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원정군의 타격대 숫자는 서른.
1선과 2선으로 나뉜 타격대는 서로 수십 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전진할 준비를 했다.
타격대를 1선과 2선으로 나눈 이유는 역할 분담 문제도 있었으나 울트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다.
게네시스를 소유한 울트가 너무 가깝게 붙어있으면 타격대의 엘프들도 영향을 받기에 최소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레이는 루나와 계약한 바람 정령을 바라보며 잠시 아쉬워했다.
'마경이 아니었다면 정령을 이용해 비행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했는데...'
고위급 이상의 바람 정령이 고공에서 비행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다.
허나 적대적 환경인 마경 내에서는 정령의 능력 또한 제한된다.
더군다나 마족 중에서도 정령을 제압하는데 특화된 능력을 지닌 존재나, 혹은 고위 바람 정령보다 기동성이 우월한 개체가 분명 존재할 터다.
'높은 고도까지 올라가 비행했다가 변수에 대처 못하고 추락하면 오히려 상황이 나빠질 확률이 높으니...'
타격대 중 지상에 추락해 낙사할 인물은 없었지만 추락 과정에서 공격을 받아 타격대가 흩어지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졌다.
그렇기에 타격대는 바람 정령의 기동성은 최대한 활용하되 육로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신속하게 이동한다."
알렉산데르가 타격대에 명령을 내리고는 한 가지 당부를 덧붙였다.
"적의 진짜 주력이 출현하기 전까지 최대한 힘의 소모를 줄이도록."
최대한 신속하게 적진을 돌파하되 힘의 소모는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모순된 요구였지만 누구도 반문하지 않았다.
지평선 너머에 일렁이는 악의를 느끼며 타격대가 걸음을 내디뎠다.
*
지면이 계속해서 흔들렸다.
비명이 메아리치고 검은 핏물이 지면을 적시다 못해 흐르고 있었다.
침묵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족은 점점 더 다가오는 진동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지평선 너머에서 찬란한 광휘가 뻗어나와 악신의 기운을 몰아내고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성물이라도 마경에서 저토록 찬란한 광휘를 발할 수는 없었다. 성검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반, 그런 이름을 지니고 있는 마족은 멍하니 앉아 멀리서 빛나고 있는 성검을 바라보았다.
당장은 거리가 꽤 있었지만 안소니우스를 선두로 한 타격대는 곧 이반에게 닿을 게 분명했다.
성검에서 뻗어나온 신성력의 기류는 이미 이반이 앉아있는 장소까지 휩쓸어대고 있었다.
"..."
이반은 마족이 된 이후 악신에게 종속되어가며 자유 의지와 과거의 기억들을 스스로 망각했다.
헌데 성검으로부터 뻗어나온 신성력의 기류가 이반의 머릿속에 내려앉은 안개를 잠시잠깐 밀어냈다.
"성검인가..."
마경 안에서도 엘-람의 축복을 매개하며 신성력을 증폭시키는 성물.
성검이 대체 어떻게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지 현재도 명확히 밝혀진 게 없었다.
이반 또한 성검의 내부 구조 따위는 알지 못했으나, 성검이 어떻게 주조되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이반이 인간으로 살았던 시대에 성검이 주조되었으니 말이다.
성검은 금속으로 주조되지 않았다.
성검은 엘-람을 숭배하는 신도들의 믿음과 희생으로 주조되었다.
이반이 인간으로 살았던 시대는 야만과 광신의 시대였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
당시를 살아가던 수많은 신도가 기꺼이 희생을 자처하며 환희했다.
숭배하는 절대자의 축복을 지상에 담아낼 수 있는 성물을 창조하기 위해 희생할 수 있다니, 그만한 영광이 또 어디있겠는가?
셀 수 없이 많은 신도들이 스스로 육신과 혼을 희생한 끝에 마침내 가장 위대한 성물이 탄생했다.
이반 또한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이반의 부모는 엘-람의 신도로서 다시 없을 위대한 영광을 누리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희생하길 자처했다.
희생을 허락받은 이반의 부모는 환희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던 이반은 죽음이 두려웠다.
그래서 더욱 나이가 어렸던 동생을 데리고 마을에서 도망쳤다.
물론 마을을 멀리 벗어난 적도 없었던 두 꼬맹이는 길을 헤매며 도망가다 금방 어른들에게 잡혔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더라...?
