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정령의 본신이 이 세계에 발을 들였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으나 굳이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원정군의 타격대는 마경에 진입한 후 괴이한 짓을 해대는 놈들과 지긋지긋할 만큼 마주쳤고, 분쇄했다.
정령의 본신이든 다른 무언가이든 칼만 박히면 문제될 게 없었다.
도리어, 무력화시키기 까다로운 일반적인 정령보다 본신 쪽이 더 상대하기 편할 수도 있었다.
정령의 본신을 이 세상에 구겨 넣은 '수단'이 무엇일까 거슬리긴 했으나 당장 해야 할 일은 변치 않았다.
타격대는 본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지옥의 가장 깊은 곳으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바람 정령인 칼가와 에이라는 저들의 언어로 심각하게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타격대의 전진을 도왔다.
이제 조금만 더 전진하면 고위 마법으로 초정밀 타격이 가능한 사거리 안에 목표 지점이 들어왔다.
그리고, 알렉산데르는 악의가 들끓는 듯한 마경 심부의 지면을 내디디며 비웃었다.
"이제야 모습을 보이는군, 겁쟁이들."
적의 주력이라 판단되는 무리들이 저 너머에서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타격대가 계속해서 소모되는 사이, 축복받은 대지 위에서 풍족하게 힘을 채운 마족들이 다가오는 먹잇감을 보며 입꼬리를 찢었다.
알렉산데르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나아가며 적들의 전력을 파악했다.
일단 눈에 보이는 마족놈들만 스물. 뒤로 물러나 있거나 은밀히 몸을 숨긴 놈들도 더 있을 터다.
마경 심부라는 극악의 전장과 변수까지 고려하면...
당장 시야에 보이는 마족놈들 전부가 준 로드 급에 필적하는 전력이었다.
저것이 진짜 적의 주력일까? 아니면 저것들마저도 미끼일까? 뭐, 이런 고민 따위는 알렉산데르에게 필요 없었다.
저것들마저 적의 미끼에 불과하다면 어차피 원정군은 궤멸이었다.
"말살한다."
알렉산데르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선두에 선 안소니우스가 성검의 광휘를 폭발시켰다.
쿠웅!!
검게 썩어있던 지면 위로 반투명한 푸른 대리석이 뒤덮이기 시작했다.
안소니우스를 중심으로 빛의 파편이 휘날리며 대기를 정화하고 축복을 쏟아냈다.
성검의 전력이 처음으로 해방되며 타격대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성물들이 성검과 감응하여 어둠을 밀어냈다.
안소니우스는 선두에서 성큼성큼 나아가며 검과 방패를 들었다.
대륙에서는 일대를 아예 빛으로 뒤덮었을 광휘가 고작 조각만한 전장을 정화하기 위해 소모되었으나, 이미 상정한 일이었다.
쩌엉!!!
날카롭게 갈려있던 방패의 끝이 가장 가까이 다가왔던 마족의 가슴을 찍었다.
방패를 막아내기 위해 마족이 교차시켰던 두 팔은 통째로 뭉개져서 떨어져 나갔다.
연이어 안소니우스는 측면에서 습격해오던 마족을 지면에서 뽑아 올린 빛의 사슬로 옭아매고 성검을 휘둘렀다.
성검이 마족의 어깨에 맞닿는 순간 거대한 해머가 강철을 찌그러뜨리는 굉음이 울렸다.
성검에 가격당한 마족이 튕겨 나감과 동시에 허공에 몸을 띄운 알렉산데르가 안소니우스의 방패를 위에서 찍어 밟았다.
다시 굉음이 울리며 방패 밑에 있던 마족의 몸이 양단되었고, 알렉산데르는 바로 마족 하나를 끝장내려 했다.
허나 그 직전 두 갈래로 갈라진 채 검게 물들어 있는 창이 음속을 한참 상회한 속도로 안소니우스를 향해 쏘아졌다.
쩌어엉!!!!!
방패로 창을 막아낸 충격을 완전히 상쇄하지 못한 안소니우스가 알렉산데르와 함께 뒤로 미끄러졌다.
정상급 성물이었던 방패의 상부가 고작 공격 한 번 막아냈다고 균열을 일으켰다.
알렉산데르는 몸이 양단되었던 마족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누군가의 도움으로 뒤로 물러난 마족은 벌써부터 양단된 육신을 수복시키고 있었다.
"까다롭군."
알렉산데르는 곧장 절대권역을 전개했다.
안소니우스가 펼쳐내는 신성 결계, 그리고 아군의 마법사들이 전개하는 마법을 손상시키지 않고 보조하기 위해선 절대권역이 일으키는 마나 지배 현상을 세심하게 조정해야 했다.
그게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반드시 해내야 했다.
"모든 병기와 모든 수단의 사용을 허가한다. 적을 말살해."
