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타격대가 전진하는 동안 원정군의 거점들도 계속해서 공세에 시달렸다.
언제 적습이 또 시작될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 경계를 이어가다 보니 체력이 빠르게 소진됐다.
타격대가 성공적으로 전진을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만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증오의 사도, 아룬델의 개입은 원정군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모습을 은폐하고 거점 가까이에 접근한 아룬델은 지휘관급 인물부터 저격으로 사살하고 공세를 시작했다.
아룬델을 홀로 저지할 수준의 강자가 존재하지 않는 원정군의 거점은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두 군데의 거점을 전멸시킨 아룬델은 연이어 13 거점 또한 붕괴시켰다.
이번에는 은엄폐에 시간조차 들이지 않고 정면에서 치고 들어갔으나 역시나 13 거점은 길게 버티지 못했다.
최후까지 저항하던 루카스는 팔다리가 짓이겨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꾸드득!
아룬델이 루카스의 가슴을 짓밟고 서서히 힘을 가했다.
갈비뼈가 차례차례 부러져 나가며 폐와 심장에 박혀 들었다.
고통 속에서 신음을 토하던 루카스는 마지막 비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지금... 즐겨둬라, 이 저주받은 놈들아... 결국 절망하는 것은... 네놈들이 될 것이다."
콰득!!
무표정하게 루카스의 가슴을 찍어 밟은 아룬델이 익숙한 마경의 풍경을 돌아보았다.
인근에 위치한 원정군이 중요도가 낮은 거점을 포기하고 두 군데의 거점과 전진 기지에 결집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려왔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버텨서 시간을 끌어보려는 수작이었지만, 쓸모없는 발악이었다.
잠시 다음 사냥감을 고민하던 아룬델은 모습을 채 가장 가까이 위치한 원정군의 거점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볼루프.
그는 마경에 귀속된 존재였다.
오랜 세월 존재해왔던 마족인 그는 600년 전 그날의 풍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의 악몽은 볼루프가 속해있던 마경의 세력을 주저앉혔으며, 또한 볼루프의 영혼에 존재치 말아야 할 공포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600년이 지나, 대륙의 최정예로 이루어져 있다는 수만의 대군이 마경을 침공했다.
허나 볼루프에게 공포를 새겨넣은 그날의 악몽에 비하면, 마경에 머리를 들이민 수만의 군세 따위는 너무나도 하찮은 잡것들이었다.
물론 마경 또한 수천 년 동안 쌓아왔던 악의를 대부분 소실하고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현재 마경의 전력으로는 대륙의 원정군을 일방적으로 압도할 수 없음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악신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드래곤이 시기에 맞춰 '계약'을 성사시켰다.
'오래된 노력이 마침내 빛을 보는군.'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존재다.
허나 그들 중에서도 화염 정령이라 칭해지는 부류들은 특히 성질이 거칠고 탐욕스러웠다.
그렇기에 암흑 정령으로 타락한 정령들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게 화염 정령이었다.
악신 세력들은 이에 착안하여 화염, 혹은 불의 정령왕이라 불리는 존재와 아주 오래전부터 접촉을 해왔다.
프레체스 또한 그러한 오래된 시도를 이어받았고, 마침내 정령왕과 계약을 성사시켰다.
'세계수를 불태울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했었나.'
볼루프가 알기로는 프레체스가 정령왕과의 계약을 성사시킨 결정적인 요인이 세계수였다.
초월적인 존재의 완전한 본신은 아니나, 그 파편이나 뿌리쯤은 되는 세계수를 취할 수 있다는 게 불의 정령왕에게 대단히 매혹적으로 작용한 모양이었다.
정령왕은 일반적인 정령과 궤를 달리하는 존재였기에 마경의 어느 누구도 정령왕과 일대일 계약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불의 정령왕은 '마경'이란 공간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계약이란 형태로 마경에 뿌리를 내린 불의 정령왕은 자기 본신의 일부를 마경에 현현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괴리되어 있는 공간인 마경이라 해도 정령왕의 본신이 제대로 형체를 갖추기엔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불의 정령왕은 다른 화염 정령들을 억지로 이 세상에 구겨 넣어 자신의 힘을 유지하고 중계할 매개체로 삼았다.
그리 온갖 수단을 동원했음에도 정령왕의 영향력은 '마경 내부'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그 정도만으로 이제 충분했다.
불의 정령왕은 계속해서 흔들리던 승부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충분한 힘을 지닌 존재였다.
프레체스가 전쟁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이유가 바로 불의 정령왕이었다.
"발악해 보아라. 그 잘난 하르시아의 기술로."
카가각!!!
볼루프가 레이를 향해 손아귀에서 뻗어나온 검을 휘두르며 조소했다.
로얄가드 두 명이 지원하자 레이는 볼루프와도 대등하게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레이가 하르시아의 기술을 계승했기에 로얄가드 두 명의 지원만으로 소드마스터의 역량을 지닌 볼루프를 맞상대할 수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화르륵!!
