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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321화 (321/446)

321화

그것을 화해라 칭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레이는 요하나와 섭섭함을 풀고 웃는 얼굴로 이지스를 떠났다.

터진 입술에서는 비릿한 피 맛과 함께, 요하나에게 묻어 나온 은은하고 근사한 향기가 느껴졌다.

"하..."

향수 냄새를 맡다 보니 그 철부지 같던 아이가 더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 새삼스레 다가오는 듯했다.

레이는 길거리를 걸으며 혼자서 실실 웃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요하나와의 대화가 잘 마무리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이제는 오롯이 원정에 관해 집중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며칠 뒤 레이는 예상 밖의 난관과 마주쳤다.

뭐, 사실 예상은 했으나 외면하고 있던 난관이기는 했다.

한창 황도에 군세가 집결하기 시작한 시점에...

레이는 황도의 거리에서 세리아에게 겨드랑이를 잡혀 대롱대롱 들려 있었다.

다행히도 세리아와 동행한 디오리카가 마법을 발현해 남들 눈에서 레이와 세리아의 모습을 감춰주었다.

세리아는 축 처진 레이를 흔들며 말했다.

"고모는 슬퍼."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한 마디였다.

세리아는 레이가 자신과 어떤 상의도 하지 않고 여러 일을 진행한 것에 대해 많이 섭섭했다.

세리아는 레이의 결정을 질책하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를 요구했다.

"같이 가자. 마경."

"음, 안 돼요, 안 돼."

절대 안 됐다.

세리아의 상태가 멀쩡했다면 레이도 굳이 세리아를 말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허나 세리아의 저주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교황청에서도 저주의 해주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세리아의 맞춤 성물을 제작하려 했는데, 마경 원정이 결정되면서 세리아를 위한 성물 제작이 좀 밀리게 되었다.

더군다나 맞춤 성물이 있다고 해도 문제였다.

마경에 진입하면 성물의 성능은 떨어지고 저주는 강화된다.

당장이야 약간의 출혈이 계속될 뿐이었지만 마경 내부에선 증상이 훨씬 심각해질 게 뻔했다.

즉, 들어가서 죽을 작정이 아닌 이상 세리아가 현 상태로 마경 안에서 전투를 치르는 건 불가능했다.

레이가 그 부분을 지적하며 솔직하게 말했다.

"저주가 심화되면 고모는 오래 못 버텨요. 마경에 동행한다면 고모는 오히려 제게 짐만 될 거예요."

"..."

레이의 주장이 옳기는 했다.

허나 세리아에게 있어 레이를 홀로 마경에 보낸다는 것은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조카."

"뉑. 왜용?"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애교를 부려보는 레이를 세리아가 위아래로 흔들며 슬픔을 드러냈다.

"이제 조카밖에 없어. 고모에게는."

"어... 음... 고모."

레이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고민하던 레이는 조금은 착잡해 보이는 웃음을 머금은 채 세리아에게 진심을 전했다.

"고모, 저는 고모가... 이제는 상처를 딛고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

"고모께서 평범한 사람은 수십 번은 주저앉았을 충격적인 일들을 겪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고모는 강한 사람이잖아요. 우리 아빠처럼 성실하고 따뜻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

"고모의 헌신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왔어요. 하지만 저는... 제 존재가... 고모를 과거에 묶어두는 족쇄가 되지 않기를 바라요."

"..."

"그러니까 이제는 고모께서 과거에만 얽매이지 말고, 주변을 돌아보시고 고모께서 가고자 하시는 길로 나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살짝 떨려오는 세리아의 눈꺼풀을 보며 레이가 얼른 덧붙였다.

"물론 이러나저러나 조카는 고모를 많이 사랑합니다."

세리아는 바로 반응했다.

"우리 조카 대견하고 귀여워."

쪽쪽쪽쪽쪽

세리아의 뽀뽀 세례에 레이가 끼에에엑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그렇게 한참의 뽀뽀 세례를 견딘 후에야 레이는 풀려났다.

다행히 세리아는 레이를 곤란하게 만들 고집을 계속해서 부리지는 않았다.

세리아와 이야기를 끝낸 후, 레이는 잠시 디오리카와 대면했다.

디오리카가 먼저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짭조카님."

"하하... 찐조카님께서는 무탈하셨습니까?"

"예, 저는 괜찮습니다만... 어째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저도 원정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아하..."

안색이 안 좋은 이유가 있었다.

황제가 원정을 천명한 이상 제국의 귀족들도 그 결정에 응해야 했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가문일수록 성의를 보여야 했는데, 알슈테인 공작가에서는 디오리카를 대표로 보낸 모양이었다.

디오리카 정도면 충분히 공작가를 대표할 만큼 명망도 있고 실력도 있었다.

그 대신 마탑에서 주로 활동하느라 가문 내부에서 살짝 떠 있는 위치였는데, 오히려 그게 독이 되어 원치 않는 책무를 지게 된 듯 보였다.

