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원정군의 가장 큰 약점.
그건 마경에서의 전투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기실 전투는커녕 원정군 전부가 마경에 발을 들인 경험조차 없었다.
애초에 일천 년이 넘는 제국의 역사 속에서 공식적으로 개인이나 집단이 마경에 진입했다는 기록 자체가 없었다.
대륙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마경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장소와 다를 게 없었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 마경은 악마가 살아가는 지옥이었고, 부모들은 아이를 혼낼 때 '나쁜 짓을 하면 악마가 찾아와 마경으로 잡아간다'고 겁을 주곤 했다.
그렇기에 원정에 참여한 이들은 진군하기도 전에 겁에 질렸었다.
명예를 우선시하며 적진을 향해 용기 있게 돌진하였던 기사조차 두려움을 품었다.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지휘부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강력하고 값비싼 장비를 지원하고 파격적인 연설로 마음을 모으고 신화 속 마법을 과시하듯 재현해냈다.
그 덕분에 원정군은 일시적으로 용기를 얻고 용맹하게 마경으로 진군했다.
허나 마경에 진입하자마자 억눌렀던 공포가 전염병처럼 다시 번졌다.
검붉은 하늘이 드리운 낯선 풍경은 어린 시절 악몽에서 보았던 지옥을 연상시켰다.
대지에 가득한 악신의 기운은 초대받지 못한 침입자들을 느리지만 분명하게 침식해가기 시작했다.
성직자가 발하는 신성력의 위력이 급감했고, 아티펙트가 작동 불량을 일으키는 횟수가 늘어났다.
정신을 좀먹은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수백 번 각오를 다진 이들도 몸을 떨었다.
언제나 여유가 가득했던 정령들조차 악신의 권능이 공간에 가득한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러댔다.
'예상은 했지만... 심각하네.'
단언컨대, 원정군에 속한 이들이 겁쟁이라서 이리 쉽게 공포에 잠식되는 것이 아니었다.
강철처럼 단단한 의지와 용기를 지닌 자들이 원정군에 넘쳐났다.
하지만 발을 들인 전장이 너무 좋지 못했다.
군단의 중간 지휘관들은 어째서 대륙 회의의 수뇌부들이 단기 결전만을 유일한 해법으로 여겼는지 명확히 이해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마경에서의 장기전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
첫 번째 전투는 무조건 압도해야 한다.
얼어붙은 군단의 분위기를 느낀 일선 지휘관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직 압도적인 승리만이, 이 삐거덕거리는 군단을 되돌릴 수 있는 윤활유 역할을 해줄 수 있었다.
끼에에에에에에엑!!!!!
때마침 기괴한 울음소리가 마경을 울렸다.
안소니우스가 성검을 붙잡은 채 잠시 대기했다.
이내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검붉은 물결이 넘실거리며 다가왔다.
"...마물이 대부분이군."
마물들 사이에 마족들이 얼마나 숨어있는지 파악하긴 힘들었으나, 적당히 간을 보기 위해 보낸 병력일 확률이 높았다.
물론 마물이 상대라고 해서 방심할 수가 없었다.
마경에서 성장한 마물은 대륙의 마물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총사령관인 알렉산데르가 확인차 라멘타에게 물었다.
"목표 지역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소?"
"10 km."
"흠... 일단 그 지역까지 빠르게 진군하도록 하지."
알렉산데르가 눈짓하자 안소니우스가 성검을 뽑아냈다.
마경에 자욱한 악신의 기운이 강력한 신성력을 감지하고 곧장 안소니우스를 짓누르려 했다.
허나 안소니우스는 개의치 않았다.
성검이, 마경에 진입하며 약화되었던 엘-람의 축복을 안소니우스에게 잇는 매개체 역할을 하며 신성력을 증폭시켰다.
화아아아아악!!!
따뜻한 광휘가 얼어붙은 원정군을 향해 번져나갔다.
신성력이 적대적인 기운을 밀어내며 원정군을 축복했다.