불의 정령왕이 전장에 접근하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하늘을 가득 뒤덮는 듯한 거대한 존재감이 이미 지옥에 가깝던 마경을 들끓는 지옥으로 완성시켰다.
온몸을 집어삼키려는 열기를 느끼며 레이가 권능을 사용해 불의 정령왕을 응시했다.
권능으로도 형상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불길로 뒤덮인 채 다가오고 있었다.
"..."
불을 관장하는 차원 너머의 지배자가 발하는 영향력은 최고위 정령 따위와도 비교가 불가했다.
불의 정령왕이 시선을 옮길 때마다 지면이 즉각적으로 끓어오르며 증기가 되어 폭발했다.
원정군의 타격대는 모두 경지에 오른 강자들이었기에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불의 정령왕의 시선을 속이거나 기만하는 것도, 불의 정령왕의 영향력을 무시하고 전진하는 것도 절대 불가능했다.
어떤 식으로든 불의 정령왕을 무력화시켜야만 했다.
더군다나 원정군의 타격대에게 주어진 시간마저 얼마 없었다.
"알렉산데르!!!"
여유가 사라진 레이가 모두에게 들리도록 알렉산데르를 불렀다.
알렉산데르는 곧장 전위에서 물러나 볼루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드득!!!
볼루프가 알렉산데르의 공격을 막아내며 레이와 떨어졌다.
알렉산데르는 절대권역을 다시 전개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기에 홀로 볼루프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는 없었다.
허나 잠시 시간만 끌어줄 수 있다면 충분했다.
화악!!
레이가 볼루프와 떨어지자마자 루나의 최고위 바람 정령인 에이라가 자기 등에 레이를 올렸다.
다른 타격대 대원들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고 마족들이 레이를 견제하지 못하도록 밀어붙이려 했다.
정령을 무력화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가진 자가 레이였기에, 지금 당장은 레이의 지원에 모두가 치중해야 했다.
불의 정령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장을 용암이 들끓어 증발하는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전장이 들끓어댈수록 마족 또한 피해를 받았으나, 손상된 육신을 수복하는 능력에 있어 마족이 인간을 한참 웃돌았다.
이대로 가다간 타격대에게 퇴각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에이라에 올라 탄 레이가 바로 소리쳤다.
"저 새끼한테 접근해!!!"
화아악!!
레이의 명령에 에이라가 들끓는 증기를 밀어내며 날아올랐다.
에이라의 날갯짓에는 공포와 함께 불의 정령왕을 향한 강렬한 분노가 느껴졌다.
마족들은 불의 정령왕에 접근하려는 레이를 방관하지 않았다.
원정군의 타격대가 발악하듯 밀어붙이고 있음에도 후방에 있던 마족들이 레이에게 수작을 부리려 했다.
그 찰나 라멘타 뒤에 서 있던 루나가 작게 읊조렸다.
"저지먼트."
아공간에 미리 고정시켜서 응축해놓았던 에너지가 해방된다.
마구잡이로 날뛰던 에너지가 오목하게 휘어진 아공간에 모여들어 한 점에 집중됐다.
그 직후, 새하얀 빛의 기둥이 마족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
쩌엉!!!!!!!
뒤늦게 방어를 시도했던 후방의 마족들이 몸이 반쯤 증발한 채 사방으로 튕겨져나갔다.
지형 자체를 붕괴시키는 위력을 지닌 마법이 전조 없이 발현되자 제아무리 준 로드 급 수준의 마족들이라 해도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마족들의 진형이 잠깐 박살 난 사이 레이는 무사히 고공으로 올라가 권능을 사용해 불의 정령왕을 탐색했다.
"...시발 진짜."
마경에 억지로 본신을 구겨 넣은 다른 정령들을 활용해 불의 정령왕이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음은 파악했다.
허나 어떻게 해야 불의 정령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불의 정령왕이 매개로 삼고 있는 화염 정령들을 죽이면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얼마나 많은 수를 죽여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만약 불의 정령왕이 추가적으로 화염 정령을 공급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냥 헛짓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레이가 잠깐 갈등하던 사이.
지면을 바라보던 정령왕의 시선이 레이에게 쏠렸다.
"?!"
화아악!!
정령왕은 열기를 뿜어내지 않았다.
단지 정령왕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 열기가 응축됐다.
삽시간에 대기가 끓어오르자 에이라가 다급히 몸을 가속시켜 열기를 회피했다.
들끓어대는 열기는 정령왕의 시선을 따라 에이라와 레이에게 따라붙었다.
레이는 사방에 넘실거리는 열기 탓에 시야가 잔뜩 일그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턱에 힘을 주었다.
"못 해먹겠네..."
불의 정령왕은 마치 시야에 닿는 범위 전부가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것처럼 힘을 행사했다.
지금보다 불의 정령왕에게 더 가깝게 접근해봤자 에이라가 먼저 불덩이가 될 터다.
레이는 결국 불의 정령왕과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음에도 서클과 코어를 공명시키며 두 자루의 검을 빙글 돌렸다.
촤악!!!