시간은 결코 원정군의 편이 아니었다.
대륙에서 결집한 최정예 전력이 끝까지 감춰두었던 전력을 드러내며 마족들과 충돌했다.
절대권역 속에서 알렉산데르는 마족들이 뿜어내는 마나를 지배하려 했다.
허나 마족들은 절대권역에 대비하고서 체내의 마나를 철저히 정제해 통제하고 있었고, 거기다 악신의 축복까지 뒤섞여 있었다.
절대권역의 마나 지배 현상으로도 마족들을 유의미한 수준으로 제약시키기 힘들었다.
애초에, 마경이란 공간 자체가 마족들에겐 절대권역에 비견되는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알렉산데르는 눈살을 잠시 좁혔다가 상공을 바라보았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발현된 마법들이 전장의 하늘에서 만나 상쇄되며 터져나가고 있었다.
하늘을 밝게 물들일 만큼의 화력을 쏟아내는 타격대의 주축은 라멘타였다.
정확히는 라멘타가 최종적으로 마법을 발현했고, 그 보조를 루나가 맡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라멘타가 홀로 마법을 발현하는 것 같았으나 실질적인 분담은 반반이었다.
지금 형태의 협력은 세계수를 찾아갔다가 헤어지기 전 레이와 라멘타가 미리 합의한 사안 중 하나였다.
그렇게 라멘타와 루나의 활약에 의해 마경의 심부에서 마족들이 쏟아내는 화력을 타격대는 완벽히 상쇄시켰다.
그리고, 상쇄된 마법들이 증발한 상공에는 통제되지 않은 마나가 넘쳐 흘렀다.
알렉산데르가 손아귀를 말아쥐자 하늘 위에서 빚어진 광검이 지상을 폭격했다.
콰가가가가강!!!
일방적으로 폭격을 얻어맞는 마족들을 타격대가 밀어붙였다.
로드 급 두 사람이 선두에서 찍어누르자 마족들 또한 연거푸 밀려나야 했다.
촤악!!
알렉산데르가 십 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던 마족의 다리를 참격으로 잘라냈다.
그러자 안소니우스가 기다렸다는 듯 가속해서 마족의 가슴에 성검을 박아넣었다.
마족은 심장이 박살나고도 죽지 않고 발악했으나, 안소니우스는 마족을 꿴 채로 성검에 깃든 신성력을 사방으로 쏟아냈다.
"크아악...!!!"
허우적거리던 마족은 이내 재가 되어 소멸했다.
이렇게 밀어붙여서 잡아 죽인 마족은 이제 고작 둘.
인간의 기준으로 치명상을 입힌 마족의 숫자는 열이 넘어갔으나, 저 빌어먹을 마족놈들은 어렵지 않게 상처를 회복했다.
쓰러진 마족이 상처를 회복하기 전에 확실히 잡아 죽이려 해도 집중적으로 견제가 쏟아져서 쉽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타격대의 대원 중 한 명이 전사하고 한 명은 팔이 잘렸는데, 타격대에게 이건 복구 불가한 피해였다.
이 개좆같은 마경 같으니라고.
전면에서 투쟁하는 대원들이 욕설을 씹어 삼켰다.
알렉산데르 또한 짧게 중얼거렸다.
"무리하게 하는군."
그건, 미리 합의된 하나의 신호이자 전술이었다.
어중간한 위치에서 도약 검기로 마족들을 견제하던 레이가 코어와 서클을 가속시킬 준비를 했다.
그와 동시에, 알렉산데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절대권역이 소멸했다.
"?!"
"...?"
마족은 물론이고 타격대의 대원들 대다수가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했다.
지금도 전황이 불리한데 소드마스터의 절대권역까지 사라지면 대체 어떻게 승리하란 말인가?
허나, 전장에 있던 이들은 얼마 안 가 절대권역이 소멸하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반경 수 km에 이르는 범위에 영향을 끼치던 절대권역은, 사라진 게 아니라 압축되었다.
찰나의 순간 거의 주먹만한 크기로 압축된 절대권역이 알렉산데르의 손아귀 위에 떠올라 있음을, 마족들은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절대권역은 급격히 압축되며 본래의 영역 안에서 지배되던 마나를 전부 끌어와 주먹만한 공간에 가두었다.
일반적으론 결코 유지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고밀도로 압축된 마나가 절대권역의 마나 지배에 의해 잠시 잠깐 형상을 유지했다.
위험을 인지한 마족들이 황급히 물러서려는 순간 구체 형태의 절대권역이 검의 형상으로 변형됐다.
"정말... 무리하게 하는군."
이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알렉산데르의 고유한 절기이자, 알렉산데르조차 막대한 반동을 감당해야 하는 섬멸기.
연속 사용이 불가능한 기술이기에 되도록 남겨두려 했으나 역시나 빌어먹을 마경이었다.
