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메테오.
국가 단위의 파멸을 초래할 수 있는 섬멸 마법.
그 신화 속 마법으로도 공간적으로 괴리된 마경의 심부에 충분한 타격을 가하는 건 힘들다.
그렇기에 지금 준비되는 메테오의 표적은 마경의 심부가 아니라 마경의 외곽이었다.
마경의 외곽을 폭격하여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두 가지였다.
일단 막대한 물리력으로 괴리된 공간을 역으로 어그러뜨려 외부에서 안으로의 진입을 수월하게 만들 수 있었다.
또한 폭격으로 마경 외곽에 존재하는 함정과 병력들을 제거할 수 있다면, 원정군이 마경에 진입한 후 1차 전선을 생성하는 것이 훨씬 용이해진다.
물론 심부보다는 덜하다고 해도 공간적으로 괴리된 마경의 외곽에 메테오를 직격시키면 그 반발은 대륙이 감당해야 했다.
마경을 감시하고 막아내기 위해 건설된 남부의 방어 요새 대부분이 박살나겠으나, 감수하기로 합의했다.
쿠웅-
거대한 마나의 파동이 군단을 할퀴며 퍼져 나갔다.
이번 마법의 주축은 세계수의 수호자, 라멘타였다.
제국은 그녀에게 오벨리스크의 우주 지도에 접속할 권한을 빌려주었다.
비록 루나만이 접근 가능한 정밀하게 완성된 우주 지도는 아니었으나, 제한된 정보만으로도 메테오를 구현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수십의 고위 마법사가 보조하는 가운데 하늘을 여는 마법이 차근차근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츠즉-
레이는 자기 손가락이 멋대로 흔들리는 걸 보며 피식 웃었다.
막대한 마나의 파동 탓에 겉모습만 구현해낸 환영이 자꾸만 일그러지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 레이와 알렉산데르의 본체는 당연히 라멘타와 가까운 거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마법을 보조하기 위해 준비된 값비싼 아티펙트들이 수십 초 단위로 박살이 나는 걸 느끼며 레이가 중얼거렸다.
"방해꾼들이 찾아와 줬으면 좋겠는데..."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것이오."
메테오에 낚여 마경에서 마족놈들이 조금이라도 기어나와 준다면 참 고맙겠으나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메테오로 마경 심부에 제대로 피해를 주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저들도 아는 이상, 굳이 쓸데 없는 손실을 자처할 확률은 낮았다.
레이는 내심 기대를 버리지 않고 인내했으나 결국 대어가 미끼를 무는 일은 없었다.
몇 시간 뒤, 원정군은 적들의 큰 방해를 받지 않고 메테오 마법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트드득!
하늘이 깨져나간다.
레이는 깨져나간 하늘로부터 아름다운 별빛이 반짝이는 모습을 흘깃 쳐다보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건이 완전히 다르다고 해도... 대륙의 가장 이름 높은 마법사 수십 명이 달라붙은 것 치고는 완성이 많이 늦네.'
저들의 전력이 루나 하나보다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루나가 지닌 재능이 저들보다도 다른 영역에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이제, 밤하늘 사이를 거대한 운석이 파고든다.
이 순간만큼은 어느 누구도 군단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소수의 인원을 제외한 모두가 찰나의 순간 의무를 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불덩이가 된 운석이 삽시간에 하늘을 길게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마법사들이 미리 준비해둔 장막을 펼쳐 군단을 보호했다.
그리고 번쩍, 빛이 일며 거대한 화염이 지평선 너머에서 피어올랐다.
가장 먼저 열기가 찾아왔고 그다음엔 지면이 요동쳤다.
귀를 찢어버릴 것만 같은 굉음은 땅 울림에 익숙해졌을 때쯤 군단을 덮쳤다.
쿠구구궁!!!
미리 펼쳐둔 장막 덕분에 군단은 무사했다.
허나 많은 이들이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자리에 주저앉거나 얼어붙었다.
