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진군이 시작됐다.
황도에 집결했던 원정군은 워프게이트를 향해 이동했다.
레이를 필두로 한 원정군은 남부에 집결해 있는 원정군과 합류해 마경으로 진입할 예정이었다.
워프게이트로 향하는 원정군을 환송하는 인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악마 숭배자들이 수작을 부릴 것을 염려해 제국에서 인파를 고의로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많지 않은 인파였으나 모두가 원정군의 승전을 기원하며 환호하거나 눈물을 흘렸다.
요하나 또한 환송 인파 사이에 섞여 펑펑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흐어어어어엉..."
요하나는 정말 서럽게 울었다.
동행했던 데런은 요하나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그냥 요하나를 내버려 두었다.
정작 서럽게 우는 요하나를 보고 곤혹에 빠진 건 스페라였다.
스페라는 요하나가 이리 솔직하고 격렬하게 감정 표현을 하는 모습을 거의 접하지 못했다.
스페라가 어물거리다 요하나의 등을 약하게 두드려주자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 나쁜 새끼야아...!"
요하나는 레이를 생각하며 연거푸 욕설을 내뱉었다.
평소엔 뺀질뺀질하게 굴며 여유 있는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걱정은 걱정대로 끼치는 레이를 생각하며, 요하나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오래도록 펑펑 울었다.
스페라도 조금은 착잡한 마음으로 떠나가는 원정군을 지켜보았다.
레이를 향한 스페라의 믿음은 굳건한 편이었으나 마경이란 지명이 가져다주는 공포감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스페라는 요하나를 달래며 레이가 무사히 귀환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환영 인파 중에서는 이번 원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도 있었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도 있었다.
마경 원정을 멍청한 헛짓거리라 비난하며 분노를 토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두가, 마음속으로는 분명 원정군의 승리를 바랐다.
원정군이 승전하여 대륙에 구원을 가져다주기를 바랐다.
단 한 존재만을 제외하면 말이다.
"..."
금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환영처럼 떠올라 떠나가는 원정군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눈동자는 수만의 원정군을 흩어내고 단 두 사람만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었다.
소녀는 소년에게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 말했다.
소년은 소녀에게 오열하며 너를 지키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날의 대화를 몇 번이고 곱씹은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원하는 결말이 아니야."
여인은 결코 그런 결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너희가, 하르시아의 비원을 이루어야만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너희만이 그리할 수 있었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 기회였다.
"..."
결정을 내린 여인이 몸을 돌렸다.
얼마 안 가 여인의 모습은 빛 알갱이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
철통 보안 속에 워프게이트가 가동되었다.
황도에서 출발한 원정군이 워프게이트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원정군이 전부 워프게이트를 통과할 때까지, 워프게이트는 문제없이 작동했다.
황도에서 출발한 원정군이 남부에 결집한 원정군과 성공적으로 합류했다.
이제 최종 정비 후 마경으로 진격할 절차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한편, 레이는 원정군의 총사령관 알렉산데르와 대면했다.
악수를 끝낸 후 알렉산데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주 감명 깊은 연설이었소."
"...연설에 관한 이야기가 벌써 여기까지 퍼졌나?"
레이는 알렉산데르를 존대하지 않았다.
당장 레이의 신분이 황제의 대리인인지라 존대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알렉산데르는 강력한 권위로 원정군을 이끌어야 하는 총사령관인 만큼 레이를 극히 존대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다.
"마경에서 사용할 통신 장비가 전군에 보급되었잖소. 그 덕분에 남부의 원정군 또한 그대의 연설을 들을 수 있었소."
"아이고..."
레이는 괜히 낯이 화끈거리는 기분이라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알렉산데르가 웃는 얼굴로 레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주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연설이었으나, 명연설이었소. 군단의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소. 보아하니 직접 준비한 연설 같던데. 황실의 대신들이 그런 연설문을 작성하였을 것 같지는 않고..."
레이는 연설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 오래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준 후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좀 의외였어."
"무엇이?"
"변경백... 아니, 총사령관께서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원정에 협력해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거든."
