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28화 (328/446)

328화

일피림.

그녀는 금지된 숲에서 활동하던 흑마법사였다.

그녀는 고위 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강자였으며 또한 특수한 분신을 생성해 활용할 수 있었다.

지하 요새에 군림하던 최고위 마족은 전략적 가치가 높은 일피림과 흔쾌히 협력 관계를 맺고 '합일' 계획을 진행했다.

허나 모든 계획이 순탄히 진행되어 성공을 눈앞에 두었을 때.

금지된 숲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일피림은 그 불청객들을 우습게 보고 분신을 활용해 유린하려다 도리어 패배했고.

그후 얼마 안 가 메테오가 금지된 숲을 강타해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합일을 직전에 둔 실험체는 증발했으며 아집을 버리지 못한 최고위 마족은 결국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당시 지하 요새에 있던 존재들이 전부 죽은 것은 아니었다.

지하 요새를 지키던 악마 숭배자 중엔 메테오라 추측되는 마법이 전개되기 시작하자 밖으로 도주하려 한 자들도 많았다.

그들 대부분이 계약에 묶여 도주에 실패하거나 처형당했으나, 일피림은 성공적으로 지하 요새에서 벗어나 메테오의 직격을 피할 수 있었다.

뭐, 설령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도 목숨은 건졌을 터다.

일피림이 본체처럼 내보이고 다녔던 모습 또한 그녀의 분신이었으니까 말이다.

일피림의 특수한 분신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자들은 극소수였다.

최고위 마족은 눈치를 챘었던 것 같지만, 그 마족은 굳이 일피림이 분신을 운용하는 것을 간섭하려 들지는 않았었다.

덕분에 일피림은 무사히 목숨을 건졌고, 새롭게 구축한 은신처에서 현재까지 무사히 생존 중이었다.

'하아... 잘못하면 나도...'

새롭게 구축한 은신처 주변을 분신으로 순찰하던 일피림이 손아귀를 움켜쥐어 보았다.

일피림이 동시에 운용할 수 있는 분신은 기껏해야 3체가 한계였지만 그 종류는 더 다양했다.

그리고, 이 분신들의 진짜 정체는 일피림이 소유한 저주받은 아티펙트에 '잡아먹힌 것들의 잔재'였다.

일피림 또한 분신들과 비슷한 꼴이 될 위험에 처해있었고 말이다.

"..."

일피림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잠시 숨을 고른 일피림은 그 저주받은 아티펙트, '알레아'를 처음 손에 넣었을 때를 떠올렸다.

일피림이 알레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기한을 맞추지 못한 알레아의 전 주인이 일피림 앞에서 소멸했고, 덕분에 일피림은 알레아를 소유할 수 있었다.

'영혼이 사용된 아티펙트...'

분명, 알레아의 제작에는 누군가의 영혼이 재료로 사용되었다.

그 때문인지 알레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계약'을 맺어야 했다.

알레아와 계약을 맺게 된다면 계약자는 최소 상위 마탑이 보유하고 있는 수준의 방대한 마법 지식을 열람할 수 있게 되며 분신을 다룰 수 있는 특수한 능력도 얻을 수 있었다.

그것 외에도 알레아는 여러 강력한 기능을 갖춘 아티펙트였기에 이제까지 여러 마법사가 그 유혹에 넘어갔다.

허나 알레아와 계약을 맺는 건 아주 위험한 도박이었다.

알레아와 계약하게 되면, 계약자는 정해진 기간 내에 반드시 알레아 내에 잠재된 특정 술식을 완벽히 해석하고 해제해야 했다.

이는 알레아의 제작자가 남긴 퀴즈를 제한 시간 내에 풀어내야 한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였다.

이를 실패하면, 계약자의 육체는 잡아먹혀 붕괴하고 영혼은 알레아에 종속된다.

알레아 내에 잠재된 술식을 해제하는 것은 언뜻 살피기엔 어렵지 않아 보였다.