원정군은 손 떨림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성스럽고도 찬란히 빛나는 한 자루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래, 엘-람의 사도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그 사실을 자각한 원정군이 다시금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알렉산데르가 군단의 기세가 다시금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짧게 명령했다.
"돌격."
굳이 적들을 향해 마주 나아갈 필요성은 적었으나 기세를 살리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했다.
알렉산데르의 명령은 단숨에 군단 전체에 전달되었다.
이윽고 어마어마한 함성과 함께 군단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땅 울림이 마경을 달구었다.
그리고, 원정군의 마법사들이 돌진해오는 마물들을 향해 마법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콰앙!!!! 콰아앙!!!! 콰아앙!!!!
삽시간에 화염이 전장을 뒤덮었다.
원정군의 마법사 전력은 강대했고, 그들이 일시에 쏟아내는 화력은 일대의 지형을 쉽사리 바꿀 수준이었다.
하지만 마경에서 살아가는 마물은 대륙의 마물보다 훨씬 강인했다.
마법 포격을 견뎌내거나 피해낸 마물들이 원정군을 향해 돌진했다.
전위에 선 부대가 대마물 진형을 갖춘 채 마물들을 맞이했다.
쿠웅!!
"크아악...!!"
거대한 방패를 든 정예병이 동료들과 함께 마물을 막아 세우고 뒤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악을 썼다.
대마물 진형의 경우 일반적으로 정예병이 마물들을 막아세우고 기사나 마법사가 마물을 공격해 숨을 끊었다.
마경의 마물들은 정예병이 막아내기엔 버거운 존재였으나, 원정군의 정예병들은 값비싼 장비로 무장한 덕분에 힘겹게나마 자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촤아아악!!!
정예병들이 마물을 막아세운 사이 기사들이 검기를 흩뿌려 마물을 도륙냈다.
검기의 세례를 버티지 못하고 조각난 마물의 사체 너머로 또다시 마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위협적인 광경이었으나 전위에 선 정예병들은 다가오는 마물들을 보며 도리어 웃음을 머금었다.
마경이라 해도 감당 못할 괴물들만 사는 곳이 아니다.
그 당연한 진실을 뒤늦게 체감한 원정군은 그제야 여유를 되찾고 적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막아!!!"
"물러서지 마라!!! 밀어내!!!"
흥분이 가득한 고함이 전장을 뒤덮었다.
한편, 울트는 일선에서 조금 떨어져서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조용히 전장을 지켜보던 울트가, 한창 마물을 베어내고 있는 기사를 향해 빛살을 쏘아냈다.
콰앙!!
게네시스로부터 발사된 빛살이 기사의 바로 옆에 떨어졌다.
기사는 튀어 오르는 돌조각에 얻어맞고 지면을 굴렀다.
"...!"
곧장 몸을 일으킨 기사가 빛살에 피격되어 박살이 난 마물의 살점을 바라보았다.
빛살에 피격되기 전 마물은 이미 죽어있었다.
헌데 기사가 다른 마물을 베어내기 위해 집중하던 순간 내장을 질질 끌며 몸을 일으켰었다.
울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제때 기습에 대처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울트는 기사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가까이 있던 지휘관에게 경고했다.
"죽어있던 마물의 사체가 움직였어. 사체를 경계하라고 전달해. 아군의 시신 또한 마찬가지야. 사체는 되도록 불태우고 그게 당장 힘들면 머리라도 확실히 부숴 놓으라고 해."
"알겠습니다!"
울트는 지휘관의 대답을 들으며 다시 빛살을 쏘았다.
여기저기서 몸을 일으키려던 마물의 사체가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원정군은 실시간으로 전술을 수정해가며 앞으로 진군했다.
마물의 숫자는 쉽게 계산하기 힘들 만큼 많았으나 전력은 원정군이 압도적이었다.
간간이 틈을 노리고 접근하던 마족들 또한 대기하던 고위 전력에 요격당해 죽거나 물러섰다.
그때, 땅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던 지면이 갈라지더니 그 틈에서 거대한 살덩이 세 개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관이 흉측하게 얽혀있는 살덩이들의 가죽 위로는 기포 같은 것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치켜든 살덩이 셋 중 두 놈이 지면에서 나오자마자 힘을 잃고 쓰러졌다.
