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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318화 (318/446)

영광 (2)

318화 

레이와 루나가 필립스 백작령으로 귀환했다. 

역시나 꽤 많은 이들이 레이와 루나를 마중 나왔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필립스 백작은 영 심각해 보이는 얼굴로 레이와 간단한 인사만 나눈 뒤 자리를 비켜주었다. 

필립스 백작이 자리를 비키자 벨라가 다가와 레이에게 두 팔을 뻗었다. 

"아들, 잘 다녀왔어?" 

벨라는 그리 물어보며 레이를 안은 뒤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었다.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손짓에 레이가 피식 웃었다. 

"응, 엄마. 잘 다녀왔어." 

"우리 아들 못 본 사이에 더 마른 거 같은데... 식사는 잘 챙겨 먹고 있지?" 

벨라가 레이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매번 믿음직한 아들이라 말은 하지만, 벨라는 아직까지 레이가 장성했다는 게 잘 와닿지 않았다. 

세리아에 비해 겉으로 표현을 덜 해서 그렇지 벨라 또한 여전히 레이가 사춘기 소년쯤으로 보이고는 했다. 

"젊다고 아무 때나 끼니 거르고 그러면 안 돼." 

"아이고, 엄마. 얼굴 보자마자 잔소리야?" 

레이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투덜대며 벨라를 마주 안았다. 

벨라의 포근한 온기를 느끼며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쉰 레이가 옆을 돌아보았다. 

카렌이 묘하게 어색해 보이는 표정으로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레이는 카렌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슬그머니 물었다. 

"표정이 좀 이상한데? 숨겨둔 이야기라도 있어?" 

"어? 아... 그... 이따가! 집에서 할게. 집에 가서 얘기해줄게." 

"알았어. 아직 날도 추운데 무리하지 말고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어." 

레이가 그리 권유하자 카렌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카렌이 그럼 기다리고 있겠다며 한 발자국 물러서자, 그 틈을 곧장 레아가 파고들었다. 

레이와 카렌 사이에 불쑥 끼어들어 자리를 차지한 레아가 해맑게 웃었다. 

"오빠!" 

"..." 

레이는 레아를 보고 마침 걸렸다 싶었다. 

아직도 레이는 환영 속에서 레아에게 머리카락을 쥐어뜯긴 고통이 생생했다. 

대체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하나 레이가 고민하고 있는데, 레아가 호기롭게 외쳤다. 

"레아가 준비한 오빠 선물!" 

"...선물?" 

"선물!" 

레아가 방방 뛰며 간소하게 포장된 선물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레아의 선물을 건네받은 레이가 포장을 뜯어보았다. 

포장 안에는 목도리가 들어있었다. 헌데 어째 목도리의 상태가 썩 좋지 못했다. 

분명 시장에서 샀을 텐데, 레이는 이런 물건을 돈 받고 판 새끼의 얼굴이 참으로 궁금해졌다. 

레이가 깝깝해하며 미간을 찌푸리려는 순간 벨라가 한 마디 덧붙였다. 

"우리 딸이 오빠 주려고 열심히 만든 거야." 

그 말을 듣고 레이는 목도리를 다시 살폈다. 

목도리는 일단 좀 짧았고, 뜨개질을 하다 실수를 반복했는지 무늬도 들쭉날쭉했으며 보푸라기도 많이 일어나 있었다. 

헌데 또 중간중간 멀쩡한 구간이 있었는데, 딱 봐도 벨라의 솜씨였다. 

오히려 이렇게 대놓고 상태가 불량하니 진짜로 레아가 직접 짰구나 싶었다. 

며칠 동안은 하루종일 고사리손으로 이것만 붙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레아가 하루종일 어설픈 뜨개질을 하다가 잠이 들면 벨라가 지나치게 꼬여있는 부분을 다시 풀어서 짜주었을 테고 말이다. 

"..." 

레이가 레아를 내려다보았다. 

레아는 레이를 향해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칭찬을 바라는 건지, 아니면 선물의 대가를 바라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레이는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 레아를 들어서 안아주었다. 

"레아." 

"응!" 

"선물 고마워, 잘 쓸게." 

레이가 그리 말해주자 레아가 뿌듯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레이는 목도리를 잠깐 자기 어깨 위에 얹은 채 젖살이 여전한 레아의 뺨을 양손으로 쥐고 비볐다. 

만약 환영 속의 미래에서 장성한 레아가 꼴통짓을 하고 있었다면 목도리고 나발이고 얼굴을 보자마자 쥐어박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레아는 죽어버린 자기 오빠의 딸내미와 마누라를 챙기겠다고 미래에서 열심히 고생 중이었다. 

말 안 듣는 조카 때문에 투덜거리던 레아의 모습을 떠올리니 레이는 참...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그래도, 이 녀석이 내 고생을 아주 모르지는 않았구나 싶어 그냥 웃음이 또 나왔다. 

"레아." 

"응!" 

"목도리 예쁘네. 우리 동생이 손재주가 좋아?" 

"엄마도 그랬어. 레아는 그림도 잘 그리고 뜨개질도 잘해. 레아는 손재주가 좋아!" 

"그래그래, 다음엔 오빠가 레아한테 예쁜 목도리 선물해줄게." 

레아가 정색했다. 

"레아는 목도리 싫어. 레아는 오빠처럼 부자 아니니까 정성보다 비싼 게 좋아. 다른 거 선물해줘." 

"우리 동생이 매를 버는구나." 

마중을 나와준 모두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레이는 필립스 백작에게 따로 부탁을 하나 전달하고는 알레시아와 먼저 식사를 하게 되었다. 