허나 이제까지 알레아의 계약자들은 전부 술식을 해제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 계약자들이 발악한 흔적들이 알레아에 고스란히 남아있었기에 새로운 계약자들은 이를 토대로 수식을 해석할 수 있으리라 자신하며 도전했다가 매번 같은 결말을 맞았다.

그리고... 일피림 또한 오만을 버리지 못하고 알레아와 계약했다.

일피림은 연구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는데, 유동적으로 흐르는 알레아의 술식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알레아의 제작자와 비등한 경지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알레아의 제작자는 드래곤일 테고...'

수백 년 전에 이런 아티펙트를 창조할 수 있는 광기와 역량을 지닌 존재는 드래곤 밖에 없었다.

이만한 아티펙트를 제작한 드래곤과 맞먹으려면 순수한 깨달음으로 8서클에 닿을 수준은 되어야 했다.

일피림은 자신이 한정된 기간 내에 그 수준에 닿으리라 100% 확신할 수 없었기에 지하 요새의 마족과 협력했다.

지하 요새에서 부활시키려던 존재는 고대의 파멸이었다.

정확히는 고대의 파멸'들'이었지만, 하여튼 그들의 우두머리는 마법으로 잘난 척하던 드래곤들을 마법과 권능으로 유린하며 대륙을 집어삼킬 뻔했다고 한다.

고대의 파멸이라 칭해지는 존재는 드래곤의 전성기 때 무려 대륙의 절반 가까이를 짓밟았다고 마족들 사이에 전해진다.

그러다 최초의 용사에게 패배했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지나가듯 최고위 마족에게 듣기는 했는데, 일피림에게 중요한 건 고대의 파멸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드래곤을 압도할 수준의 마법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부활에 열심히 힘을 보태면 알레아에 관한 문제쯤은 해결해주겠지.

그런 생각으로 열심히 협력을 했다.

헌데 빌어먹게도 성공을 눈앞에 두고 계획이 실패했다.

이 계획을 진행하던 우두머리도 죽은 이상 새롭게 시작할 방법도 없었다.

이제 일피림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5년 정도.

일피림은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아직까지 확신이 없었다.

츠즉...!

"?!"

고민에 잠겼던 일피림은 본체로부터 전달된 원인 모를 섬찟함을 느끼고 다급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본체로 의식을 되돌린 일피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옆을 돌아보았다.

"...!"

벽면에 놓여 있는 기다란 스태프 형태의 아티펙트, 알레아의 앞에.

금발을 길에 늘어뜨린 여인의 환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피림은 여인을 경계하면서도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마나의 흐름을 분석해보니 현재 저 환영을 이 공간에 구현해주는 매개체는 알레아로 추측됐다.

일피림은 일단 상대가 알리모나 제국의 추적자는 아닐 것이라 판단하고 여인에게 물었다.

"알레아를 매개로 한 환영이군. 대체 어떻게... 아니, 알레아의 제작자와 무슨 관계지?"

"내가 제작자야.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 원본이 이 아티펙트의 제작자라 해야겠지. 이 아티펙트에는 나의 서클 하나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어."

"허... 그렇다면 너는... 죽은 드래곤의 사념인가?"

일피림이 긴장한 기색으로 묻자 여인이 친절히 답해주었다.

"내 이름은, 리실로테야."

"...!"

600년 전 대영웅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마법사.

리실로테라면 이런 기물을 제작할 수 있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당황했던 일피림은 뒤로 한발 물러섰다가 다급히 정신을 다잡고 여인에게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무슨 목적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움직일 수 있는 육체가 필요해서."

움직일 수 있는 육체?

잠시 여인의 말을 곱씹어본 일피림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직 기한이 남았어!!"

"알아. 근데 지금 필요하다니까."

리실로테가 미소를 머금고 일피림을 돌아보았다.

일피림의 육체는 리실로테가 원했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흑마법사답게 강력한 서클도 지니고 있었고 육신의 마나 감응력도 뛰어난 편이었다.