디오리카가 굳은 얼굴로 레이에게 물었다.

"원정에 성공할 가망이 있다고 보십니까?"

"제가 원정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

"저는 가망 없는 도박판에 제국의 명운을 올릴 만큼 멍청하지 않습니다."

"하아, 제가 우문을 입에 담았습니다."

"물론 승전을 반드시 장담하기는 힘들겠지요. 허나 승산 없는 전쟁이 아닙니다. 그러니 부디 결의를 품고 함께해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시작한 일로 인해 고생을 하시게 되었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레이가 장난스레 그리 말하자 디오리카도 기운이 빠진 얼굴로 따라 웃었다.

*

원정군이 순조롭게 집결하고 있는 가운데.

대륙 회의에서는 원정에서 활용할 작전을 수립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원정군의 표적인 프레체스의 대략적인 위치, 그리고 거기까지 도달하는데 존재하는 마경의 지형.

수호자급 엘프의 희생까지 감내하며 얻어낸 그 두 가지 정보를 엘프들이 제공했다.

그 덕분에 필수적인 정보는 확보했으나 그럼에도 제대로 된 작전을 세우기에는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다.

허나 지금 시점에서 마경의 정보를 새로 수집할 여력도 시간도 없었기에, 결국 가지고 있는 빈약한 정보만으로 작전을 세워야 했다.

"부대 내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성직자 비율을 늘려야..."

"거점으로 삼을 만한 후보군을 정리해서..."

군대의 전략 전술 분야에 조예가 깊다는 자들이 수백 년 전 자료까지 가져와서 치열한 논의를 이어갔다.

황제 또한 그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의 발언보다 황제의 발언이 가장 가치 있었다.

황제는 일천 년간 이루어진 크고 작은 전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한 자였다.

탁상공론이 될 수도 있었던 회의는 황제의 주도 아래 점점 더 형태를 갖춰갔다.

황도에 복귀한 레이 또한 작전을 수립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했다.

"..."

레이는 이쪽에 자기 조예가 깊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입을 다물고 회의를 경청했다.

헌데, 가만히 듣고 있자니 작전 회의를 진행하는 자들은 '마경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보다 '마경에서 어떻게 퇴각해야 하는가'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전쟁에 이길 생각도 없이 내뺄 생각만 다들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허나 그건 오해에 가깝기는 했다.

마경 원정의 목적은 프레체스의 제거였다.

프레체스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마경의 심부에 닿아야 했다.

그러나 마경에서는 차근차근 점령지를 넓혀가며 조금씩 밀고 들어가는 작전을 사용하는 게 불가능했다.

정보도 크게 부족했기에 결국 원정군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마경 외곽 구역에 1차 전선을 형성한 이후 선두가 심부까지 송곳처럼 파고드는 수밖에 없어.'

이건 종심 돌파 작전...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작전 대로라면 프레체스의 위치를 꼭짓점으로 해서 말라 비틀어진 삼각형 형태로 전선이 형성될 텐데, 이런 형태의 전선은 삽시간에 붕괴된다.

그럼에도 퇴로 확보를 위해서는 짧은 시간이라도 전선을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결국... 전선을 따라 임시 거점을 몇 개 만들고 유기적으로 상호 지원하며 시간을 잠깐 벌겠다는 건데...'

이게 가능하다고 해도 역시나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굉장히 짧을 것이라 예측됐다.

즉, 이 전쟁은 프레체스를 타격해야 하는 원정군의 선두에게 있어 아주 빠듯한 '타임 어택'이었다.

마경의 변수로 인해 선두의 돌진이 일정 시간 이상 지체되면 그 시점에서 작전은 실패였다.

작전에 실패하면 거점과 전선이 붕괴되어 마경에 갇혀 전멸하기 전에 빠르게 퇴각해야 했다.

"..."

그렇기에 회의에 참여한 자들은 어떻게 해야 병력을 최대한 온존해서 퇴각시킬 수 있는지 격렬히 논의했다.

마경의 변수를 예측할 수 없다 보니 따져야 할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다.

"난전이 될 겁니다. 유기적으로 병력을 움직이려면 지휘관들이 사용할 수 있는 실시간 통신 장비를 최대한 많이 준비해야 합니다. 아니면 순식간에 쪼개져서 전멸할 위험이 큽니다."

"마경에서 실시간으로 통신 가능한 장비가 있기는 있소?"

"아공간 마법을 활용한 통신 장비라면 가능하답니다. 지금 황실 마탑에서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부족한 통신 장비를 충원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중앙 부근에 최정예를 집중적으로 배치해야 하오."

"그리했다가 후방 전선이 붕괴되면 원정군의 정예는 그대로 전멸하는 것이오."

"하... 편제를 어찌 해야 할지 골치 아프군."

"효율은 떨어지겠으나 재편이 필요할 것 같군. 제국을 제외한 단일 국가로 편제된 병력들에게 거점 한 곳을 오롯이 맡길 수는 없소."

