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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324화 (324/446)

324화

그것을 처음 목격한 것은 이지스에서였다.

정확히는, 리실로테의 유산이 펼쳐낸 환영 속에서 레이는 그것을 목격했다.

레이는 그날 하르시아가 섰던 최후의 전장 위에 발을 들였다.

하르시아를 모방한 모습으로 하르시아와 비견되는 힘을 얻어 전장을 걸었다.

허나 레이는 하르시아가 아니었기에,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장의 끝에는 닿지 못 했다.

그럼에도 레이는, 그날 분명 전장의 끝에 있던 존재를 떨어진 거리에서나마 두 눈으로 확인했다.

전장의 끝에 있던 존재가 품고 있던 힘은 강대했다.

흔히 로드 급이라 평가되는 수준, 혹은 그 이상의 힘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가 그 존재에게 잠시나마 시선을 완전히 빼앗겼던 것은 힘의 강대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 존재는 이질적이었다.

온갖 이질적인 생명체가 존재했던, 이질의 바다와 같았던 환영 속의 마경 안에서도...

그 존재는 독보적으로 이질적이었다.

전장의 끝에 있던 존재가 품고 있던 그 이질적인 힘의 근원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레이는 환영에서 벗어난 뒤에도 한참의 시간 동안 수백 번을 곱씹고 나서야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변질된 신성력. 정확히는, 변질되어 '다른 무언가'와 융합한 엘-람의 권능.

그러한 결론에 닿았을 때쯤.

레이는 '진실'을 유추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정황과 정보들 또한 손에 넣었다.

결정적으로, 레이는 세계수와의 소통을 위해 경계에 진입하였다가 하르시아의 편린과 맞닿았다.

레이는 하르시아가 남긴 편린으로부터 파편화된 정보들을 읽어냈다.

그 덕분에 레이는 자신의 막연했던 추론을 완성하고 '진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프레체스. 그 드래곤은 이상했다.

고작 필멸자의 역량으로 상이한 초월적인 존재의 권능을 멋대로 조율하고 변질시켜 융합시킨다?

그건 다섯 살 아이가 아무 지식 없이 시중의 약물을 뒤섞어 엘릭서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보다 허황됐다.

초월적인 존재들의 권능을 융합시켜 '새로운 힘'을 탄생시키는 건, 오직 그 권능을 지니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들만이 가능했다.

레이는 그 결과물을 이지스에서 겪은 환영 속에서 목격했다.

엘-람과 악신이 손을 잡고 창조한 첫 번째 혼종.

하르시아가 자신의 삶과 비원을 희생하면서까지 제거했던 멸망의 덩어리.

프레체스는 그 첫 번째 혼종이 지녔던 힘을 모방하려 했다.

그리고, 비록 수백 년의 시간이 걸렸으나 결국 그 힘을 모방하는 데 성공해 개화를 앞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첫 번째 혼종이 지닌 능력이 무엇이었기에 하르시아가 그만한 희생을 감수한 것일까.

이는 프레체스를 보고 역으로 추론하는 것이 가능했다.

프레체스가 첫 번째 혼종을 모방했으니 그 능력 또한 첫 번째 혼종과 유사할 터다.

첫 번째 혼종보다 모든 방면에서 뒤떨어지는 복제품인 프레체스의 개화만으로 대륙 절반이 날아갈 위기에 처했다.

만약 첫 번째 혼종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도저히 살아가기 힘들 만큼 대륙 전반이 오염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대지 위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생물이 멸절의 위기에 처했을 때.

엘-람은 하르시아에게 선택을 강제하며 계약을 건넸다.

레이는 자신이 알아낸 그 진실을, 알렉산데르 앞에서 입에 담았다.

"엘-람과 악신들이 손을 잡고 창조한 첫 번째 혼종이, 거기 있었다고."

콰앙!!

결국 탁자를 완전히 부숴버린 알렉산데르가 레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제정신이 아니군."

