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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331화 (331/446)

331화

원정군의 타격대는 빠르게 소모됐다.

아직 전사자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준비했던 '케이스'를 단시간에 대부분 사용했다.

마경의 심부로 향할수록 악신의 기운이 짙어지는 탓에 성물의 소진도 빨라졌다.

허나 물자를 소모하는 만큼 타격대는 목표 지점에 거의 근접하고 있었다.

처음 마경에 진입했을 때에 비해 목표 지점까지와 거리는 이제 2할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적의 진짜 주력과 맞부딪쳐야 함을 타격대는 직감하고 있었다.

"정지. 무장을 정비한다."

알렉산데르는 처음으로 적습 외의 상황에서 타격대의 전진을 멈춰 세우고 마지막 정비를 명령했다.

다들 몸을 멈춰 세우고 의식적으로 호흡을 골랐다.

이제까지 마경에서 상대한 놈들이 쭉정이가 대부분이었다고는 하나 적대적 환경 속에서 연전에 의한 정신과 육체의 피로는 무시할 게 못 됐다.

그나마 타격대의 대원 중 가장 체력을 안배한 자가 레이였다.

레이는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매우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타격대의 대원들 대다수는 레이가 소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것이 전술의 일종이라 이해했다.

마지막 재정비가 이루어지는 동안.

레이는 홀로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힌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이상을 알아차린 루나가 다급하게 다가서려는 순간, 안소니우스가 먼저 레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

안소니우스는 레이의 어깨를 붙잡고 조용히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이렇게 직접 레이의 몸에 신성력을 흘려 넣어보니 안소니우스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얼마 안 남았군."

안소니우스가 가까이 다가온 마경의 심부를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리자 레이 또한 답했다.

"그래, 얼마 안 남았지."

"...이 원정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네 도움이 필요하다."

어떤 기이한 수작도 파훼 가능한 레이의 공간검은 마경 공략의 가장 중요한 열쇠였다.

안소니우스는 레이에게 계속해서 신성력을 흘려 넣으며,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그리고, 더 혹사하면 생환하기 힘들 거다."

"..."

"이미 각오했나?"

"아니, 나는 살아서 돌아갈 거야. 꼭... 그렇게 할 거야."

멈춘 심장을 손으로 붙잡고 억지로 쥐어짜서라도,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꺼져 가던 레이의 눈동자에 막연하고도 강렬한 의지가 다시 빛을 채워넣었다.

안소니우스는 여전히 마경을 바라본 채 물었다.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나?"

"..."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참 많이 남아있기는 했다.

레아의 드래곤하트 문제도 마저 해결해주어야 했고, 태어날 자식들도 봐야 했고, 진실을 고백하고 사과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리고 레이는...

"루나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

이게 뒤늦은 후회이고 이기적인 욕망이라는 걸 레이는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레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루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안소니우스는 간절함이 깃든 레이의 바람을 듣고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도울 수 있다면, 내가 돕도록 하지."

안소니우스가 그리 말하자 레이가 피식 웃었다.

"너답지 않게 사교성 있게 구네."

"그래, 그렇군."

안소니우스도 동의했다.

돌이켜보면 레이보다 더 고결하게 스스로를 포장하려 했던 작자들도 많이 만났다.

허나 그들에게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적인 무언가를 안소니우스는 레이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그 차이가 대체 어디에서 오는지, 안소니우스 또한 잘 감이 잡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응급조치로 레이의 몸에 신성력을 흘려보낸 안소니우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하늘을 보았다.

"뭐가 또 오는군."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재정비를 마쳐가던 타격대는 하늘에서 강하하는 무언가가 수작을 부릴 때까지 기다려주지도 않았다.

쿠웅!!!

라멘타가 손을 한 번 움직이자 하늘을 비행하던 무언가가 알렉산데르 바로 앞에 처박혔다.

하늘에서 추락한 거대한 독수리를 닮은 놈이 알렉산데르를 향해 발악하듯 화염을 뿜어냈다.

화르륵!!

"...정령인가?"

알렉산데르는 다가오는 화염을 참격 한 번으로 갈라냈다.

그리고는 화염 정령이라 생각되는 놈의 대가리를 손아귀로 붙잡고 뒤틀어버린 뒤 비어있는 목에 검을 찔러넣었다.

꾸드득!

"...?"

생긴 건 정령처럼 생겼는데 칼이 아주 정직하게 박혔다.

헌데, 무려 소드마스터가 발현한 검강이 이 정체 모를 놈의 목을 쉽사리 파고들지 못했다.

