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필립스 백작령의 영주성에서.
알레시아는 카렌과 다과를 즐기며 뿌듯하게 웃었다.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서로의 배를 볼 때마다 알레시아는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카렌 혼자만 애를 가졌다면 이쪽은 얼마나 속이 뒤틀렸겠는가!
알레시아는 그런 끔찍한 상황에 직면하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며 자기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니라고 불리고 싶다면 쟤보다 하루만 빨리 나오너라!"
미리부터 우위를 점하길 재촉하는 알레시아를 보고 카렌도 따라 웃었다.
이제는 알레시아나 카렌이나 입덧은 거의 사라진 덕분에 식사도 잘 하고 있었다.
오늘은 레이가 부탁해서 함께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알레시아는 자기 배를 쓰다듬다 말고 불쑥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불안해지는구나!"
"...왜요?"
"남편이 갑자기 잘해줄 때는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 들었느니라!"
어째 이번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레이가 당도 높게 구는 게 은근히 신경 쓰였다.
스윗해진 남편(아직 아님)과 히죽이고 있다 보니 방심했는데, 레이는 본래 알레시아에게 그리 스윗하게 구는 성격이 아니었다.
카렌은 아이가 생겼으니 레이가 배려해주는 것을 알레시아가 너무 과하게 해석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알레시아의 감이 맞았다.
"앞으로 한두 달 정도 자리를 비워야 돼."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던 방 안으로 들어온 레이가 첫마디부터 속을 긁었다.
알레시아가 곧장 빽 소리쳤다.
"그럴 줄 알았느니라!"
알레시아가 툴툴거렸고 카렌은 조금 섭섭한 얼굴을 했다.
물론 두 사람 다 진심으로 레이를 질책하거나 붙잡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의 능력이 원체 출중하다 보니 필립스 백작령에 장기간 묶여있을 수 없다는 것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시간 내서 찾아와준 것만으로도 내심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가 본격적으로 제국이 처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이어갈수록 두 사람의 표정이 나빠졌다.
이리저리 순화해서 표현하긴 했으나 결국 마경에 머리를 들이밀겠다는 소리를 레이는 하고 있었다.
알레시아가 진심을 담아 꽥 소리쳤다.
"여인을 덮쳐 자기 아이를 품게 하고는 어찌 그리 위험한 전장으로 향한다는 말이냐?!"
"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가 덮쳤잖아."
"..."
그새 당도가 빠진 남편의 태도에 알레시아가 뒷목을 붙잡으려다 아이를 생각해서 혈압을 억눌렀다.
입을 삐죽 내민 알레시아를 보고 헛기침을 한 레이가 뒤늦게 알레시아를 달래주었다.
그 사이 카렌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잠시 갈등했다.
카렌은 레이의 발목을 잡기 싫었다.
또한 자신이 레이에게 그리 대단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라는 명확한 자신도 없었다.
그럼에도 카렌은 용기를 내서 레이의 손을 양손으로 쥐며 입을 열었다.
"레이... 다시 생각해주면 안 될까? 꼭... 위험한 곳으로 가야 해?"
"걱정하지 마."
대답은 레이가 아닌 루나에게서 들려왔다.
카렌과 알레시아가 동시에 루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루나는 평소처럼 무감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세간에 퍼진 마경의 인식은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어. 마경은 인간이 장기간 생존하기에는 부적합한 환경이지만 그렇다고 용암이 바다처럼 흐르는 지옥은 아니야."
"..."
"두 사람이 걱정하는 것만큼 위험한 전쟁이 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내가 레이를 지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언제나 냉정하고 담담하게 진실을 입에 담았던 루나였기에 레이가 목이 쉬도록 떠드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레이는 루나의 지원을 받아 카렌과 알레시아를 거듭 안심시켰다.
결국 카렌도 알레시아도 어쩔 수 없이 납득하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마음에 싹튼 불안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것은 레이도 알았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두 사람에게 안정을 주기 위해 레이는 따뜻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날 생각해서라도, 내 걱정하느라 건강 상하지 말고, 잘 챙겨 먹고 잘 쉬고 있어."
"...응, 알겠어. 그렇게 할게. 레이도 조심해."
"...나도 알겠느니라, 나의 기사여. 다치지 말거라."
"두 사람 다 고마워. 미안하고. 우리 아이들 잘 부탁할게."
레이가 웃음을 머금은 채 두 사람의 손등에 한 번씩 입을 맞추었다.