쿠웅!!!
레이가 상황을 이해하고 피식 웃었다.
"아... 땅속에 숨어있었으면 메테오 때문에 타격이 꽤 컸겠네."
그나마 살아남은 살덩이 하나가 거대한 몸을 더욱 크게 부풀렸다.
원정군의 마법사들이 곧장 살덩이를 타격하려 했으나 마족들이 훼방을 놓았다.
마족들이 벌어준 시간은 찰나였으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화아아아악!!!
살덩이로부터 온갖 부정한 기운이 뒤섞인 끈적이는 증기가 터져 나왔다.
마법사들은 전장에 방사되려는 살덩이의 공격을 요격하기 위해 일단 마법을 쏟아냈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전장의 상공을 수놓았다.
원정군은 살덩이가 뱉어낸 부정한 기운을 경계하며 진군을 늦추려 했다.
허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오염된 것이라 해도 내 앞에서 이리 마구잡이로 마나를 뿌려대다니..."
스스스슥!
알렉산데르를 중심으로 피어난 푸른 기류가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절대권역이 생성되며, 상공에 흩뿌려졌던 마나의 덩어리가 알렉산데르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형태로 집약되었다.
날카로운 검의 형상을 취한 마나의 덩어리가 마물을 방패로 삼던 마족들의 머리 위를 일제히 폭격했다.
콰아앙!!!!
그와 동시에 알렉산데르가 손에 쥔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알렉산데르가 그려낸 궤적 너머에 위치해 있던 거대한 살덩이가 지면과 함께 단번에 갈라졌다.
촤아아악!!!
압도적이었다.
원정군은 무력하게 갈려나가는 거대한 살덩이를 보고는 열광하며 병기를 휘둘렀다.
안소니우스가 성검의 광휘를 거두어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정군은 더는 공포에 빠져 몸을 떨지 않았다.
완전히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한 마족들이 마물들을 두고 몸을 빼기 시작했다.
"어디..."
레이는 해독 권능을 사용한 채 전장을 훑었다.
되살아난 마물의 사체를 지속적으로 관찰한 결과 수작을 부린 것이라 예측되는 마족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마족은 지평선 끝자락쯤에서 전장을 지켜보다 도주하려 하고 있었다.
레이가 전장에 함께한 또 다른 세계수의 수호자, 아퀴타스를 돌아보며 지평선 끝자락의 마족을 가리켰다.
"이 거리에서 저격 가능해?"
"..."
아퀴타스가 말없이 게네시스를 닮은 녹색 활을 들었다.
게네시스에 버금가는 세계수의 신물, 크디크시스.
크디크시스를 들어 올린 아퀴타스가 지평선 끝자락을 향해 빛살을 쏘아냈다.
직후, 후폭풍이 몰아친 탓에 레이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야 했다.
고막을 울리는 굉음이 들려온 건 시간이 좀 더 지나서였다.
콰아아앙!!!!
"...이야."
지평선 끝자락 일대가 멀리서도 쉽게 보일 만큼 박살이 나 있었다.
미리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면 웬만한 마족은 가루가 되었을 터다.
이윽고, 전장을 거의 다 정리한 원정군은 함성을 지르며 계속해서 진군하기 시작했다.
군단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으며 적의 선발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공포에 잠식되었던 병사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흥분을 드러냈다.
군단의 사기가 오른 것을 보며 지휘관들은 흡족해했다.
하지만, 알렉산데르를 비롯해 군단에 선두에서 나아가는 이들은 표정을 굳힌 채 눈살을 찌푸렸다.
"쉽지는... 않겠어."
레이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말 없이 동의했다.
고작 탐색을 위해 보낸 쭉정이들을 상대로 원정군의 로드 급이 몇 번이나 나서야 했다.
전선을 형성한 이후 원정군은 준 로드급과 로드급의 도움 없이 이보다 강력한 공세를 며칠 동안 버텨내야 했다.
과연 목표한 시간까지 전선을 유지할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진격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