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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327화 (327/446)

327화

원정군은 계속해서 진격했다.

패퇴한 마족들은 원정군과 거리를 유지한 채 살아남은 마물을 활용해 귀찮게 굴었다.

허나 그런 얄팍한 수작이 통하기에는 서로 간의 전력 차가 너무 컸다.

원정군이 쉽사리 마물을 쓸어버리며 접근하자 마족들은 아예 등을 돌리고 도주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을 벌기 위해 준비해둔 지하의 함정들이 메테오의 충격파로 인해 대부분 무용지물이 된 탓에 원정군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얼마 안 가, 원정군은 발악하는 적의 잔당을 압도적인 전력으로 거의 절멸시켰다.

첫 번째 전투를 완벽하게 승리한 원정군은 함성을 토해내며 빠르게 진군했다.

"..."

알렉산데르는 원정군의 함성을 들으며 고뇌에 잠겼다.

원정군의 이 압도적인 승리는 도리어 '불행한 예측'을 방증했다.

'프레체스가 대륙이 보유하고 있는 군사 전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기 위해 미끼를 자처했다라...'

만약 이 예측이 옳다면 프레체스는 반드시 원정군을 마경 깊숙이 끌어들이려 할 터다.

기껏 마경까지 찾아온 손님들을 처음부터 밀어붙였다가 원정군이 마경 초입에서 도주해버리면 유의미한 피해를 가하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주력을 숨긴 채 패퇴하는 척 꾸며 거짓 희망을 심어준 후... 우리가 충분히 깊숙이 파고들면 단숨에 집어삼키려 들겠지.'

그때가서 전력 차를 깨닫고 퇴각하려 해도 원정군은 상당한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마경 안에서 병력 통제에 실패하면 원정군이 문자 그대로 절멸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연 프레체스는 숨겨두었던 독니를 정확히 어느 시점에 드러낼 것인가?

독니를 드러내는 시점이 늦으면 늦을수록 원정군에겐 치명적이었다.

허나 원정군을 깊게 끌어들일수록 프레체스 또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이를 고려하면, 프레체스는 원정군의 선두가 최종 목표지점까지 7할에서 8할가량 진군했을 때쯤 독니를 드러낼 확률이 가장 높았다.

'...그리 되면 대응하기 힘들다.'

알렉산데르가 금서에서 보았던 내용이 절반만 진실이어도 원정군은 필패였다.

그 끔찍한 존재들이 한번에 덤벼든다면 쉽사리 원정군의 선두를 묶어둔 채 임시 거점을 전부 붕괴시켜 퇴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흐를 것이라 가정하면 알렉산데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낌새가 조금만 이상해도 기민하게 퇴각하여 원정군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한 채 물러서거나.

아니면 원정군의 전멸을 각오한 채 소수의 인원만으로 마경의 심부까지 파고들어서 프레체스를 제거하거나.

후자의 경우 그냥 자살 특공에 가까웠다. 프레체스의 제거에 성공한다고 해도 후방의 원정군이 전멸하면 생환은 불가했다.

"..."

알렉산데르는 본래 첫 번째 선택지를 고르려 했다.

프레체스를 제거하기 위해 원정군의 모든 전력을 발판 삼는 선택지 또한 마지막까지 깊게 고민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헌데, 레이가 하르시아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를 알렉산데르에게 꺼냈다.

레이의 이야기를 들은 알렉산데르는 다시금 힘겨운 고뇌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레이의 증언이 진실이라면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여전히 불리했지만 분명 해볼만한 전쟁이었다.

허나 어떤 이유에서든 레이가 거짓을 증언했다면, 그리고 알렉산데르가 그 거짓말에 속아 상황을 오판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

알렉산데르는 여전히 갈등하고 있었다.

레이의 증언을 믿느냐 마느냐... 그 선택 하나가 대륙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기로에 선 알렉산데르는 조용히 신음했다.

그 사이, 원정군은 빠르게 진군해서 첫 번째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서 움직여!!!"