알렉산데르는 좀 더 힘을 주어 검을 깊숙이 박아넣으며 라멘타를 돌아보았다.

"이건... 마물인가?"

"..."

라멘타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알렉산데르에게 붙잡혀 있는 놈의 살갗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타격대의 대원들이 고문이라도 하는 것처럼 번갈아가며 놈의 육체에 무기를 찔러댔다.

헌데 도대체 이놈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 개체인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레이도 검을 들어 미약하게 검기를 생성해서 놈의 날개에 휘둘러 보았다.

촥!

의외로 쉽게 잘렸다.

근데 여전히 이게 마물인지 다른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당혹스러워하는 정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가능해...!]

칼가였다.

[불가능한 일이다.]

"...?"

겁에 질린 듯 몸을 떨어대는 칼가를 돌아본 레이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혹시 아는 게 있나?"

[이건 불가능하다...!!!]]

"칼가!!"

레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칼가가 한발 물러서며 레이를 돌아보았다.

레이가 표정을 굳힌 채 다시 물었다.

"저게 뭔지 알아?"

[...]

"칼가, 아는 게 있으면 대답해."

[...인간, 저건 나의 동족이다.]

"...뭐? 정령이라고?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그러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찌 너희의 차원에 본신으로 발을 들일 수 있단 말이냐!!]

"...!"

정령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차원과 다른 차원의 존재였다.

그리고 차원과 차원 사이에는 서로의 교류를 제약하는 경계가 존재했다.

차원 사이의 경계는 일방통행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하위 차원의 존재를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상위 차원의 존재가 하위 차원에 무분별하게 힘을 행사하는 걸 제약하는 역할도 했다.

레이가 계승한 하르시아의 공간검은, 이러한 경계를 넘어서 상위 차원의 존재를 갈라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어쨌든, 정령은 차원의 경계를 넘어 인간들의 세상에 힘을 투영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본신이 넘어올 수는 없었다.

정령이 본신으로 인간들의 차원에 넘어온다는 것은... 과장을 많이 덧붙여 비유하자면 3차원 존재를 2차원 평면 위에 구겨 넣는 꼴이었다.

아무리 특수한 환경인 마경이라 해도 정령이 본신으로 이 차원에 발을 들인다는 건 설명이 안 됐다.

그때, 마침내 숨이 끊어진 화염 정령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펑! 하고 터졌다.

공간을 잠시 일그러뜨린 정력의 육신이 얼마 안 가 소멸했다.

[이런... 이런 일이... 이런 일이...]

칼가는 패닉이 왔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부족하게나마 상황을 파악한 타격대의 대원들은 다들 표정을 굳혔다.

지금 마경에서, 아주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황도 근방에서 적습이 발생했다.

전시상황이었던 만큼 적습에 관한 보고는 기민하게 제국 상부로 전달되었다.

보고를 받은 제국의 지휘부는 상당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습격자는 전조가 거의 없는 소규모 워프로 황도 근방에 출현, 그리고 단독으로 제국의 방위군을 뚫고 안쪽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습격자가 분신을 다룬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그게 정말 분신인지 아니면 은폐하고 있던 지원군인지는 확인이 필요했다.

현 시점에서 확실한 건 습격자의 무위가 최소 준 로드 급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습격자는 제국의 방위 시스템을 파악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약점을 찔러 들었다.

그 때문에 방위를 위해 전개된 결계 몇 개가 제대로 기능하기도 전에 파훼됐고, 결국 습격자가 대도시로 진입하는 것을 허용했다.

민간인이 많은 대도시로 습격자가 진입한 이상 방위 수단이 제한되었다.

습격자는 그 점을 활용해 방위군의 공세를 약화시키고 계속해서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동 방향만 보면 습격자의 목적지는 황도라고 추측됐다.

그리고, 황도까지 향하는 경로 도중에 헬름 자작령이 위치해 있었다.

헬름 자작령은 현재 전선에 나가 있는 레이의 지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적습... 그것도 한 명? 그런데 준 로드 급? 방위군의 사상자만 벌써 일백이 훨씬 넘었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황성에서 상시 대기 중이었던 지휘관급 인물들이 곧바로 적습에 대처하기 위해 논의를 시작했다.

"습격자의 신분은 파악되었소?"

"분신을 다루는 고위급 흑마법사가 알리모 근처에서 목격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하지만... 현재로선 동일 인물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소."

"알리모? 그렇다면 혹시 금지된 숲 사태와 관계된... 하아, 그분의 친지들을 노린 습격일 수도 있겠소."

