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이건 자살 행위다.
아주 멍청한 자살 행위였다.
대마법사의 서클이 녹아든 아티펙트를 보유했다고 해도, 일피림은 고작 7서클 마법사였다.
고작 7서클 수준의 육신으로 워프 계열 마법을 홀로 전개하는 것은 그냥 자살이었다.
허나 리실로테는 일피림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마법을 끝까지 전개해 발현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워프에 성공하기는 했다.
쩌어어엉!!
워프에 성공한 직후.
그 반동으로 인해 육신이 걸레짝으로 변함과 동시에 주변의 지반이 내려앉았다.
시야가 벌게지며 핏물이 사방으로 튀어댔으나 리실로테는 개의치 않고 몸을 일으켰다.
"도착했어."
리실로테는 과거에 개조됐던 영맥을 1회용 간이 게이트이자 공간 좌표를 특정하기 위한 신호기처럼 사용했다.
그 여파로 인해 영맥이 흐르던 지반은 완전히 녹아내려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 거칠고 갑작스러운 워프를 대륙의 수많은 마법사들이 감지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리실로테가 워프한 지점은 황도와 가까웠다.
정확히는, 황도와 황도 인근의 도시 몇 개를 보호하기 위해 구축된 방위권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지역에 워프했다.
방위권에 살짝 벗어난 지역이라 해도 워프가 감지된 이상 곧장 제국의 방위군이 움직일 터다.
[당장 모습을 숨기고 물러나!!!]
"자, 시작하자."
쩍쩍 갈라진 채 섬광을 내뿜는 알레아를 손에 쥔 리실로테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일피림에게도 익숙한 분신들이 순차적으로 생성되어 리실로테와 함께 나아갔다.
일피림은 무리한 마나의 운용으로 인해 자신의 육신이 급격히 붕괴해가는 것을 인지하고 잠시 말을 잃었다.
리실로테는 일피림에게 육신을 되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일피림의 육신은 리실로테에게 짧게 쓰고 버릴 소모품일 뿐이었다.
일피림은 자신이 직면한 현실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침묵했다.
허나 소수의 제국 방위군과 맞닥뜨린 리실로테가 대놓고 방위군을 학살하고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을 때.
일피림은 냉정하게 자신이 생존하기 글렀음을 인정했고, 또한 분개했다.
[대체 내 몸으로 뭘 하고 싶은 거야?!!! 목적이 뭐냐고!!! 대답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자신의 몸을 차지한 귀신이 어째서 이 지랄을 하는지라도 명쾌히 알고 싶었다.
일피림의 광기 어린 고함을 들은 리실로테는 흘러나온 병사의 내장을 밟고 나아가며 싱긋 웃었다.
"분개하지 않아도 돼. 네 희생은 충분히 값질 테니, 너도 만족할 거야."
[자꾸 개소리를...!]
"일피림, 마경 원정은 성공할 거야."
[뭐...?]
"그 아이는 해낼 거야. 조잡하고 결함이 가득한 복제품이었을 뿐인 그 아이에게서... 이제는 그리움을 느껴."
리실로테는 중무장한 기사 하나를 찢어 죽이며 잠시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시작은 거짓이었지만, 이제 그 아이는 진실로 하르시아의 검을 이었어."
머리 위에 쏟아져 내리는 마법을 손짓 한 번으로 지워낸 리실로테가 알레아를 제국군에게 겨누었다.
"하르시아가 그리했듯, 그 아이 또한 대륙을 구원하고 제국을 연명시키리라고... 나는 믿어."
알레아로부터 터져 나온 섬광이 채찍처럼 휘둘러져 일대를 증발시켰다.
리실로테는 열기를 밀어내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원정은 성공할 거야. 마경은 어느 때보다 수축할 테고, 제국은 더욱 강대해지고, 대륙은 완벽히 정화될 거야. 이미 한계에 달한 그 아이는 얼마 못 가 눈을 감을 테고... 루나 또한 그 아이를 따라가겠지."
그게 레이가 선택한 결말이었다.
허나 리실로테는 그런 결말을 용인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결말은... 엘-람의 '완벽한 승리'를 의미했으니까.
"하하하하하... 안 되지,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실없이 웃던 리실로테가 표정을 굳혔다.
"엘-람... 그 증오스러운 존재가 이 세상을 손에 넣게 두지는 않을 거야. 그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함께 파멸할 거야."
[...그게 지금 이 미친 짓과 무슨 상관이지?]
"레이... 제국의 수호자이자,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추대될 성웅. 그런 인물이 귀여운 아이를 보호하고 있어. 이름은 레아라고 해."
[그게 어쨌다고?]
"레아, 그 아이가 황족이야."