방위가 유리한 고지대에 도착한 원정군은 미리 훈련했던 대로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주변을 탐색해 함정이 없는지 확인했고, 그 이후 성직자들이 교단에서 끔찍히 아끼던 귀한 성물들을 지체 없이 지면에 박아넣고 활성화시켰다.

화아아악!!!

빛의 장막이 펼쳐지며 일대를 뒤덮고 정화해가기 시작했다.

또한 여기저기서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푸른 방벽이 솟아났고, 마법사들이 방벽 위로 결계를 중첩시켜 강도를 강화했다.

삽시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는 단단한 방어 진지가 완성되어 갔다.

이제부터는 이곳이, 원정군의 전진 기지이자 반드시 사수해야 할 최종 방위선이었다.

원정군이 진군함에 따라 추가로 임시 거점들이 구축될 것이다.

그 임시 거점들이 위험에 빠진다면 전진 기지를 중심으로 지원과 보급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만약 모든 임시 거점을 상실하게 된다면 잔여 병력은 전진 기지에 집결해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리고, 원정군의 선두가 프레체스의 제거에 성공하면 그들의 퇴로를 열어주기 위해 마경의 심부로 돌진해야 했다.

어떤 변수가 원정군을 덮칠 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만은 분명했다.

퇴각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이곳만은 어떻게든 사수해야 했다.

"이 정도면... 열흘 정도가 한계겠어."

성직자 중 한 명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귀한 성물을 다량 사용했음에도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장막과 방벽이 유지될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마경 밖에서 이만큼 쏟아부었다면 두 달은 거뜬했겠지만 이곳에선 열흘이 한계였다.

그래도, 어차피 이 전쟁은 열흘 안에 결판이 났다.

병사들은 악의가 넘실거리는 마경의 심부를 향해 시선을 둔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곧 진짜 혈전이 시작되리라는 걸 다들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한편.

알렉산데르는 호위를 뒤로 물린 채 군단과 떨어져 마경을 걷고 있었다.

알렉산데르의 부관은 알렉산데르가 계속해서 홀로 멀어지자 눈치를 보다가 결국 거리를 좁혔다.

알렉산데르는 저 너머에 보이는 울퉁불퉁한 마경의 지형을 구경하며 고지대를 따라 걸었다.

꽤 오랜 시간 걸음을 옮긴 알렉산데르는 문득 자리에서 멈춰 서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보이는가?"

"예...?"

"일검이군."

"...?"

웬만해서는 알렉산데르의 저의를 빠르게 파악하던 부관이었지만 이번에는 그게 잘 안 됐다.

알렉산데르는 홀로 즐겁게 웃으며 울퉁불퉁한 지형의 끝자락을 가리키더니 손가락을 옆으로 쭈욱 움직였다.

알렉산데르의 손가락이 거의 반원을 그렸다.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이 결론에 닿을 때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무리 알렉산데르라 해도 600년의 세월 동안 붕괴되고 퇴적되고 풍화되어 본래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린 흔적을 알아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알렉산데르는, 저 흔적이 처음 새겨진 날의 풍경을 느리게나마 머릿속에서 재현해냈다.

재현되는 그날의 풍경은 소드마스터의 시선으로도 너무나 허황되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알렉산데르는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이해할 수 없는 공백을 채워넣어야 했다.

"그래... 조금은... 알겠군.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

부관은 여전히 알렉산데르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괜히 되묻는 일 없이 조용히 알렉산데르의 곁에서 대기하던 부관은,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급히 몸을 돌렸다.

"...!"

어느새 레이가 부관의 뒤편에 앉아 씁쓸한 얼굴로 알렉산데르가 지켜보던 풍경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부관은 잠시 갈등하다 결국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레이와 단둘이 남게 된 알렉산데르는 한참 더 사람 좋게 웃다가 레이를 타박했다.

"그대가 내게 거짓말을 했군."

"..."

"그대는 그대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는 사료나 증거가 전무하다고 했잖소."

"..."

"저리 멋진 풍경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말이오."

"...그러게 말이야."