"양동일 확률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저는 습격자에게 다른 노림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대 의견에 동의하오. 화려하게 눈길을 끄는 의도는 뻔하겠지. 그러니 더더욱, 혼란이 커지기 전에 빠르게 제압해야 할 것이오."

"포격으로 사살하는 건... 힘들겠군."

황성의 포격을 활용하면 준 로드 급 수준의 습격자라도 증발시켜버릴 수 있었다. 그건 확실했다.

허나 아무리 습격자가 강하다고 해도 고작 습격자 하나 잡자고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를 함께 반파시킬 수는 없었다.

"어쨌든 지원 병력을 보내야 하오. 지금 당장."

마경 원정에 인력과 물자를 투자하느라 현 제국의 방위군은 몇 달 전에 비해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넓게 분포되어 경계 임무를 수행 중인 방위군을 한 곳에 전부 밀어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적습을 막아낼 지원 병력이 필요했다.

"헬름 자작령의 요인들은 황도 안으로 대피시킴이..."

"추가적인 호위 병력을 다수 지원할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소."

아직 습격자의 정확한 목적과 추가 전력의 유무를 파악하지 못했다.

확실한 건 로얄가드 급 강자를 주축으로 한 다수의 고위 전력을 파견해야 현재의 적습을 확실하고 안전하게 저지할 수 있었다.

"..."

우회적으로나마 충분히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한 지휘부의 인물들이 황좌에 앉아있는 황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현재로선 이 사태를 신속히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황도의 병력을 움직이는 것이었고, 황도를 수호 중인 다수의 고위 전력을 움직이는 것은 황제의 제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허나 황도를 수호 중인 고위 전력을 움직이는 게 황제에게는 굉장히 껄끄러울 수 있었다.

특히나 지금의 적습은 누가 봐도 양동의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홀로 정면에서부터 화려하게 파고들어 대놓고 시선을 끌어대는데 양동이나 자살이 목적이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됐다.

그렇기에, 지원 병력은 보내되 핵심 고위 전력의 파견은 유보하는 것도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어느 쪽이든 신속한 결정이 필요했다.

허나 황제는 지휘부의 인물들이 대놓고 눈치를 보고 있음에도 침묵을 유지했다.

한시가 급했기에, 결국 황제를 가까이서 수호하던 에른스트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에른스트는 황제가 병력 지원에 소극적이라면 대기하고 있는 자기 수하라도 헬름 자작령에 지원을 보낼 생각이었다.

웬만하면 황제의 의중을 가장 우선했던 에른스트였지만, 이번만은 자기 의견을 확고히 개진하려 했다.

허나 에른스트가 의견을 개진하기 전에 황제가 먼저 침묵을 깼다.

"프리슬란 후작."

"하명하십시오."

"직접 다녀오게."

"...!!!!!"

지휘부의 인물들은 물론이고, 석상처럼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던 로얄가드들조차 황좌를 돌아보며 당혹을 드러내는 무례를 저질렀다.

제국의 소드마스터이자 황제를 수호해야 할 제국의 최고 전력을,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 해도 전시상황에서 황도 밖으로 파견하겠다니.

차라리 황성에서 대기하던 로얄가드를 다수 파견하는 게 이치에 맞았다.

에른스트 또한 황제의 결정에 당혹스러워하며 일단 물러서려 했다.

"폐하, 하오나..."

"프리슬란 후작, 그대 홀로 자리를 잠시 비운다고 짐의 안위가 위태로울 만큼 제국의 충신들은 나약하지 않네."

"..."

"황명일세. 신속히 위협을 제거하게. 헬름 자작령에 해를 끼치기 전에."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에른스트가 황제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춘 후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걸어 황성을 벗어난 에른스트는 황성의 문이 닫히자마자 곧장 굉음과 함께 빛살처럼 가속했다.

한편. 도시를 방패 삼아 방위군의 공세를 회피하며 헬름 자작령으로 향하던 리실로테가, 처음으로 걸음을 멈추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이런, 설마 황제가 그자를 움직이리라고는..."

온갖 변수를 가정했던 리실로테였으나 지금 상황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자기 안위를 가장 우선시 해야 할 황제가 위험을 감수하며 제국의 소드마스터를 움직일 것이라 대체 누가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소드마스터가 체력 안배를 생각 않고 작정하고 움직이면 황성에서 헬름 자작령 정도의 거리는 단숨에 주파 가능했다.

리실로테가 에른스트보다 헬름 자작령에 더 빨리 도착하지 못하면 기껏 강탈한 육체를 날려 먹게 되는 꼴이었다.

여유가 사라진 리실로테가 이미 폭주하고 있던 심장의 서클을 아예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재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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