신화 속 마법이 자아낸 광경은 그들의 빈곤한 상상력을 까마득히 초월했다.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넋을 놓고 있다가 오줌을 지리는 자들도 심심찮게 나왔으나, 모두가 얼이 빠져 그걸 지적해줄 동료가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거품을 물고 기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꽤나 노력한 것이었다.
보다 못한 알렉산데르의 부관이 기사 몇 명에게 슬그머니 눈짓했다.
그러자 눈짓을 받은 기사들이 먼저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포효에 가까운 환호가 점점 더 군단에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얼이 빠져 있던 병사들은 그제야 대지 위에 거대한 버섯구름을 만들어낸 이들이 아군임을 상기하고 희열을 토해냈다.
"으아아아아아아!!!!!"
아직까지 잘게 떨리는 땅울림에 화답하듯 함성을 내지르는 군단을 지나쳐서.
그들의 선두에 선 알렉산데르가 지면을 찍어 밟았다.
쿵!!!
"전군은 들으라!!!"
알렉산데르의 목소리가 군단에 울려퍼졌다.
"가장 위대하고 명예로운 전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죽음을 두려워 말고 대륙의 적을 척살하라!!! 영속할 신화의 첫 장을 너희의 피로 물들일 영광을 누려라!!!"
알렉산데르가 검을 높이 들었다.
알렉산데르의 검을 휘감고 피어오른 검강이 군단의 끝에 선 자에게까지 보일 만큼 밝게 타올랐다.
"대륙에 기생하는 역겨운 오물들을 유린할 준비가 되었는가!!!!"
"으아아아아아아!!!!!"
재차 쏟아지는 함성 속에서 알렉산데르가 웃음을 머금었다.
"진군한다."
*
드디어, 원정군이 마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운석이 떨어진 직후라 시야도 흐리고 지면도 엉망이었으나 문제없었다.
이번 원정에는 정령사들이 다수 투입되었고, 특히 바람 정령을 다루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정령을 운용해 먼지를 밀어내고 원정군의 이동을 도왔다.
수만의 원정군이 바람 정령의 도움을 받아 허공에 몸을 반쯤 띄운 채 지면을 걷어차며 달려나갔다.
본래 강력한 정령사는 굉장히 희귀했기에 아무리 대륙에서 긁어모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정령사를 원정에 동원할 수는 없었다.
뭐, 근데 정령사가 없으면 양산하면 되는 것 아닌가?
레이는 황제의 협력 아래 은밀히 정령들을 불러 족쳐가며 마법사들과 노예계약을 맺도록 강제했다.
덕분에 원정에 참여하게 된 마법사들 중 많은 이들이 정령을 노예처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하, 아쉽네...'
레이는 역사에 없었던 대규모 정령 노예들을 바라보며 입을 다셨다.
본래는 지금보다 두 배는 많은 정령 노예들을 긁어모을 계획이었다.
헌데 은밀하게 진행한다고 진행했는데도 정령계에 소문이 퍼졌는지 어느 순간부터 낚시질에 걸리는 정령이 거의 사라졌다.
아무리 노예 계약을 맺은 정령을 두들겨 패며 친구 좀 데려오라고 해도 풀죽은 얼굴로 고개만 젓는 놈들이 많아졌다.
서로 다른 계열의 정령끼리는 교류가 잘 없다는 걸 활용해 바람 정령이 아닌 정령들도 노려봤지만 이것도 금방 효과가 떨어졌다.
아무래도 정령계에 경보라도 울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처음 목표치를 달성한 덕분에 원정군의 전력이 상당히 상승했다.
완전히 노예계약을 했기에 정령사가 감당해야하는 부담도 굉장히 적어서 아주 효율적이었다.
한번 이런 사태가 발생한 이상 후대의 정령사들은 정령과의 계약에 아주 개고생을 해야겠지만, 레이 입장에선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빠르긴 하군."
정말 진군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빨랐다.
메테오의 여파로 지면이 다 뭉개졌는데도 군단은 엄청난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만약 정령사들을 다수 확보하지 못했다면 메테오부터 외곽에 때려 박는 작전은 파기되었을 확률이 꽤 높았다.
화륵!
이내 불길이 이는 대지가 나타났다.