레이와 알렉산데르는 여전히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스듬히 휘둘러진 단 한 번의 참격이 만들어낸... 지평선 너머까지 길게 이어져 있는 불가해한 상흔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산데르가 고뇌를 털어내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되었다. 이제는, 가슴을 짓누르던 막중한 갈등에서 벗어나 결심을 세울 수가 있었다.

레이를 돌아본 알렉산데르가 환한 냉소를 머금은 채 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디, 엘-람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를."

"..."

레이는 말없이 알렉산데르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죽음을 각오한 군단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원정군이 마경에 진입하기 직전부터.

대륙에 숨어있던 악마 숭배자들은 산발적인 공격을 이어가며 혼란을 부추겼다.

그들은 대단한 피해를 대륙에 끼치지는 못했지만 많이 이들이 악마 숭배자의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하며 몸을 떨었다.

그 덕분에 레아는 더더욱 한정된 공간에 갇혀 지내게 됐다.

뭐, 외출도 거의 불가능했지만 레아는 크게 답답해하지는 않았다.

이전 오시리스 백작령 때 습격을 받은 것이 트라우마가 된 레아는 엄마아빠의 곁에 있는 게 그냥 편했다.

물론! 건물 안에 있는 화장실쯤은 혼자 갈 수 있었다.

벨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방에서 나온 레아는 뽈뽈뽈 걸어 화장실로 향했다.

헌데 화장실로 향하던 레아는 깜짝 놀랐다.

생전 처음 보는 여인이 복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헉...!"

이 건물 안에는 지미가 허락한 사람 외에는 절대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니 레아가 모르는 사람이 복도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깜짝 놀란 레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가 얼마 안 가 긴장을 풀었다.

찬란한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채 복도에 서 있는 여인은 레아의 눈에 굉장히 아름답고 품격 있으며 고귀해 보였다.

겉모습만 보면 여인은 결코 나쁜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아직 나이가 어린 레아는 여인의 겉모습만 보고 쉽게 마음을 놓고는 여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나는 레아에요. 언니는 누구예요?"

"망각을 잃은 오래된 원념이란다."

레아는 망각이나 원념 같은 어려운 단어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여인의 자기소개가 우아하다고 생각했다.

레아는 여인이 혹시 아빠의 손님이라면 길 안내를 해주고 칭찬을 들을 생각으로 다시 물었다.

"언니는 왜 여기 서 있어요?"

"나는 하르시아와 다르거든. 이 혐오스러운 대지 위를 살아가는 너희를 동정하지 않아."

"?"

"나는 어떻게든 비원을 이룰 마지막 기회를 붙잡고, 완성할 거야. 실패한다면... 차라리 그 증오스러운 존재가 가꾼 세상과... 함께 파멸할 거야."

"..."

여인이 자꾸 이해하기 힘든 혼잣말을 하자 레아가 떨떠름하게 여인의 눈치를 살폈다.

여인은 그런 레아를 향해 아름답게 웃어주었다.

"그러니 아이야, 부디 무너지지 마렴. 그리고 환희하렴."

"네...?"

"네 존재가 이 길었던 이야기의 마침표이자,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점이 될 테니."

그가 바랐던 낙원. 혹은 모든 것의 완전한 파멸.

새롭게 시작될 이야기가 무엇이 될지는, 아직 여인 또한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여인은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마법사다운 마법사가 남긴 원념이었으니까.

레아가 여인의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지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아?"

"!"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레아가 고개를 휙 돌렸다.

"아빠!"

"화장실 가려고 나왔어?"

"응! 근데 아빠, 여기 언니..."

레아가 다시 여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으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나 크게 놀란 레아가 제자리서 그대로 얼어붙은 사이.

지미가 다가와서 물었다.

"언니? 카렌 언니 찾는 거야?"

"아, 아, 아, 아빠..."

"응, 왜?"

"여기 귀신 나와아아아!!!!"

레아가 빼애애액 울면서 지미에게 달라붙었다.

지미는 당황하면서도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리는 레아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미는 결국 귀신 타령을 하며 빽빽 우는 레아를 달래면서 화장실에 동행해 주었다.

진격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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