카렌과 알레시아는 한숨을 쉬면서도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
본래는 필립스 백작령 또한 원정군에 물자와 병력을 지원해야 했다.
허나 제국령 중 거의 유일하게 그러한 의무에서 자유로웠는데, 레이가 백작령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여유가 생긴 필립스 백작은 만약을 대비해 디디에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의 기사를 알레시아와 동행하도록 했다.
레이는 백작령을 떠나기 전 잠시 클레멘스를 찾았다.
정원으로 가니 클레멘스와 미네르가 재활 치료를 겸해 보폭을 맞춰 정원을 걷고 있었다.
이전보다 회복되어 있는 미네르의 귀를 보며 피식 웃은 레이가 클레멘스와 인사를 나누고 가볍게 당부했다.
"뭐... 그럼 또 나 없는 동안 잘 부탁하지."
"예, 알겠습니다."
"미네르 너는 사고 치지 말고. 너 사고 치고 도망쳐도 내 눈에서 못 벗어난다."
"네에-."
귀가 좀 회복되어 기가 살아났는지 또 태도가 묘하게 건방져졌다.
레이는 머리를 한 번 쥐어박는 시늉을 하고는 상태 좋은 사과를 하나 미네르에게 건네준 후 작별 인사를 끝냈다.
이제 남아있는 일이라고는 챙겨놓았던 짐들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어디 보자..."
레이가 짐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지미가 레이 곁으로 다가와 의자 위에 털썩 앉으며 입을 열었다.
"죽으러 가냐?"
"아뇨, 돌아올 겁니다. 반드시 돌아와야죠.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았는데, 거기서 죽어버리면 누가 수습합니까."
"돌아와서 해결해야할 일을 다 끝내놓고는?"
"작별 인사를 다시 해야겠죠."
"너는 지독하게 이기적인 새끼야."
"그러게 말입니다."
레이는 싱긋 웃었고 지미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짐을 챙긴 레이가 밖으로 나오자 저 멀리서 레아가 와다다 달려왔다.
레이는 달려오는 레아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결국 또 지미한테 부탁을 하게 되네요. 저 갔다 오는 사이 레아 좀 신경 써주세요. 특히 혼자서 돌아다니지 않게..."
"걱정 마. 저번에 오시리스 백작령 때 일로 아직 혼자 두면 벌벌 떤다. 벨라나 내가 붙어 있을 때나 뛰어다니지."
"지금으로선 차라리 다행이네요."
지미의 영지도 안전했지만 황도 안이 더 안전했다.
그럼에도 레이가 지미의 영지를 택한 것은 결국 레아 때문이었다.
에른스트는 물론이고 무언가를 감지하는데 특화된 능력을 지닌 자들이라면 레아를 보고 위화감을 느끼는 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감지 능력을 지닌 자들은 극소수겠지만 황도 안에서라면 그런 이들과 마주칠 확률이 아예 없다고 장담하기 힘들었다.
레이가 돌아올 때까지 레아는 그냥 벨라 곁에 꼭 붙어서 숨어 있는 게 옳았다.
"벨라에게도 한 번 더 잘 설명해주세요, 지미."
"그래, 알겠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레아가 폴짝 뛰었다.
레이가 레아를 안아주자, 레아는 레이 목에 묶여있는 목도리를 보며 해맑게 웃더니 생색을 냈다.
"레아 선물이다!"
"그래, 레아 선물이지."
"목도리 좋아?"
"좋은데 좀 더워."
"레아가 준 선물 오래 써야 해! 레아가 열심히 만들었어!"
"그래, 노력해볼게."
레이는 레아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피식 웃었다.
"오빠 고생시킨 만큼 나중에 너도 내 딸내미들한테 한번 들들 볶여봐라."
"응?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아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레이가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는 마차를 향해 걸었다.
곧 출발해야했다.
*
대륙 회의에서 레이는 자리를 꽤 오래 비웠다.
원정에 관한 사안은 큰 문제 없이 착착 진행되는 중이었지만 이제는 복귀해야 했다.
허나 레이는 필립스 백작령을 떠난 후 지미의 영지에 들러 방비를 정비하고는 요하나를 먼저 찾아갔다.
그리고, 요하나에게 카렌과 알레시아가 임신을 했다고 고백했다.
레이는 내심 긴장한 채 임신 사실을 고백했지만...
요하나의 반응은 레이의 예상과 달리 굉장히 퉁명스러웠다.
"...웃으라고 하는 농담이야?"