메테오가 떨어진 지점에 접근할수록 열기가 강렬해졌다.
허나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원정군은 한 명도 빠짐없이 방어용 아티펙트를 지니고 있었고, 굳이 마법사가 노력하지 않아도 이 정도 잔열쯤은 정령 노예들이 중화시킬 수 있었다.
츠으윽!
"아이고, 다들 열심히들 하네."
레이가 냉기를 흩뿌리는 정령들을 흐뭇한 얼굴로 칭찬했다.
정령들은 몸뚱이를 부들부들 떨면서도 괜히 개기지 않고 열심히 힘을 쏟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원정군 본대가 마경의 경계 앞에 도착했다.
"..."
잠시 침묵이 일었다.
허황될 만큼 달콤한 이야기를 수없이 머릿속에 새겨넣었음에도 막상 마경에 진입해야하는 순간이 오자 몸이 굳었다.
마법사들은 말없이 괴리된 공간에 진입할 때 저항을 줄일 수 있는 결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결계가 완성되자 알렉산데르가 가장 먼저 마경 안으로 진입했다.
총사령관이 먼저 발을 움직이자 군단 또한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레이도 말 없이 마경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득!
약간의 저항감을 이겨낸 후, 레이는 마경을 밟았다.
"..."
공기가 끈적했다. 하늘은 썩어버린 피처럼 검붉었다.
리실로테의 안배가 마련한 환영 속에서 겪었던,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감각이 레이를 덮쳤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꾸물거리는 벌레들이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만 같은 불쾌함이 찾아왔다.
레이는 괜히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턱에 힘을 주었다.
마경에 진입한 군단 중 엑스퍼트 급 아래 정예병들 다수가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원정군이 느끼는 불쾌함은 결코 단순한 착란이 아니라 실존하는 위협이었다.
삐걱!
가장 선두에서 마경에 진입했던 기사가 갑옷에서 들리는 자그마한 소음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다리 관절을 보호하던 갑옷에 미세하게 녹이 슬어 있었다.
"..."
녹이 슬어있다고? 며칠 전 정비를 마친 고급 장비인데?
이러한 이상 현상은 기사 한 명에게만 찾아온 게 아니었다.
이내 군단 여기저기서 성직자를 찾는 목소리가 커졌다.
"테, 템플러...!"
성직자들이 곧장 성물을 사용하거나 신성력을 발휘했다.
허나 마경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신성력과 관계된 모든 기술의 위력이 반감됐다.
마족이 마경을 벗어났을 때 자기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듯, 그 역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를 감안하고 부대 내 성직자 비율을 크게 늘렸으나 그럼에도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마경의 기운을 완전히 정화하는 것은 무리였다.
삽시간에 두려움이 군단에 번져나갔다.
허나 총사령관인 알렉산데르는 군단의 동요를 무시하고 빠르게 전진하라 명령했다.
지금 원정군은 메테오로 인해 초토화된 지역을 마족들이 수복하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전진해야 했다.
군단을 달래겠다고 녹아내린 대지가 펄펄 끓고 있는 곳에서 진군을 멈출 수는 없었다.
수많은 병사가 헛구역질을 반복하며 발을 옮겼다.
그들은 흡사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을 닮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 병사들을 독려하는 중간 지휘관의 목소리도 사그라지고 군단 전체에 침묵이 찾아왔을 때.
소름끼치는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려왔다.
끼에에에에에에엑!!!!!!
철판을 거칠게 긁어내는 듯한 소음에 병사들이 기겁했다.
허나 도리어 선두에 서 있던 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머금었다.
레이가 알렉산데르와 안소니우스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간보려고 보낸 쭉정이들이 대다수겠지만 숫자는 꽤 되는 것 같은데... 두 분 의견은 어떤가?"
"군단의 사기가 말이 아니군. 힘을 아껴야하지만, 첫 전투는 압도하는 형세를 보여주어야할 필요가 있겠소."
알렉산데르의 시선을 받은 안소니우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알겠다."
안소니우스가 성검을 움켜쥐었다.
진격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