알렉산데르는 속으로 혀를 차며 검의 형상을 한 절대권역을 휘둘렀다.
!!!!!!!!!!
초고밀도로 압축된 힘의 덩어리에 의해 공간이 일시적으로 구겨졌다.
인간의 감각으로 감당 불가한 거대한 울림이 둔중하게 번져나가며 전장에 서 있던 모두의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그리고, 움직이는 절대권역의 궤적에 따라 그 궤적의 너머에 걸쳐있는 것들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데르는 찢겨나가려는 팔을 안으로 당기며 반원의 궤적을 그려냈다.
콰앙!!!!!!!!!!!!!
감각이 뒤늦게나마 약간 회복되며 굉음이 고막을 울려대는 게 느껴졌다.
방금의 일격으로 마족 다섯이 완전히 소멸했고 열둘의 마족이 형체를 거의 잃었다.
이곳이 마경의 '심부'만 아니었어도 열둘의 마족 또한 당연히 소멸했을 터다.
허나 이곳이 마경의 심부이기에 그것조차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레이가 나섰다.
레이의 손아귀에 쥐어진, 상위차원에 도약된 채 현실에 고정된 검이 이미 찢어발겨진 마족의 육신과 함께 영혼까지 부수고 베어냈다.
뿌드드득!!!
레이는 삽시간에 마족 다섯의 영혼을 박살 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시간이면 남은 일곱의 영혼도 박살 낼 수 있었다.
허나 그 전에 방해가 들어왔다.
"!"
카가가가각!!!
기습적인 적의 참격을 간신히 막아낸 레이는 수십 미터를 일방적으로 밀려나며 방어에 치중했다.
이제는 나름 완성 단계에 이른 검술을 구사하는 레이였으나 공세를 가하는 적은 기술적으로 레이보다 더 뛰어났다.
쾅!!!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적의 발길질을 레이가 검 손잡이로 간신히 막아냈다.
아직 인간의 형태가 상당히 남아있는 마족이 레이를 내려보며 조소했다.
"고작 그 수준으로 하르시아를 계승했다고 떠들고 다녔느냐? 모멸이자 모욕이로구나."
"그래. 모멸이자 모욕이지."
레이 또한 마주 조소하며 긍정했다.
"얄궂은 일이야. 그의 신화를 제대로 기억하는 존재가 네놈들밖에 없다니."
쩌엉!!!
로얄가드 두 명이 동시에 개입해 레이를 찍어누르던 마족을 쳐냈다.
마족은 물러서면서도 치명적인 공격을 로얄가드들에게 가했으나 허공을 찢고 떨어져 내리는 검기 때문에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섰다.
레이가 호흡을 고르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절대권역 같은 뚜렷한 초월기를 지닌 것 같지는 않지만... 이곳에서라면 소드마스터에 준하는 역량을 발휘하는 놈이다.'
저런 놈이 소수 숨어있으리라 예상은 했다.
저놈 말고도, 은폐하고 있던 마경의 전력들이 모습을 드러내 알렉산데르에 의해 붕괴된 전장을 틀어막으려 하고 있었다.
"밀어붙인다."
완벽히 압도할 수준은 아니었으나 현재로선 타격대가 우위였다.
레이 또한 전력을 다하려던 그때 알렉산데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19 거점과 17 거점이 붕괴됐다."
"...이렇게 빨리?"
중요한 거점이라 전력을 꽤 많이 배치해놓았던 거점이었다.
레이는 의아해했지만 알렉산데르의 설명을 듣고 바로 납득했다.
"사도, 아룬델이 움직였다는 보고다."
"시발. 울트를 피하고 후방으로 빠졌군."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이 전장에 아룬델은 없다는 소리였다.
"시간이 많지 않다. 전진 기지도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나누자고?"
레이는 알렉산데르가 전하고자 하는 의견을 바로 파악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타격대를 나누는 전술도 준비되어 있었다.
로드 급 한 명을 중심으로 준 로드 급 미만의 전력이 목숨을 소모하며 적을 틀어막고, 그 사이 남은 타격대가 전진해서 프레체스를 제거한다.
현 상황에서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전술이었다.
"내가 남겠다."
알렉산데르가 그리 전하자 레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헌데 그때 소드마스터에 준하는 역량을 지녔다고 판단되는 마족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수작이 빤히 보이는구나."
하지만.
"쉽지 않을 텐데?"
"...?"
레이가 황급히 지평선을 향해 눈을 돌렸다.
시야에 담기는 지평선이 전부 불길에 뒤덮여 있었다.
지평선 가까이를 뒤덮은 불길은 전장을 향해 가파른 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경악과 분노, 그리고 공포에 질린 칼가의 목소리가 레이의 귓가를 울렸다.
[설마 일족의 지배자가...]
"..."
정령왕.
인간에게는 그리 불리는 존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재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