*

쾅- 콰앙-

방음 결계가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럼에도 건물 안에서부터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사람이 소리 좀 질렀다고 방음 결계 넘어서까지 진동이 느껴질 리가 없다.

밖에서 대기하다가 서로를 마주 본 로얄가드와 알렉산데르의 부관이 동시에 결계 안으로 진입해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레이와 알렉산데르가 동시에 말했다.

"나가."

"대기하게."

로얄가드와 알렉산데르의 부관이 슬며시 건물 안을 살폈다.

가운데 있던 탁자는 박살이 나 있었고, 레이는 의자 위에 불량한 자세로 앉아 있었으며 알렉산데르 또한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로얄가드와 알렉산데르의 부관은 잠깐 머뭇거리다 다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괜히 두 사람을 말리겠다고 끼어들었다가 더 시끄러워져서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했다.

원정군이 마경으로 진입도 하기 전에 두 사람의 갈등설이 군단에 퍼지면 사기가 박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뭐, 주먹질을 한 것 같지는 않으니 결국 로얄가드와 알렉산데르는 불안한 얼굴로 문을 닫고 결계 밖으로 물러났다.

방해꾼이 사라진 뒤에도 알렉산데르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레이를 노려보았다.

세상 불편해보이는 알렉산데르를 향해 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음, 정리하자면..."

"..."

"하르시아의 존재가 엘-람과 악신들에게까지 위협이 됐고, 하르시아의 자멸을 강제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손을 잡았고, 그 여파로 마경이 갈려나갔고, 또 타락한 드래곤이 첫 번째 혼종을 모방하는 데 성공해서 이번 사태가 터졌고."

"..."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잖아?"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내 앞에서 이리 불경한 허튼소리를 입에 담는지 모르겠군."

"당신이 마경의 전력을 오판하지 않기를 바랐어. 그런데 어쭙잖은 거짓말이 통할 상대는 아니잖아. 알렉산데르 추기경."

"그래서 추기경 앞에서 그런 망언을 입에 담았다?"

"당신이 닿은 경지와, 당신이 남긴 이제까지의 행적만 보아도 광신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던데. 뭐, 그보다도 내 이야기가 그리 불경한 이야긴가?"

"...?"

"내가 살았던 지역에는 이런 설화가 있었어. 먼 옛날에 인간들이 하늘에 닿기 위해서 아주 높은 탑을 쌓아올렸는데, 그 오만한 짓거리에 신이 분노해서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고 탑을 부숴버렸대."

"..."

"미물이 기어오르는 꼴이 불쾌해서 밟아버린 거야. 근데 다들 그런 신을 좋다고 믿고 따라."

"..."

"하르시아의 이야기도 조금만 각색하면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로 꾸밀 수 있잖아? 신성 교단의 경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존재하지 않나?"

거기까지 말한 레이가 조소했다.

알렉산데르의 말마따나 알렉산데르가 쉽사리 용인하지 못할 만한 내용은 적당히 편집해서 설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레이는 자신이 알게 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알렉산데르에게 까발렸다.

잠시 자기 행동을 돌아본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밝혔다.

"그래, 뭐... 심술을 부리고 싶기도 했어."

"심술?"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설령 안소니우스 때문에 빛이 조금 바랜다고 해도 당신은 교단에 교황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 되겠지."

"..."

"그러한 인물이 교단에서 떠받들어 모시는 절대적인 존재의 치부를 홀로 곱씹어보길 바랐어. 아마 그랬던 것 같아. 상황이 웃기잖아?"

엘-람의 치부를 알게 된 알렉산데르가 그것을 어찌 여길까.

신이 행사하는 일의 의도를 감히 미물이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부정할까.

혹은 신의 의지를 무조건적으로 존중할까, 아니면 저 초월적인 존재에게 혐오를 품을까.