"하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알렉산데르가 솔직하게 감탄을 드러냈다.
"그대는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더군. 내 평생 이리 남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난 적이 손에 꼽힐 것이오. 그래... 치욕적인 감정도 느꼈소."
"..."
"허나... 마음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소."
"..."
"이곳은 나의 기반이고 나의 사랑하는 고향이오. 그 무엇도 해보지 못하고 고향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그보다 더한 치욕이 세상에 존재하겠소? 또한..."
알렉산데르가 아공간 기술을 활용한 통신 장비를 레이를 향해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의 연설대로, 제국과 함께 영속될 신화의 선봉으로 기록될 기회가, 그리 자주 찾아올 것 같지는 않았소."
"원정에 실패하면 나와 함께 천하의 역적으로 기록될 텐데."
"균형이 맞는 도박이지."
알렉산데르의 답변을 들은 레이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알렉산데르에게 물었다.
"총사령관께서는 이 원정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실패할 것이오."
의외로 알렉산데르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부정적인 뜻을 내비쳤다.
"군단이 준비되는 동안 교황청에 남아 있는 '금서'들을 전부 찾아봤소."
"금서들?"
"그 금서들에는 신앙이 투철한 자들이 마경을 침공한 역사 또한 기록되어 있었소."
"..."
"다른 추기경들께서 왜 그리 발을 빼려 했는지 알 수 있었소. 인간에게는 영속과도 같은 수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축적된 악마... 악신의 권능들. 그 저주받은 축복이 뭉치다 못해 형상을 이루고 기어 다니는 대지가 바로 마경이오."
"..."
"그런 존재들 또한 무적은 아닐 테지. 허나 로드 급의 발목을 잠시 붙잡을 수 있는 개체들은 충분히 많을 것이오."
한정된 시간 내에 적을 뚫어내야 하는 원정군의 입장에서, 선두에 위치한 로드 급이 발목을 잡히기 시작하면 원정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원정이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오."
"헌데 어째서 이 자리에 있지?"
"글쎄... 나답지 않은 결정이긴 했소. 나의 것이 되리란 대지와 사람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리라 생각하니 나답지 않게 충동이 좀 더 앞섰나 보오."
알렉산데르는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그리 답했다.
레이는 잠시 동안 가만히 알렉산데르를 마주 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알렉산데르 추기경, 당신에게는 감사하고 있어. 당신의 속내까지 내가 살펴볼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나 때문에 꽤나 불쾌했을 텐데 이렇게 협력해주었으니까 말이야."
알렉산데르는 레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일단 가만히 기다렸다.
레이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자기 미간을 꾹꾹 매만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당신은 원정군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이기도 하니, 나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공유해줄게."
"진실? 음... 기대해보겠소."
"근데 당신에게는 좀 불쾌한 내용일 수도 있어."
"알겠소. 미리 마음을 다스려놓도록 하지."
"뭐, 좋아. 하르시아는 마경에서 죽었어."
"...지금 말씀하시는 하르시아가 600년 전의 영웅이신 그 하르시아님을 칭하는 것이오?"
"그래. 600년 전 하르시아는 홀로 마경을 침공했어. 그리고 당신이 금서에서 보았다는 그 수많은 악의들을 홀로 갈아버렸지."
"..."
"그리고 하르시아는 마경에서 죽었어. 리실로테가 하르시아의 부탁으로 제국의 신검을 회수했고, 리실로테의 안배가 발견되며 제국의 신검은 신검의 진정한 주인이신 황제 폐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
"..."
너무 허황된 이야기라 알렉산데르는 이걸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입을 살짝 벌린 채 뭐라고 따지고 들어야 하나 헤매던 알렉산데르가 결국 맥아리 없이 중얼거렸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군."
일단 레이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경고한 그 끔찍한 악의들은 이미 하르시아에 의해 갈려나갔고, 고작 600년의 세월 동안 그런 것들이 복구되었을 리가 없어."
"..."
"그러니까 원정의 난도는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쉬울 거야. 충분히 성공할 수 있어. 내가 원정을 밀어붙인 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이것 참... 뭐라 해야 할지..."