요하나는 레이의 말을 바로 믿지 않았다.
카렌 혼자서 임신을 했다고 했으면 믿었을 터다.
헌데 알레시아까지 레이 애를 가졌다고 하니 당연히 레이가 장난을 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레이는 예상치 못한 요하나의 반응에 당황했다가 결국 굉장히 진지하게 같은 말을 반복해야 했다.
한참 뒤에서야 레이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요하나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버럭 소리쳤다.
"알레시아 님이랑?! 너 변태야?!"
"..."
집에서 기르던 멍멍이랑 이상한 짓이라도 한 것처럼 요하나가 반응하자 레이는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잠시 침묵했다.
그 사이 얼굴을 더욱 벌겋게 물들인 요하나가 턱에 힘을 가득 주었다.
얼마 전 고향에 돌아갔을 때 요하나는 은근히 레이에게 새로 받은 목걸이를 자랑했었다.
그때 이미 카렌과 알레시아는 배에 레이의 아이를 지니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치밀어 오른 요하나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아이씨..."
너무 한꺼번에 부정적인 감정이 몰아치니 속이 울렁거리는 와중에도 정신은 오히려 더 맑아지는 듯했다.
요하나는 부릅뜬 눈으로 레이를 노려보며 잇몸에서 피가 흐르도록 턱에 힘을 주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축...하해."
"..."
"축하한다고...!"
"..."
"왜 대답이 없어? 축하한다니까? 이 말 들으려고 얘기한 거 아니야?"
"축하한다는 사람 치고 표정은 존나 섭섭해 보인다?"
"그냥...! 놀라서 그런 거니까 할 말 끝났으면 그만 나가. 빨리...!"
요하나는 두 눈을 충혈시킨 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화를 냈다.
평소의 레이였다면 이 자리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 좀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레이는 이미 자기 컨셉을 확실히 정해 놓았다.
할 말은 한다 레카콜라...! 까지는 아니었지만.
뭐 그거랑 비슷하기는 했다.
"아니 요하나, 너는 옛날부터 내가 카렌에게 해주는 거 똑같이 안 해주면 만날 화내고 삐치고 섭섭해하더라?"
"...!"
요하나는 곧장 내가 언제 카렌처럼 대해달라 했냐고 버럭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레이는 요하나가 입술을 달싹이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고함을 내질렀다.
"아니 대체! 왜 네가 섭섭해하는데?! 응? 섭섭한 건 나지!! 내가 섭섭하다고!!"
"?"
"남들 엄마 찌찌 빨고 있을 때부터 이리저리 굴러가며 키워줬더니, 응?! 처음에는 나만 보면 헤실헤실 천사처럼 웃던 애가 사춘기가 와서는 내 얼굴만 보면 틱틱대기나 하고!!"
"야!! 네가... 네가 막 만날 나만 놀렸잖아...!! 땀 냄새가 어울린다고 하고 그랬잖아!"
"야이씨, 네가 먼저 내 얼굴만 보면 '재수 없어 진짜~' 이러면서 짜증내고 카렌보다 키 작은 꼬맹이라고 놀렸잖아!!"
"유치하게 내가 좀 그랬다고 너도 그래?! 어떻게 그래?!"
"야!! 나도 너랑 동갑이거든?!"
뭐, 일단 육체 나이로는 동갑이었다.
레이는 가슴 속에서 데굴데굴 굴러대는 양심을 무시하며 연거푸 소리쳤다.
"나도 응?! 똑같은 사람인데 만날 틱틱대면서 입 삐죽 내밀고 짜증내는 애보다 옆에서 사근사근 웃어주는 애한테 정감이 더 가는 게 당연하지 않냐?!"
"나는...!!"
요하나도 할 말은 더 있었다.
레이 앞에서 짜증을 내며 입을 삐죽이긴 했지만 남을 괴롭히거나 다른 잘못을 하지도 않았고, 또한 괴롭고 힘들었지만 레이가 요구했던 단련도 성실하게 이어갔다.
그것 외에도 요하나는 나름 대로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레이에게 자꾸만 신경질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 또한 부정하기 힘든 진실이었다.
결국 요하나는 입 안에서 맴도는 길고 긴 항변을 삼키고는 짧게 분통을 터뜨렸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너 나 아직도 좋아하냐?"
"그래!! 좋아한다!! 됐냐?!!"
