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3)
319화
레이는 울트와의 만남을 며칠 더 미루었다.
그 기간 동안 레이는 카렌과 알레시아의 심적 안정을 위해 시간을 많이 들였다.
카렌과 알레시아는 레이가 사근사근하게 곁을 지켜주자 입덧 때문에 고생을 하는 와중에도 밝게 웃었다.
한편, 레이는 루나가 자주 모습을 감춰서 신경이 꽤 쓰였다.
어디를 갔다 왔는지 물어봐도 잠시 바람을 쐬다 왔다는 답만 돌아왔다.
혹시 백작령의 결계 강화 작업을 벌써부터 돕고 있는 것일까.
며칠 정도 카렌과 알레시아와 시간을 보낸 레이는 또 모습을 감춘 루나를 찾아볼 겸 시그니 산맥 방향으로 향했다.
그렇게 산맥 근방을 돌다 보니 로필렌과 마주칠 수 있었다.
로필렌은 결계 강화를 위해 시그니 산맥에 가득한 마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레이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로필렌이 곧장 무릎을 꿇었다.
"오셨습니까?"
레이는 로필렌이 예를 갖추는 걸 제지하지 않았다.
몇 년 전만 해도 로필렌이 저렇게 예를 갖추면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허나 이제는 고위 마법사가 레이에게 예를 갖춘다고 해도 이상하게 볼 이유가 없었다.
그 변화가 새삼스레 다가와 피식 웃은 레이가 로필렌에게 물었다.
"루나는?"
"스승님은 여기 안 계십니다."
"같이 작업하던 거 아니었어?"
"아직은 잡다하게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어서, 제가 먼저 그런 것들을 끝내놓으면 도와주실 예정입니다."
"그래?"
레이는 고개를 끄덕인 뒤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세계수가 보여준 환영 속 미래에서도 레이는 비슷한 장소에 서 있었다.
이렇게 직접 와 보니 환영 속 미래의 환경이 얼마나 극심하게 변화했는지 좀 더 분명히 느껴지는 듯했다.
"로필렌."
"예."
"지미의 영지로 동행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돼."
그럭저럭 진지하게 하는 소리였다.
억지로 여기 남겼다가 결계를 제어해야하는 로필렌이 내빼기라도 하면 도리어 백작령이 더 위험해질 수 있었다.
로필렌은 레이의 속뜻을 어렵지 않게 파악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로필렌을 향해 레이의 신뢰는 부족한 듯했지만, 로필렌은 그게 딱히 억울하지는 않았다.
"옮기기 힘든 연구 자료가 많습니다. 저까지 떠나면 다 폐기해야겠죠."
루나의 머릿속에는 전부 저장되어 있겠으나 로필렌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또한 연구 자료가 아니라고 해도 로필렌은 되도록 레이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존하께서 이어주신 루나와의 만남은 제 일생일대의 행운이었습니다. 평생 얻지 못하리라 여겼던 지식의 바다를 체험했고, 세상의 끝이라 여겼던 벽 뒤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로필렌은 자신의 재능으로는 그 거대한 벽을 넘어서긴커녕 벽에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로필렌은 루나가 바라보는 시야를 잠시라도 공유할 수 있었음에 '만족'할 수 있었다.
결코 채우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욕구를 아쉽게라도 충족한 로필렌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필립스 백작령은 제가 책임을 다해 보호할 테니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부디 뜻하는 바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제국 역사의 정점이자..."
로필렌이 재차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가장 위대한 영웅이시여."
"..."
레이는 잠시 로필렌을 바라보다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고마워."
마탑에서의 첫 만남 이후.
로필렌은 필립스 백작령에서 레이가 원했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로필렌이 만약 딴생각을 품고 수작을 부렸다면 레이도 굉장히 피곤했을 것이고 루나 또한 지금처럼 빠르게 성장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정말 잘해줬어."
진심이 느껴지는 레이의 상찬에 로필렌 또한 웃음 지었다.
*
오시리스 백작령을 습격했던 증오의 사도, 아룬델.
제국은 한 번 모습을 드러낸 아룬델의 추적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갔다.
허나 은신과 습격에 특화된 능력을 지닌 사도가 작정하고 도망치니 제국이라해도 꽁무니를 쫓기조차 벅찼다.
아룬델은 모습을 감추고 있던 암흑정령사들의 도움까지 받으며 믿기 힘든 속도로 대륙을 횡단했다.
그는 결국 알리모로 진입했고, 이후 금지된 숲 안쪽에서 모습을 감췄다.