"이해가 안 가는 게 많겠지. 처음부터 끝까지, 비현실적인 이야기이니까."
"그대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남아있는 사료가 있소?"
알렉산데르는 직설적으로 그리 물었고 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그러니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마음 놓고 하는 것이기도 하고."
"...쉬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기는 하오."
"그래. 하르시아는 어째서 마경으로 향했지? 더군다나 어째서 홀로 마경으로 향했지? 왜 그와 관련된 기록들은 단 한 줄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지? 설령 이 모든 게 진실이라 해도..."
"..."
"단 한 명의 인간이 수천 년 동안 집약된 마경의 악의를 부수고 승리를 거두는 게 가능할까? 아무리 그 제국 역사의 정점이라 여겨지는 하르시아라 해도?"
레이는 알렉산데르가 품고 있는 의문을 하나씩 짚어주었다.
그리고는 의미를 알기 힘든 웃음을 머금은 채, 허리를 기울여 마주 앉은 알렉산데르와 거리를 좁혔다.
"헌데 알렉산데르 추기경.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이 훨씬 더 이상하지 않나?"
"...무슨 말씀이오?"
"드래곤은, 그냥 드래곤이야."
"...?"
"멸종해버리는 바람에 묘하게 과대평가 받는 부분이 있는데, 드래곤은 드래곤이야. 엘-람에게 권능을 나눠 받았지만 결국은 필멸자 수준이지. 당신이 어지간한 드래곤보다는 훨씬 강할 거야."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이오?"
"잘 생각해봐. 엘-람이나 악신들. 그러한 초월적인 존재가 창조해낸 권능이 얼마나 위대하고 난해한지. 소드마스터인 당신이라면 내 말을 이해하지?"
"..."
"흔히 '초월의 경지'라 불리는 영역에 발을 들인 소드마스터라 해도, 초월적인 존재의 권능에 직접 간섭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하나 물어볼게. 당신이라면 초월적인 존재가 창조해낸 권능을 변질시키는 게 가능한가?"
"...시도는, 할 수 있소."
"바로 그거야. 시도는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랬다가는 어떻게 될 것 같나?"
"..."
"초월적인 존재의 권능이 어떤 구조로 작동하는지 필멸자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나? 없어! 근데 메커니즘도 파악 못 했으면서 그런 강대한 힘을 멋대로 변질시켰다가는... 펑!"
레이가 양손을 휘저어 무언가 폭발하는 모습을 흉내 냈다.
"이렇게 되겠지. 변질을 시킬 수는 있어! 하지만 원하는 결과물을 창조하는 건 불가능해. 인정하나?"
"...인정하오."
"그럼 지금 상황이 매우 이상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겠지. 고작 드래곤 따위가 대체 어떻게...? 엘-람의 권능을 변질시켜 악신의 권능과 융합시킬 수 있었지?"
"..."
"답은 하나야. 타락한 드래곤 프레체스는, 아무 지식 없이 권능을 변질시켜 새로운 힘을 창조한 게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보고 모방한 거야."
알렉산데르는 불현듯 한기를 느꼈다.
어떠한 불길한 가능성이 머릿속에 떠오를듯 말듯 걸쳐져 뇌리를 흔들었다.
레이는 여전히 의미를 알기 힘든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자,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리지. 하르시아. 제국 역사의 정점. 제국의 가장 위대한 영웅. 그리고, 별빛 너머의 존재에게까지 위해를 가할 수 있었던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존재."
"..."
"하르시아는 어째서 마경으로 향했지? 그곳에 무엇이 있었지?"
"잠깐..."
"그곳에는."
"잠시 기다리시..."
"첫 번째 혼종이 있었다."
"...!"
알렉산데르가 눈을 부릅뜨고 레이를 노려보았고, 레이는 조소했다.
"저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하르시아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인류의 생존을 인질로 잡고 하르시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쾅!!
"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이오!!!"
알렉산데르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일어났다.
허나 레이는 무시하고 진실을 입에 담았다.
"엘-람과 악신들이 손을 잡고 창조한 첫 번째 혼종이, 거기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