밤낯 없이 격렬한 회의가 이어졌다.

원정군의 지휘 체계 확립이나 병력 배치 문제들은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사안이라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 모든 문제를 단호하게 제어해내며 비현실적이거나 지나치게 복잡한 작전안 또한 과감하게 쳐냈다.

제국이 어떻게 일천 년의 세월 동안 굳건하게 인류의 주인으로 존립할 수 있었는가.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황제는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

한편.

레이는 답답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게 자리를 지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작전안은 뚜렷하게 완성되어갔고, 마지막까지 회의의 주된 논제는 '어떻게 최소한의 피해로 후퇴할 수 있느냐'였다.

*

원정군은 두 장소에 나뉘어 결집하고 있었다.

현재 제국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는 루비하 왕국과 알리모 왕국의 원정군은 황도에 도착해 제국의 군단과 합류하고 있었다.

다른 국가의 원정군은 남부로 향해서 신성 교단의 이름 아래 재편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물론 병사들만 바삐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총력전 태세에 들어가며 대륙의 모두가 전쟁에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제국은 비축해놓았던 재화와 아티펙트를 풀어 군사를 무장시켰다.

다른 국가와 세력들 또한 숨겨두었던 물자를 반강제로 공개해서 원정군에 지원했다.

대륙의 주요 마탑들은 전쟁에 사용될 아티펙트를 하나라도 더 시간에 맞춰 제작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었다.

교황청 또한 은밀히 보관하던 성물들을 다수 풀었다.

이례적이라 수식해도 모자람이 없는 대규모 군단이 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그리고, 출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레이는 로브를 덮어쓴 채 황도의 술집에서 잠시 술을 마시며 휴식하고 있었다.

황도의 술집이라고는 하나 귀족들이 사용하는 공간은 아니었기에 모자까지 덮어쓴 레이를 알아볼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군단이 결집해가며 황도 또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많이 소란스러웠다.

술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화제 또한 전부 전쟁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꽤 단련된 몸을 지닌 남자가 술을 들이켜며 심란한 기색을 드러냈다.

"우리는 지옥에 기어들어 가는 거야. 다 개죽음을 당할 거라고."

"..."

반대편에 앉은 남자의 친우가 한숨만 푹푹 쉬었다.

술이 들어갈수록 불만이 가득한 남자의 목소리는 더더욱 커졌다.

종내 악귀처럼 인상을 구긴 남자가 크게 소리쳤다.

"제기랄!! 내가 왜 지옥으로 걸어들어 가?! 이건 병신 같은 자살 행...!!"

쾅!!

레이의 손아귀에 붙들린 남자의 머리가 탁자 위에 내리찍혔다.

깜짝 놀라 일어서려는 남자의 친우를 레이가 어깨를 잡아 눌렀다.

"하아... 친구 말조심 좀 시켜. 군법으로 다스리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모르나?"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눈치가 나쁘지 않은 남자의 친우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잘못을 빌었다.

레이가 기절한 남자의 머리를 놓아주는 순간 뒤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슬란 후작님께서 만나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그래? 바로 가지."

레이가 아도이아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술집에 있던 다른 이들은 아도이아가 입에 담은 말을 듣고 흠칫 놀라 얼어붙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는 아도이아를 따라 가게를 나와서, 그길로 프리슬란 가문의 저택에 잠시 들렀다.

"왔느냐?"

에른스트가 집무실에서 레이를 맞아주었다.

레이가 가볍게 예를 갖추자 에른스트가 본제를 꺼냈다.

"일주일 후에 황도에 집결한 원정군이 남부로 향할 것이다. 그곳에서 남부에 집결한 원정군과 합류해 마경에... 진입한다."

"..."

레이는 잠시 에른스트의 얼굴을 살폈다.

레이는 에른스트가 '성검'에 관해 한 번은 추궁할 것이라 생각했다.

뭐, 추궁까지는 아니더라도 넌지시 떠보기라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성검과 안소니우스에 관해 레이에게 묻지 않았다.

레이는 에른스트의 속내를 생각해보다 다시 에른스트의 말에 집중했다.

"너는 황제 폐하의 대리인으로서 원정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영광입니다."

"그런 말을 듣고자 부른 게 아니다. 황도에서 출전을 앞둔 군단 앞에서, 네가 황제 폐하를 대리해 연설을 해야 될 것 같다."

"...제가 말입니까?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황제가 먼 곳에 떠나 있다면 모를까.

레이가 굳이 황도에서 황제의 역할을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에른스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레이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황제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 전장에 직접 서는 자가 앞으로 나서는 게 군단의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예, 알겠습니다."

"연설문을 직접 준비하겠느냐?"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럼 연설문이 준비되면 확인해보도독 해라."

"예, 뭐... 적힌 대로 읽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제국의 신검을 네게 한시적으로 위임하실 것이다."

레이가 정말로 당황해서 되물었다.

"예?"

영광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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