용납하지 않고 고함쳤다.

"물러서라고!!"

"으하하하하하!!"

볼루프가 폭소했다.

퇴각? 그런 건 불가능하다.

당장 불의 정령왕을 피해 이 전장을 벗어나는 건 가능하겠지만, 그리 도망치는 동안 원정대의 거점과 기지는 전부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타격대가 퇴각을 위해 지원을 요청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2

패전이 확정되었음을 깨달은 원정군을 과연 지휘부가 통제하는 게 가능할까?

원정군은 와해된 채 몰살될 것이다.

퇴각을 입에 담을 바에 타격대는 자멸에 가까운 발악이라도 끝까지 했어아 했다.

볼루프가 희열을 드러내는 동안 원정군의 타격대는 전력을 다해 뒤로 물러서며 들끓는 전장을 벗어나려 했다.

그리고, 레이가 홀로 그 전장 위에 남아있었다.

츠즈즈즉!

최상위 방어 마법이 레이의 육신 위로 겹겹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고위 마법을 몇 번이고 전개할 수 있는 용랑의 마나가 레이 한 명을 보호하기 위해 모조리 투자됐다.

퇴각하는 아군을 뒤로하고 시간 벌이를 위해 전장에 남은 자를 위한 마지막 안배.

그 뻔한 수작을 비웃으며, 볼루프를 비롯한 마족이 레이를 제거하고 퇴각하는 타격대를 쫓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레이가 다가오는 마족들과 그 너머에 있는 불의 정령왕을 붉은 눈동자로 응시했다.

*

프레체스가 숨겨둔 비장의 수가 무엇일까.

그걸 미리 알 방도는 없었지만, 프레체스도 나름 자신이 있었기에 위험한 도박을 시도했을 터다.

그렇기에 원정군의 지휘부도 예상치 못한 뭐 하나쯤은 마경에서 튀어나오리라는 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상상력을 발휘했던 이들도 설마 불의 정령왕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불의 정령왕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원정군의 후방을 노리던 마족들의 공세도 더욱 거세졌다.

원정군을 궤멸시키기 위해 총공세가 시작됐고, 레이는 불의 정령왕 탓에 진형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밀려나는 타격대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자기 보호 수단을 제외하면... 이제 저쪽도 준비해둔 패는 거의 다 꺼냈으려나...'

당장 불의 정령왕만 어떻게 고꾸라뜨릴 수 있다면 원정군은 충분히 승리할 수 있었다.

허나 불의 정령왕을 무력화시키는 게 정말로 쉽지가 않았다.

아무리 공간검이 상성상 정형을 상대로 유리하다고 해도 정령왕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힘들었다.

그럼 결국 화염 정령의 요격에 집중하며 서서히 정령왕을 약화시켜야 했는데,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지연됐다.

'타격대가 아껴놓은 수를 모조리 사용하면 이 전투도 해볼 만하겠지만...'

불의 정령왕을 성공적으로 무력화시켰다고 해도 그사이 전진 기지가 궤멸하면 생환이 힘들었다.

"..."

레이는 마경에 진입하기 직전까지 자주 망상했다.

마경의 전력은 예상보다도 훨씬 변변치 못했고, 원정군은 쉽사리 마경을 쓸어버리고 승리를 쟁취한다.

레이는 무게를 잡으며 뒷짐을 지고 서 있기만 했음에도 원정군이 이루어낸 위업과 영광을 같이 나누었다.

뭐, 그런... 기분 좋은 망상 따위를 하며 홀로 실실 웃고는 했다. 정말로... 그리되었으먼 좋으런만.

"..."

레이가 품고 있던 하르시아의 잔흔 중 마지막까지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조각이 산산이 깨져나가며 레이에게 흡수됐다.

일시적인 동화 현상이 일어나며 레이의 육체와 정신을 짓눌렀으나 레이는 도리어 담담하게 웃었다.

"당신이 섰던 최후의 전장이 저 너머에 있어..."

혼자서 속삭인 레이가, 마침내 전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퇴각한다. 물러서."

레이가 발악하고 있던 타격대에게 명령했다.

허나 레이는 전장에서의 진퇴를 결정할 수 있는 명령권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방금의 명령은 미리 합의된 신호 중 하나였다.

타격대 모두가 레이의 신호를 이해했으나 바로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렸다.

타격대 대원들 중 대다수가 이 신호에 관해 '거리를 벌리라는 것' 외에 상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러서라고!!"

레이가 고함치자 그제야 대원들이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리 약속된 대로 레이의 육신 위로 방어 마법이 겹겹이 전개되었다.

레이는 제자리서 잠시 망설였다.

세계수를 마주했던 그때는 하르시아의 잔흔이 레이를 옳은 길로 인도해주었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그때에 비해 레이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

짓쳐들어오는 마족들을 앞에 두고, 레이는 알렉산데르와 바라보았던 퇴적된 풍경을 떠올렸다.

600년의 세월을 함께 거슬러 올라가며 떠올려본 그날의 풍경을 곱씹으며, 레이가 제국의 신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부족한 마나와 힘은 모로스의 증폭 작용을 활용해 메운다.

신체의 붕괴를 야기하는 반동과 후폭풍은 방어 마법으로 어떻게든 상쇄한다.

그리고, 부족한 재능과 경지로 인한 기술의 결함은 만물을 꿰뚫어보는 권능을 활용해 조정해야 했다.

"..."

붉게 물들어 있던 레이의 눈동자가 권능까지 덧씌워지며 새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레이는 뜨겁게 달귀진 숨을 짧게 내쉬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걸 사용할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러니까, 해내야만 했다

"..."

레이가 모로스를 들어 올릴 때까지 전장의 어느 누구도 레이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레이를 항해 가속하던 볼루프만이 레이의 눈동자를 마주 보고 영혼에 새겨진 공포를 떠올렸다.

볼루프는 자신의 공포를 부정했다. 그건 다분히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볼루프는 영혼에 새겨진 공포가 일으키는 착란 증세를 정면에서 이겨내고, 극복하고자 했다.

끄득!!

볼루프의 손아귀에서 뻗어나온 날붙이가 악신의 축복을 머금고 세차게 진동했다.

볼루프는 레이를 둘러싸고 있는 방어 마법을 단번에 부숴내고 레이의 목을 꿰뚫기 위해 팔을 뻗으려 했다.

허나 볼루프는 팔을 뻗기도 전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

고요했다.

너무나도 고요했다.

레이에게 다가선 순간 모든 흐름이 일시에 잦아들며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불가능해. 볼루프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입에 가득 머금었다.

하르시아는 소드마스터를 넘어 정의된 적도 없는 영역에 발을 들인 존재였다.

그 영역에 다다르고 나서야 최후에 완성시킨 기술들을 볼루프는 직접 보았다.

그리고 볼루프의 앞에 선 레이는, 하르시아가 닿았던 영역은커녕 소드마스터조차 되지 못한 반쪽짜리였다.

그런데도, 어째서, 네가 감히...

츠즉-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한 자루의 검이 홀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불가능하다고 나를 기만하지 말라고 너는 가짜라고 부정을 이어가던 볼루프는 그제야 레이의 눈동자를 다시 보았다.

그 익숙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볼루프가 한탄했다.

"나는 결국..."

대륙이 망각한 신화이자 마경이 지우고자 했던 악몽이...

"그날로부터 도망치지 못했구나."

재현된다.

재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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