레이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건 심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알렉산데르는 유쾌해하는 레이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는, 엘-람의 사도가 아니었소?"

"그 정의에 부합하는 존재이긴 하겠지. 그래서 나는 더욱 저 하늘 위에 있는 놈들을 혐오해. 왜인지 알아?"

"..."

"그 새끼들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존나 인간적이거든. 나쁜 의미로 말이야. 그리고 기어가는 개미를 내려다보는 우리의 심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지."

알렉산데르는 할말이 많았고, 할 수 있는 말도 많았다.

예컨대 신학을 통해 발전된 논리를 레이의 망언에 들이대서 하루 종일이라도 항변을 이어가며 오류를 지적할 수 있었다.

허나 알렉산데르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대신 알렉산데르는 다른 것을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그대의 희생은 강제된 의무를 이행했을 뿐이었소?"

"글쎄."

레이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하르시아의 의지를 이었어. 그냥 그런 걸로 하지."

하르시아는 대지 위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과 비원을 희생했다.

레이는 자신이 애정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하르시아의 발자국을 뒤따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냥 그런 걸로 하자고, 그렇게 부탁하며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알렉산데르는 꽤 오랜 시간 가만히 레이를 바라보다 팔짱을 풀었다.

"지금까지의 대화는 없던 것으로 하겠소."

미물은 함부로 하늘을 바라보고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

이 격언은 때에 따라 소드마스터에게도 충분히 의미가 깊었다.

물론 레이가 들려준 진실은 몹시 불편했으며 또한 흥미로웠다. 잊고 싶다고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알렉산데르는 청년 시절에 엘-람을 정해진 규칙에 따라 기현상을 일으키는... 흡사 태양처럼 거대하고 무기질적인 존재라 여기기도 했다.

한때이긴 하나 그러한 생각까지 품었던 알렉산데르에게 있어 레이가 그들을 '인간적'이라 표현한 것은 꽤 충격적이었다.

오늘의 대화가 평생을 쫓아다닐 저주가 될지 아니면 새로운 영역으로 발을 내디딜 실마리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제는 그만 소모적인 말싸움을 그만두고 코앞까지 다가온 재앙을 타개하기 위해 집중해야 할 때였다.

알렉산데르가 먼저 그리 나오자 레이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는 그만 그 새끼가 싸질러 놓은 토사물의 뒤처리를 어찌해야 할지 논의해보자고."

"...없던 것으로 하겠다고 했소."

"내가 실언했군. 사과할게."

레이가 한쪽만 붉게 물든 눈동자를 빛내며 방긋 웃었다.

*

막상 원정에 관한 작전 논의는 그다지 할 게 없었다.

선두에 서야 하는 레이와 알렉산데르에게 주어진 역할은 너무나 분명했다.

전선을 유지하기 위한 병력들의 움직임은 이미 다 계획되어 있었고, 변수까지 논의하자니 변수가 너무 많아 의미가 없었다.

다만 아주 중요한 몇 가지 논의와 힘의 배분 문제에 관해 합의했다.

그 이후 레이와 알렉산데르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이좋게 길을 걸었다.

결집한 수많은 원정군들의 시선을 받으며 레이가 물었다.

"근데 총사령관께서는 언제 연설을 하려고 계속 미루고 있나? 슬슬 그럴 시간도 없을 텐데."

"준비한 것이 있기는 했지만, 그대의 연설에 비하면 워낙 심심하여 생략하고 진군하기 직전 짧게 하기로 했소."

"아... 농담이지?"

"진담이오. 그리고, 때로는 제국 최고의 달변가가 사흘 내내 떠드는 것보다도 강렬한 경험을 한번 새겨넣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겠소?"

"그래..."

레이가 동의하며 고개를 들었다.

겪는 건 두 번째인지라 시작 단계에서 울려 퍼지는 마나의 파동만으로 무엇이 준비되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시작부터 화려하게 가는군."

곧, 하늘이 열린다.

진격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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