도약 검기가 공간을 갈라내고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리며 불의 정령왕에게 상처를 입혔다.
하지만, 인간에 비해 너무나도 거대하고 강대한 존재인 정령왕은 도약 검기에 상처를 입을지언정 치명상 따위는 허용하지 않았다.
불의 정령왕은 그저 불쾌해하며 시선을 좀 더 레이에게 집중했다.
그러자 레이와 에이라를 감싸듯이 주변의 열기가 들끓어 오르더니 중앙으로 집약되기 시작했다.
열기의 감옥에 갇힌 에이라가 순간 비행을 멈춘 채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
그때 레이가 에이라의 머리를 툭 치며 정면을 가리켰다.
"저기를 뚫는다."
[...]
에이라는 레이의 지시를 이행했다.
에이라가 가속하자 레이는 모로스의 끝에 검강을 압축시켜 구체 형태로 변화시켰다.
열기가 레이와 에이라를 집어삼키려던 순간.
모로스의 끝에 맺혀 있던 백색 구슬이 불의 정령왕을 향해 쏘아졌다.
으드드득!!!
백색 구슬이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정령왕의 열기조차 집어삼켜 중심부로 수축시켰다.
허공에 가득했던 잔열까지 흡수해가며 급속도로 크기를 불린 구체가 불의 정령왕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레이는 충혈된 눈으로 구체가 만들어내는 결과를 마지막까지 지켜봤다.
쩌엉!!!!!!!!!!!
빛이 터져 나왔다.
구체에 집약되었던 에너지가 폭발하며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냈다.
아무리 정령왕이라 해도 저 기술에 직격당하면 결코 무사할 수만은 없었다.
정령왕도 그 사실을 꿰뚫어보고서 이 세상에 본신으로 발을 들인 화염 정령들을 있는 대로 불러모아 방패로 삼았다.
레이가 그 꼴을 보며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욕설을 뱉었다.
"저 시발새끼가..."
단번에 수많은 화염 정령들이 증발했다.
그 때문에 불의 정령왕의 영향력 또한 상당히 축소됐다.
허나 여전히, 불을 관장하는 차원 너머의 지배자가 발하는 영향력은 실로 초월적이었다.
굉장히 마음이 상한 듯한 불의 정령왕은 레이에게 모든 권능을 집중시켰다.
콰아앙!!!!!
두꺼운 강철 따위는 삽시간에 증발시킬 열기를 에이라가 막아 세웠다.
다행히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에이라는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추락했다.
알렉산데르와 검을 나누던 볼루프는 레이가 결국 정령왕의 무력화에 실패하고 낙하하는 모습을 확인했다.
떨어지는 레이를 보자마자 볼루프는 알렉산데르를 밀어내고 레이를 향해 가속했다.
알렉산데르가 볼루프의 뒤를 쫓으며 외쳤다.
"레이!!!"
"..."
알렉산데르의 목소리를 듣고 레이가 다가오는 볼루프를 확인했다.
레이가 볼루프의 공격에 대비한 채 알렉산데르에게 수신호를 전했다.
다시 전위로 움직여 달라는 레이의 신호에 눈살을 찌푸린 알렉산데르가 일단 레이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지면에 착지한 레이는 코앞까지 다가온 볼루프를 향해 검을 마주 휘둘렀다.
콰앙!!!
힘에서 밀린 레이가 주르륵 밀려났다.
기관지가 화상을 입어 신음을 흘리는 레이를 찍어누르며 볼루프가 입꼬리를 찢었다.
"정말... 하찮구나...!"
"쿠윽... 크흡..."
"네놈은 인간을 선동하고 우리를 겁주기 위해 만들어낸 선전물에 불과하다."
볼루프는 검을 마주 댄 채로 집요하게 레이를 깎아내렸다.
600년 전 그날의 악몽이 영혼에 새겨놓은 공포가 아직까지도 볼루프를 괴롭게 했다.
그렇기에 볼루프는 더더욱 레이를 힐난하며 숨기려고 애썼던 두려움과 분노를 드러냈다.
"하르시아의 기술 몇 가지를 간신히 흉내 낼 수 있다고 네놈이 정말 하르시아라도 되는 줄 알았느냐?"
끄드득!
볼루프는 레이를 더더욱 강하게 찍어눌렀다.
그건, 볼루프에게 있어 오래된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악에 가까웠다.
레이는 점점 더 뒤틀려가는 근육을 느끼며 실소했다.
볼루프의 힐난이 거슬리지는 않았다.
볼루프는 하르시아를 누구보다 옳게 평가하고 있었다.
다만 레이는, 600년 전 하르시아와 제대로 검을 맞댈 용기도 없이 도망쳤을 놈이 기세등등해 하는 것이 조금 아니꼬왔다.
"겁쟁이가..."
검게 남아있던 레이의 한쪽 눈동자가 서서히 붉게 물든다.
"입만 살았군."
마치 600년 전 그날의 악몽처럼.
두 눈을 전부 붉게 물들인 레이가 볼루프를 마주 봤다.
재현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