[...!!!]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어 경황이 없던 일피림조차 순간 경악할 만큼, 그건 충격적인 정보였다.
[황족? 황족이라고 했어?]
"제국이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황족이야. 자기가 어미처럼 생각하는 여인의 친자라는 이유로, 레이가 보호하고 있었지."
수없이 갈등했음에도 레이는 자기 동생을 처분하지 못했고, 결국 레이에게 레아는 애증의 존재가 되었다.
단명할 운명을 타고난 레아를 구하기 위해 레이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자처했던가.
레이는 자기 수명까지 소모해가며 레아에게 헌신했고, 그 덕분에 레아는 성년까지 무사히 성장했어야... 했지만.
"우리는 레아에게 갈 거야."
[...?]
"그리고, 그 아이가 용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황제의 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상황을 유도할 거야."
[...!!]
"네가 벌인 이 무모한 습격으로 인해, 우연찮게 그렇게 될 거야. 후대는 너를 혼돈의 시발점이었다고 기록하겠지."
[너...!! 대체...!!]
"레아.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이 은밀히 비호한 황족. 그런 존재를 용인해줄 만큼 황제가 멍청하지는 않을 텐데..."
과연 레아의 존재를 확인한 황제는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을까.
역사 속의 무수한 사례들을 돌이켜본 리실로테는 하늘을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엘-람, 증오스러운 네놈이 웃는 꼴을 두 번은 보지 않으리라.
설령 함께 파멸한다 해도, 나는 결코 네놈이 승리하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레이...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할게. 너의 마지막 전장은 이곳이 되어야 하니까."
저 멀리서 리실로테를 막기 위해 추가로 파견된 제국의 방위군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리실로테는 속도를 높일 준비를 하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정말 궁금해, 레이."
네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것을 모두 잃고 난 다음에도.
"루나와 맺었던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네가 지킬 수 있을까?"
*
같은 시각 마경.
전진 기지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원정군은 다시 진군했다.
원정군은 수월하게 진군을 이어갔고, 필수적인 요충지에 임시 거점을 다수 구축했다.
간간이 앞을 막아서는 악마 숭배자들도 있었으나 전부 다 쭉정이였다.
덕분에 원정군은 목표치의 8할에 달하는 임시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최종 표적인 프레체스가 위치해 있는 지점과의 거리도 마경 진입 직후에 비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와 함께, 임시 거점을 수호하기 위해 원정군의 병력 또한 상당히 분산되었다.
이제는 속 보이는 소꿉장난을 끝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폭풍전야. 현 상황에 그보다 더 어울리는 수식을 찾기 힘들었다.
그리고, 원정군의 전진 기지에 가장 먼저 이변이 찾아왔다.
"..."
로얄가드 파울라는 직접 전진 기지 주변을 경계하며 날을 세우고 있었다.
언뜻 평화롭게까지 보이는 이 전장이 곧 지옥으로 변하리란 것을 파울라 또한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집중하고 있던 파울라는 지평선 너머에서 자그마한 점 같은 것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하늘로 향했던 점은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파울라의 머리 위에서 급격히 크기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파울라가 외쳤다.
"포격이다!!!"
"!!"
다들 급히 포격에 대비했다.
물론 전진 기지는 강력한 포격을 방어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도 파울라가 미리 경고해주었기에 마법사들은 방어 결계를 조금 더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윽고 전진 기지에 검은 덩어리가 낙하했다.
검은 덩어리는 전진 기지에 잠깐 그림자를 지게 할 만큼 컸다.
콰아아아아아앙!!!!
지진이 난 것처럼 지면이 흔들렸다.
그 지면 위에서 비틀거리지도 않은 파울라는 황급히 기지의 피해를 확인했다.
전진 기지가 포격을 막아내긴 막아냈다.
허나 정예병들 중 다수가 충격파에 휩쓸려 땅을 굴렀고, 꿀렁거리는 포탄이 터지면서 흘러나온 액체가 결계 안으로 스며들며 맞닿는 물자들을 부식시키기 시작했다.
성직자들이 다급히 부정한 기운을 정화하기 위해 달려들었고 마법사들은 방어 결계를 보강하기 위해 술식을 전개했다.
파울라는 곧장 황실 직속 마법사인 매그나에게 외쳤다.
"포격 위치 역추적 성공했나?!"
"40 km 정도 떨어져 있소!"
"그 거리에서 어떻게 첫 탄을 머리 위에 명중시켰지?!"
"지금은 알 수 없소."
원리를 알아내기 위해 분석할 여유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한숨을 쉰 파울라가 병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기지를 정비하고 있는데, 다시 머리 위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
짧은 시간 차를 두고 방금 전의 포격이 또 떨어져 내렸다.