남아있는 흔적을 제국이 분석한 결과 아룬델은 마경으로 향했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되었다.
마경 내부에서 아룬델이 게릴라 전술을 펼치면 원정군에게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아룬델의 습격을 방비하기 위해선 최소 로드 급 하나 이상의 전력이 발이 묶여야만 했고, 그로 인해 전진이 늦어지는 순간 원정은 실패였다.
그렇기에 아룬델의 능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는 울트의 도움이 필요했다.
레이는 상황을 설명하고 울트를 설득하기 위해 디나르 지역에 들러 가디 자작가를 찾았다.
접견실로 쓰이는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리파가 다과를 가져왔다.
"오랜만에 뵙네요."
"응, 잘 지냈어?"
"네, 저는 잘 지냈어요."
리파는 배가 꽤 불러 있었다.
출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는데, 레이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선물을 좀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부녀한테 이것저것 직접 쥐여줘 봤자 가정에 분란만 생기지 않겠는가.
"근데 피에트로 님은?"
"시종장 님은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셨다고?"
"네."
피에트로는 나이가 꽤 많았다.
나이만 고려하면 그의 죽음을 호상이라 불러도 무례한 표현은 아니었다.
리파가 레이에게 편지 하나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시종장 님이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정말 감사했고, 은혜를 제대로 갚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죄스럽다는 말씀도 전해달라 하셨어요."
"..."
전해야 할 것을 전한 뒤 리파가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자 레이는 착잡한 표정으로 편지 봉투를 뜯어보았다.
피에트로가 레이에게 좋은 감정만 지니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악마 숭배자에게 꾀인 피에트로의 아들을 레이가 직접 죽였으니까 말이다.
이러나저러나 그는 귀하게 키운 아들을 잃었고, 그 아픔을 남은 평생 간직하고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피에트로가 남긴 편지에는 역시나 아들을 잃은 아픔에 관한 감정은 조금도 표현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레이가 울트를 구해준 덕분에 울트가 무사했으며 자신 또한 마지막 순간에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거 그냥 마지막에는 편하게 한마디 좀 하시지."
레이는 시원섭섭한 감정을 느끼며 가볍게 투덜댔다.
그때 울트가 접견실로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속이 깊은 분이셨지요. 제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셨습니다. 덕분에 편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아들 둘이 나란히 아버지 속을 썩였군."
가볍게 쏘아붙인 레이가 티티를 안아 들고 오는 울트를 돌아보며 손을 휘저었다.
"뭐, 그리고 우리밖에 없는데 어색하게 예의 차리지 말고 편하게 얘기하지?"
"원한다면."
울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울트의 품에 안겨 있던 티티는 '아우아' 같은 옹알이를 닮은 소리를 내며 다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이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울트에게 물었다.
"근래 정신이 돌아오신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으신가?
"없다. 계속 나빠지기만 하셨지."
"그래... 이쪽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
레이는 자기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올리고는 자세를 다시 잡았다.
그리고 레시나, 게네시스, 세계수 그리고 마경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관해 알고 있는 전부를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레이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은 울트는 회한의 감정에 잠긴 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울트는 고개를 내려 과자 부스러기를 여기저기 흘리며 옹알이를 하는 티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고 긴 여행의 종착점이... 내게 다가오는군."
"어으아?"
티티는 눈물을 흘리는 울트의 모습에 당황한 듯 울트의 뺨을 손으로 비벼주었다.
과자 부스러기가 뺨에 잔뜩 묻었지만 울트는 개의치 않고 웃어주었다.
"...레이, 묻고 싶은 게 있다."
"말해."
"저주를 해결한다고 해도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오지는 않겠지?"
"그래."
"그럼 저주를 해결하는 게 과연... 그녀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울트는 울적함이 깃든 목소리로 투정했다.
물론 울트는 레시나의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목숨을 걸 생각이었다.
허나 이제 와서 저주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레시나에게 남은 것이 껍데기밖에 없음이 괴로울 뿐이었다.
울트는 미약한 기쁨과 거대한 참담함이 뒤섞인 흐느낌을 조용히 삼켰다.
그때 레이가 탁자 위에 팔찌를 내려놓았다.
"이 아티펙트를 통해 리실로테가 창조한 인공 지능과 대화할 수 있어."
"...?"
"그리고 이 인공 지능의 기반이 된 인격이 레시나야."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당황하는 울트에게 레이가 감추고 있던 정보를 마저 밝혔다.