이반은, 불에 타는 고기 냄새 같은 것을 잠시 느끼고는 입을 열었다.
"막아."
쿠우웅!!
인근을 가득 메우고 있던 거대한 마물들이 이반을 지나쳐 원정군의 타격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본디 아무리 대단한 마물이라 해봤자 엑스퍼트 급 이상의 전력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개체는 극소수였다.
허나 타격대를 향해 마주 돌진하는 마물들은 달랐다.
돌진하는 마물들은 누군가의 악의에 의해 아주 끔찍하게 변형되어 있어 본래의 형체가 예상되지도 않았다.
악신의 축복이 흐르지 않는 마경 밖에서는 잠시도 존재를 유지할 수 없는 변형체들.
마경 안에서만 간신히 생존을 허락받은 마물들은 그 역겨운 형체만큼이나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저리 극심히 변형된 마물들은 일단 부딪쳐 봐야 각 개체가 지닌 고유한 특성을 알 수 있었기에 안전한 공략이 힘들었다.
물론, 준 로드 급 이상이 다수 집결한 타격대는 앞을 막아서는 마물들을 단번에 갈라내며 속도를 유지한 채 돌진했다.
어지간한 마물들은 바람 정령의 지원을 받는 타격대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뒤늦게 타격대를 쫓아 방향 전환을 하다 서로 얽혀서 고꾸라지는 마물들이 속출했다.
촤아악!!!
타격대는 앞을 막아서는 마물들만 깔끔하게 제거한 채 가속했다.
그때, 검붉은 하늘이 더욱 어두워지며 끈적한 기운이 전투가 벌어지던 공간을 잠식했다.
"...?"
공간이 끈적거린다.
레이가 그런 느낌을 받으며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몸을 밀어주던 바람의 세기가 약화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레이가 이동을 지원하던 고위 정령 칼가를 돌아보았다.
"칼가, 뭐가 문제지?"
[본신과의 연결이 약화됐다.]
대화를 허락받은 칼가가 대꾸했다.
[공간을 잠식하고 있는 기운이 본신의 힘을 이 차원에 구현하는 걸 억제하고 있다.]
"혹시 본신이 손상을 입었나?"
[그건 아니다.]
"그럼 큰 문제는 아니네."
정령의 본신이 손상된 게 아니라 힘의 발현이 제약되었을 뿐이라면 이 일대를 벗어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정령의 힘이 제약되며 돌진 속도가 늦춰진 탓에 마물들이 좀 더 귀찮게 굴었지만, 고작 그뿐이었다.
헌데 그때.
막힘 없이 전진하던 타격대의 머리 위에 그림자가 잠깐 졌다.
콰아아아앙!!!
기습적으로 날아온 포격이 정확하게 원정군의 타격대를 명중시켰다.
지반이 내려앉게 만드는 위력을 지닌 포격에 타격대 또한 잠시 전진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연속해서 강력한 포격이 타격대를 향해 정확하게 쏟아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고위 마족인 이반이 가까운 거리에서 포격을 유도하고 있었던데다, 마경 안에 가득한 악신의 보살핌이 포격의 정밀성을 이해 불가한 수준까지 높였다.
지평선을 한참 넘어선 거리에서 쏘아진 고화력 포격이 머리 위에 떨어져 대니 타격대도 바로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마물들도 포격에 당해 곤죽이 되어 터져나갔으나, 마물들은 머리가 완전히 박살날 때까지 이해 불가한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며 타격대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마법사."
알렉산데르가 마법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려 하는데 레이가 반대했다.
"아직은 아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마경에서는 마나 회복이 힘들다.
서클과 공명시킬 순수한 마나도 대기에 부족해서 마법사들은 더욱 신중하게 마나를 소모해야 했다.
교전 중인 만큼 알렉산데르는 존대를 생략하고 짧게 물었다.
"대안은?"
"차라리 케이스를 먼저 소모하는 건?"
"...그렇게 하지."
레이의 의견이 충분히 합리적이라 결론 내린 알렉산데르가 명령을 바꾸었다.
"17번, 39번 케이스의 무장을 사용한다."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허공이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허공에서 은색 케이스가 아공간을 비집고 나왔다.
레이가 이전에 알리모에서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기술로 제작된 일회용 아공간 수납 기능을 지닌 아티펙트였다.