"요격해!!!"
콰아아아앙!!!!!
마법사들이 방심하지 않고 화력을 쏟아붓자 꿀렁이는 포탄이 허공에서 터져나갔다.
그 사이 매그나에게 예측 좌표를 받은 파울라가 곧장 통신기에 소리쳤다.
"13 거점!! 14 거점!! 전진 기지가 적의 포격에 노출되었다!! 포격 원점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가?!!"
[13거점, 육안으로 확인. 오십 미터가 넘는 거대한 괴생물이... 검은 늪 같은 곳에서 나타나 포격 중이다.]
"인근 거점과 연계해서 최대한 빨리 제거해!!!"
저런 포격이 연달아 떨어지면 전진 기지는 버텨도 임시 거점은 유지하기 힘들다.
13 거점을 지휘하던 루카스는 상황을 빠르게 이해한 후 저 거대한 괴생물을 제거하기 위해 병력을 차출했다.
헌데 병력을 움직이려던 찰나 체장 5 미터쯤 되는 검푸른 괴물이 13 거점을 강습했다.
콰앙!!!
"이건 또 뭐야?!"
루카스는 일단 검을 휘둘렀다.
횡으로 휘둘러진 검이 괴물의 다리를 파고들자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검은 불꽃을 뿜어냈다.
화아아아악!!!
"?!"
괴물과 가까이 있던 병력들이 한꺼번에 지면을 굴렀다.
아티펙트 덕분에 중상을 면한 루카스가 잠시 주춤거렸다.
검푸른 괴물은 암흑 정령의 특징을 대부분 가지고 있었으나 어째선지 루카스가 휘두른 검에 다쳐 검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정령이 아닌가? 그렇다면 마물?
괴물의 정체를 고민하느라 루카스의 시야가 잠깐 좁아졌던 찰나.
루카스의 머리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크아악!"
"...!"
정예병이 루카스의 등 뒤를 노리던 칼날을 몸으로 막아내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팔에 돋아난 칼날로 정예병을 꿰뚫은 마족이 연기처럼 흐려지더니 이번엔 원정군의 필수 인력인 템플러의 등 뒤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마족을 추격한 루카스가 템플러를 노리던 마족의 칼날을 강하게 쳐냈다.
마족은 루카스를 향해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머금은 채 다시 연기처럼 흐려졌다.
한편, 다른 거점에서도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통신기를 통해 절반이 넘는 거점에서 습격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밀려들고 있었다.
괴이한 기술을 사용하는 마족이나 정체를 특정하기 힘든 괴물들이 출현한 탓에 효과적인 대응이 늦어져 사상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손실이긴 했다.
허나 얼마 안 가 적의 진짜 주력이 날뛰기 시작하면 전사자가 삽시간에 폭증하리란 건 분명했다.
원정군의 전력을 확실히 보존한 채 퇴각하려면 지금 퇴각해야 했다.
반대로, 원정에 승리하리라 결심했다면 더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원정군의 선두에 있던 이들이 명령권을 지닌 알렉산데르를 돌아보았다.
알렉산데르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듯 곧바로 통신기를 들었다.
"원정군 총사령관 알렉산데르다."
잠시 쏟아지던 통신이 멎었다.
"적의 공세는 더욱 거세질 것이다. 다른 지시가 하달되기 전까지 구축된 거점과 전진 기지를 최대한 사수하라. 명심하라, 이곳은 마경이다. 투항도 도주도 불가하다. 각오를 다져라. 너희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우리가 증명하겠다."
알렉산데르는 짧고 굵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다.
이내 다시 거점 간의 통신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누가 먼저 뚫리느냐의 싸움이었다.
"후우..."
레이가 호흡을 골랐다.
마지막까지 선두의 타격대와 함께하던 200명의 원정군은 거점 방위를 지원하기 위해 물러섰다.
그리고, 서른 명으로 구성된 타격대가 최대한 사용을 자제하던 정상급 무장들을 본격적으로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타격대는 일점돌파를 강행해 프레체스를 친다.
"...루나."
레이가 루나를 돌아보았다.
루나와 계약한 두 바람 정령이 루나의 곁에 실체화하고 있었다.
한쪽은 고위 바람 정령 칼가. 그리고 다른 한쪽은, 최근에 계약한 최고위 바람 정령 '에이라'였다.
레이가 되도록 웃음을 머금으려 노력하며 루나의 손을 쥐었다.
"...가자, 루나."
"...그래요, 레이."
"항상... 고마워."
레이는 잠시 루나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가 한 걸음 물러섰다.
레이는 나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의무를 다하겠다고 재차 다짐하며, 허공에서 제국의 신검을 뽑아냈다.
재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