"리실로테는 먼 미래에서라도 레시나가 저주에서 해방되었을 때... 레시나가 잃어버린 인격과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안배를 남겼어."
물론 한계는 있었다.
복사해두었던 인격과 기억을 백지 위로 덮어씌우는 것을 과연 회복이나 부활이라 정의할 수 있는가... 뭐 그런 철학적인 논의는 제쳐놓더라도.
"너희 가문이 희생했던 600년의 세월은 끝까지 공백으로 남을 거야."
그 고통스럽고도 따뜻했던 기억들은 되찾을 수 없다.
허나, 레시나가 완전히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울트에게는 충분했다.
"네가... 무의미했던 나의 삶과 고통에 의미를 부여해주는군."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게 마지막 기회가 될 거야. 그러니... 남은 삶을 걸고 의무를 다해."
"기꺼이 그리하도록 하지."
울트는 활짝 웃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
"혹시라도 모든 의무를 다하고도 내가 살아남는다면, 남은 삶은 당신에게 헌신하도록 하지."
"뭐, 그럼 내 딸내미들이나 지켜주..."
레이는 말을 하다말고 울트와 티티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인상을 구기며 말을 바꿨다.
"내 딸내미들한테 접근하지 마."
"..."
울트도 레이를 따라 인상을 구겼다.
*
울트와의 이야기는 잘 끝났다.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울트를 설득하기 위해 거짓말 따위를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레이는 디나르에서 할 일을 끝냈지만, 바로 돌아가지 않고 디나르 지역을 거닐었다.
이곳도 과거에 비해서는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특히, 예전에는 필립스 백작령 쪽으로 가기 위해서 산길을 통과해야 했는데 지금은 길이 뻥 뚫려 있었다.
본래는 이런 식으로 길을 뚫는 공사를 하려면 정말 큰 돈을 들여야 했다.
허나 루나와 로필렌이 마법 실험을 겸해 두 지역을 막아서고 있는 언덕 하나를 갈아준 덕분에 필립스 백작은 부담 없이 새롭게 길을 뚫는 공사를 진행했고, 그로 인해 두 지역의 왕래가 굉장히 편해졌다.
그것 말고도 디나르는 예전에 비해 많이 발전했고 또한 많이 활기차졌다.
레이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길거리를 헤맸다.
찾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주변 풍경이 너무 많이 변해 쉽사리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헤맨 끝에, 어느 민가 앞에 도착한 레이는 긴가민가하며 턱을 매만졌다.
몇 년 사이에 새롭게 지어진 눈앞의 민가는 꽤 실용적이고 멋들어져 보였다.
허나 새롭게 지어진 민가는 레이에게 있어 답을 찾기 어렵게 만드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곳이 찾던 곳이 맞나 고민했다.
허나 아무리 고민해봐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레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뒷목을 매만지고 있는데,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예요."
"..."
레이로부터 이십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민가 앞에... 루나가 서 있었다.
레이가 말없이 걸어가서 루나 곁에 섰다.
루나 앞에 있는 민가 또한 몇 년 사이 새롭게 지은 건물이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지금 서 있는 장소에서 그리움을 느꼈다.
"여기야?"
"네."
"그래, 여기구나..."
그래, 여기가... 우리가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장소였다.
레이가 변해버린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다 눈가를 한 번 쓱 매만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루나가 레이를 향해 두 팔을 뻗은 채 레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가 피식 웃으며, 그날처럼 루나를 업어주었다.
그리고는 그날처럼 길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거리를 걷다 보니 어렴풋하게만 남아있던 그날의 추억들이 조금씩 더 뚜렷하게 되살아났다.
처음 루나를 만났을 때 이렇게 업어주었다.
루나를 업은 채 열심히 뛰어 디나르를 벗어난 뒤 잭이 운영하는 과일 가게를 찾아갔다.
잭이 아직 자기 가게에 사과 주스를 구비해두고 있으려나.
레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길거리를 걷는데 루나가 레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레이."
"응?"
"천천히 가요."
"...나 허리 아픈데?"
그날 9살 먹은 몸뚱이로 루나를 업고 뛰느라 허리가 휠 뻔했다.
8살 먹은 루나가 몸이 가볍긴 했어도 9살 먹은 레이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빨리 과일 가게에 도착해야 루나를 내려놓을 수 있을 텐데.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로 그리 투덜거린 레이가 걸음걸이를 늦추었다.
"그래, 천천히... 가자."
레이는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흘러가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보폭을 맞춰주길 바라면서, 그렇게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