소리를 빽 지른 요하나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씩씩댔다.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하지만 요하나는 부끄러움 탓에 얼굴이 화끈거리지도 긴장 탓에 심장이 콩닥대지도 않았다.
그저 오랫동안 담아왔던 말을 드디어 내뱉었다는 후련함과 막연한 후회의 감정이 가슴을 쓰리게 했다.
요하나는 이제까지, 자기가 원해서 레이에게 말 안 듣는 딸내미처럼 군 것은 아니었다.
레이와의 인연은 너무나 깊게 얽혀 있어 요하나는 항상 레이와의 관계성에 대해 헤맬 수밖에 없었고, 레이의 애매한 거리감이 그러한 혼란을 더욱 부추겼다.
사춘기 소녀에게 그러한 감정적인 혼란은 쉽사리 넘기기 힘든 스트레스였다.
물론 그로 인해 결국 후회를 머금어야 했던 사람 또한 요하나 자신이었다.
요하나는 그 외면하고 싶었던 사실을 결국 인정하며 다시 물었다.
"내가...!! 너 좋아하면... 그래서 뭐 어쩔 건데...?!"
"..."
레이는 후련한듯 서운한듯 홀로 훌쩍이는 요하나를 바라보다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한숨을 길게 쉰 레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두 사람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두 사람과는 좀 충동적으로 육체적 관계를 맺었어."
"...그랬겠지."
어째 요하나는 굉장히 쉽게 레이의 주장에 납득했다.
그 알레시아와 교접한 걸 보니 술이라도 잔뜩 처마셨을 거라고, 요하나는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요하나의 인식 속에서 알레시아는 대체 어떤 존재인가... 잠깐 고민하던 레이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너도 눈치챘겠지만 내가 쓰는 기술이 몸에 부담이 많이 돼. 높으신 분들 눈에 위협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
"재수 없으면 요절할 수도 있어서 굳이 연인이나 가족 같은 걸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 가볍게 만날 관계는 내가 싫었고."
"..."
"그래서 너희들이랑도 거리를 좀 두려고 했는데... 내 태도가 애매해서 괜히 상처만 더 준 것 같아서 그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
"근데 이제 마경 문제 해결되면 더는 일선에 안 나서고 뒷방 늙은이 노릇이나 할 것 같거든?"
"..."
"그때도 이 우유부단하고, 눈치 없고, 속 좁고, 상처나 주고, 이미 다른 여자를 양옆에 끼고 있는 놈한테 정이 덜 떨어져서 관심이 있으시면, 그때 다시 우리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고."
로맨틱한 분위기라고는 쥐뿔도 없는 참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선언이었다.
레이도 그걸 잘 알았지만, 10년 가까이 엉키기만 했던 서로를 향한 섭섭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내기 위해서는 이리 면전에서 대놓고 까발리는 것 말고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레이가 침묵하고 있는 요하나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시원하게 욕을 해도 되고."
"..."
요하나는 한참 더 레이를 노려보다 방을 나갔다.
레이는 여기서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코를 풀거나 눈물을 닦아내고 얼굴을 정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는 일단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충혈된 눈동자를 치켜뜬 요하나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요하나는 레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곧장 레이의 멱살을 콱 잡아 붙들었다.
"야 이 나쁜 개새끼야...!"
시원하게 욕설을 뱉어낸 요하나는, 눈물을 흘린 탓에 반쯤 부은 얼굴로 미소짓듯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제발 다치지 말고 돌아와."
퍽!
요하나가 레이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박았다.
키스를 하려다 실수한 게 아니고, 진짜로 그냥 박치기를 하듯 가져다 박았다.
짜릿한 고통에 레이가 악 소리를 내며 자기 입술을 움켜쥐었다.
워낙 강하게 부딪친 탓에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는데, 그건 요하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피가 흐르는 서로의 입술을 확인한 레이와 요하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히히히..."
더는 숨기지 않고 흘려내는 눈물과 웃음이 그동안 쌓여왔던 두 사람의 섭섭한 감정을 부족하게나마 해소해주었다.
레이는, 웃다가 훌쩍이다를 반복하는 요하나를 옆에 앉혀두고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하나는 평소처럼 투덜대면서도 평소보다 훨씬 생기 있게 웃어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제국에 황도에 군세가 결집하고 있었다.
이제 곧 마경으로 향해야 한다.
레이는 제국의 수호자이자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군단의 선두에서 마지막 역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뒤, 요하나에게 오늘 전하지 못했던 남은 이야기를 고백하리라 마음 먹었다.
영광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