"너의 육체라면 추가적인 개조 없이 바로 사용해도 되겠어."

"개소리를...!!"

"그만 거둬갈게."

"그건 불가능해!!!"

일피림이 서클을 활성화시키며 소리쳤다.

계약 각인에 준하는 강제성을 지닌 알레아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거나 뒤틀 수는 없었다.

그딴 짓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분노하는 일피림을 향해 리실로테가 웃어주었다.

"그건 네 생각이고."

"...!!!"

으드드득!!

알레아에 새겨져 있던 계약이 뒤틀리며 일피림의 영혼이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일피림은 모든 서클을 극한까지 활성화시킨 채 멋대로 뒤틀리려는 알레아와의 계약을 유지하려 했다.

허나, 알레아에 심어진 리실로테의 서클 하나가 일피림의 공명하는 일곱 개의 서클을 찍어눌렀다.

일피림은 계약의 내용이 역전되어가는 것을 느끼며 공포에 질렸다.

"이 미친...!!"

이 계약의 주체는 일피림과 아티펙트 알레아다.

더 정확히는, 알레아에 깃든 리실로테의 서클과 일피림이 계약의 주체였다.

이런 식으로 계약을 비틀어버린다면 리실로테의 서클 또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분명 얼마 못 가 알레아에 깃든 리실로테의 서클이 붕괴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도리어 일피림은 계약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크아악...!!"

일피림의 영혼이 알레아에 종속되어가며 육신의 통제권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그 상실한 통제권을 리실로테의 사념이 억지로 움켜쥐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한시적인 강탈이었다.

허나 육체의 통제권을 강탈한 리실로테가 어떤 미친 짓을 하더라도 일피림은 제지할 수 없었다.

만약 리실로테가 육체를 훼손시키면 일피림은 따라 죽는 거였다.

[고작 죽은 마녀의 잔재 따위가아...!! 당장 내 몸을 내놔!!!]

"흠..."

리실로테가 손아귀를 움직여보았다.

한시적으로 강탈한 탓에 감각이 썩 정상적이지 못했지만 다루기 힘겨운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곧장 계약을 뒤틀어버린 반동이 알레아에 찾아왔다.

끄드득!!

알레아를 구성하던 핵심 요소 중 하나였던 리실로테의 서클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마법사가 남긴 서클이 붕괴되어 가며 막대한 압력이 발생했다.

알레아의 겉면에 균열이 일며 그 사이로 섬광이 번쩍였다.

죽기 직전의 별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듯.

알레아 또한 붕괴되어 가며 강렬한 마나의 기류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효율이 좋지는 않네."

리실로테가 담담하게 평했다.

알레아는 처음부터 서클이 붕괴하는 상황을 전제해서 설계된 아티펙트였다.

정확히는, 서클의 붕괴로 인해 발생하는 막대한 압력을 역이용해 일시적으로 내부의 마나를 증폭시킬 수 있게 설계되었다.

하르시아가 최후를 맞이했을 때 사용한 것을 어설프게 모방한 기술이었는데, 권능 없이는 역시 효율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서클이 완전히 붕괴되기 전에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내 몸으로 무슨 짓을 할 작정이야!!!]

"귀여운 아이를 보러 갈 거야. 이름은 레아라고 해."

리실로테는 제국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일피림의 심장을 두른 서클을 활성화시켜 공간을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아무리 고위 마법사라 해도 본래는 이런 공간 마법을 홀로 전개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 불가능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클이 과열되며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신체에 걸리는 막대한 부하를 간접적으로 인지한 일피림이 발악했다.

[미친년아 당장 그만 둬!!!]

일피림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연거푸 괴성을 질렀다.

허나 리실로테는 홀로 환희하며 일피림에게 속삭였다.

"제국으로 가자."

그리고.

"너의 이름으로 새로운 이야기의 시발점을 여는 거야."

진격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