두 개의 은색 케이스는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지면서도 십여 개의 무장을 온존히 타격대에 전달했다.
그 십여 개의 무장 전부가 이미 개조를 마친 정상급 아티펙트였다.
타격대 중에서도 아티펙트를 다루는 소질이 특히 뛰어난 자들이 새로운 무장을 손에 쥐었다.
그 직후.
쫘아아아악!!!!!
강력한 열선이 뻗어나와 타격대와 가까이 있던 변형된 마물들을 단번에 증발시켰다.
마물을 증발시킨 열선은 타격대의 머리 위에 떨어지던 포격마저도 일시적으로 요격해냈다.
그와 동시에 여섯 개의 아티펙트가 빛살처럼 하늘 위로 쏘아졌다가, 붉은 구름을 꿰뚫었을 때쯤 표적을 향해 방향을 돌린 후 다시 빛살이 되어 지평선 너머로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내린 아티펙트가 폭발을 일으키며 만들어낸 땅 울림이 느껴진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
모습을 숨기고 있던 마족들이 뒤늦게 수작을 부리려 했지만 그보다 앞서 쏘아져 나간 푸른 아티펙트가 전개 직전이었던 마법진의 술식을 흩트리며 마족들의 몸체를 꿰뚫었다.
대부분의 마물은 증발했고 더는 포격도 떨어져 내리지 않았다.
적의 공세를 완전히 짓밟아버린 타격대는 자그마한 환호조차 없이 곧바로 다시 전진할 준비를 갖췄다.
그들의 선두에 선 안소니우스는 전장에 남은 마지막 마족을 정리하기 위해 성검을 높이 들었다.
그때까지도 이반은 잠이 든 것처럼 미동도 않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촤악!!
성검이 이반의 어깨를 파고들어 심장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이반은 그제서야 손을 움직여 성검의 날을 움켜쥐었다.
안소니우스는 개의치 않았지만, 놀랍게도 이반은 안소니우스의 참격을 멈춰 세웠다.
치이익-!
허나 이미 성검은 이반의 심장을 부숴버렸고, 성검을 움켜쥔 이반의 손아귀는 강력한 신성력에 의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반은 자신의 육신을 태우는 성검을 내려보다 눈을 감았다.
"뜨겁군, 그날처럼."
"...!!"
쩌어어엉!!!!
자폭이었다.
지면 아래 은밀히 고여 있던 오염된 마나가 이반과 함께 폭발하며 일대를 집어삼켰다.
어지간한 생명체는 완전히 증발시킬 위력의 폭발이었다.
허나 들썩이는 지면이 가라앉은 뒤.
불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서른 명의 타격대는 전부 무사했다.
그 대신, 안소니우스가 사용한 방어용 성물이 기능을 다하고 빛을 잃었다.
성물을 하나 더 소모하게 된 안소니우스는 눈살을 잠깐 찌푸렸다가 다시 전진했다.
*
프레체스는 권능을 활용해 다른 마족의 눈으로 전장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원정군 타격대의 전진 속도가 예상보다 조금 빠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계획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미리 배치해놓았던 병력과 함정은 계속해서 원정군 타격대의 체력과 물자를 소모시키는 중이었다.
당장은 큰 피해가 없어 보였지만 체력과 물자의 손실은 분명히 타격대에 축적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경의 진짜 주력이 소모된 타격대를 집어삼키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아직인가?]
아룬델이 묻자, 프레체스가 답해주었다.
"기다려."
아룬델은 원정군의 후방을 공격하기 위해 대기하는 중이었다.
마경의 주력 중 누군가는 원정군의 후방을 무너뜨려 퇴로를 차단해야 했는데, 그 적임자가 아룬델이었다.
원정군의 타격대가 마경의 주력과 마주쳤을 때, 아룬델은 원정군의 후방을 습격해 완전히 무너뜨릴 예정이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알겠다.]
흐릿한 환영처럼 모습을 드러냈던 아룬델이 고개를 끄덕인 후 사라졌다.
프레체스는 전장을 관통하듯 전진하는 타격대를 응시하며 속삭였다.
"너희는, 이곳에서 죽을 거야."
급조된 원정군에 비해, 미리부터 이 도박판을 준비하던 프레체스는 그들을 섬멸한 확실한 수단을 지니고 있었다.
재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