평소 같으면 알레시아는 레이와 함께 식사를 하며 환하게 웃었을 테지만, 어째 오늘따라 죽상을 한 채 깨작거리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레시아는 필립스 백작 앞에서 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쳤다. 

하지만, 막상 정말로 입덧이 강해지는 시기가 찾아오니 이게 참 죽을 맛이었다. 

"끄흐으으..." 

알레시아가 음식 냄새를 맡고 괴로워하며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고 레이가 가볍게 웃었다. 

"알레시아." 

"왜 부르느냐 나의 가사여어..." 

"못 본 사이에 살이 좀 붙었다?" 

"...!!" 

레이의 폭언에 충격을 받은 알레시아가 제자리서 흐물거렸다. 

아니 저게 입덧 때문에 고생하는 연인을 앞에 두고 할 소리인가? 

입덧 오기 전에 좋은 음식을 미리 챙겨 먹어 무게가 조금 늘긴 했지만 살이 눈에 띄게 찐 건 아니었다. 

흐물거리는 알레시아를 보고 낄낄 웃은 레이가 손을 휘저었다. 

"농담이야, 농담. 지금 입덧 때문에 힘들지? 식사는 조금씩 자주 하고, 너무 힘들면 당장 억지로 먹지는 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이야기하고." 

"...?" 

알레시아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아직 임신 사실에 관해 레이에게 밝히지 않았는데, 레이가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저런 말을 하자 생각이 잠깐 정지했다. 

뒤늦게 레이의 말을 이해한 알레시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알고 있었느냐?!" 

"세계수 만났을 때 잠깐 미래를 봤는데 너 닮은 딸내미더라. 카렌도 딸내미고." 

"...!!" 

알레시아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연거푸 듣고 입을 떡 벌린 채 굳었다. 

레이는 굳어있는 알레시아에게 다가가 식탁 위의 음식을 옆으로 치운 후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입덧 때문에 몇 주 더 고생하겠네. 불안했을 텐데 그동안 곁에 못 있어줘서 미안해." 

"오오...! 나의 기사가 남편처럼 구는구나...!" 

알레시아가 싱글벙글 웃었다. 

레이가 이리 친절하게 나오니 어째 입덧을 시작했을 때보다 임신했다는 실감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레이는 즐거워하는 알레시아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날짜 계산을 해보면 안정기에 들어서려면 몇 주 더 있어야 한다. 

마경에 관한 이야기는 그때까지는 숨겨야 할 것 같았다. 

또한 마경에서 반드시 생환해야 할 이유가 더 늘어났다. 

일단, 레이는 쌓여있던 알레시아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함께 웃었다. 

필립스 백작령 영주성 집무실 내부에 방음 결계가 전개되었다. 

필립스 백작, 필립스 백작가를 모시는 기사들, 지미, 매튜 그리고 로필렌까지. 

필립스 백작에게 부탁해 그 모두를 불러모은 레이가 입을 열었다. 

"일단... 중요한 것부터 하나하나 설명드리겠습니다." 

현재 필립스 백작령 사람들도 성검이 뽑혔다는 소식은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변방에 위치해 있다보니 그밖에 정보에 관해서는 뜬소문 정도만 들어본 자가 많았다. 

필립스 백작은 황제로부터 대륙 회의와 마경 원정에 관한 내용이 담긴 서신을 받았지만 다른 이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레이가 찾아갈 때까지 해당 사안에 대해 함구하라는 내용이 서신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그러한 내용이 서신에 포함된 건 레이가 요청해서였는데, 레이는 자신의 지인들, 특히 카렌이나 알레시아가 미리 마경 원정에 관한 정보를 접하고 불안에 떨기를 원치 않았었다. 

레이는 그것까지 포함해 설명해야 할 것들을 전부 집무실에 모인 이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필립스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원정에..." 

"예, 저도 참전합니다. 마경이라고 하니 마냥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할만한 싸움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느껴지는 레이의 말을 듣고 젠킨슨이 한숨을 푹 쉬었다. 

"레이, 그걸 우리보고 지금 믿으라고 하는 소리냐?" 

"아이고, 마스터. 아직도 종자를 향한 신뢰가 부족하시군요." 

"그놈의 마스터랑 종자 타령은..." 

"왜요, 나쁠 건 없잖습니까. 나중에 제국의 영웅을 길러 낸 지도자로 이름을 남기실 텐데." 

레이가 혼자 낄낄 웃고는 손가락 네 개를 펼쳤다. 

"일단 4주 동안은 이에 관한 정보를 영지 내에서 철저히 통제해주시길 바랍니다. 한창 입덧할 때 충격받으면 안 되거든요." 

레이의 말을 알아들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는 모두에게 확답을 받은 후 본제를 꺼냈다. 

"마경 원정이 시작되면, 원정군에 분열, 혼란, 혹은 동요를 일으키기 위해 악마 숭배자들이 대륙을 들쑤시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방비하기 위해 다들 감시 자원을 총동원하며 노력하고 있지만, 완벽하긴 힘들 겁니다." 

"..." 

"그리고 제 신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황이죠. 저번처럼 제 사람들이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어찌할 생각인가?" 

"원정 시작 전에 황도 인근에 위치한 지미의 영지로 제 사람들을 옮길까 합니다. 황도의 핵심 방위권 안쪽이라 안전하기도 하고 유사시 바로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위험하다 싶으면 아예 황도 안으로 대피도 가능하고요." 

"음... 좋은 생각인 것 같네." 

"40일 안에는 제가 황도로 돌아가 봐야 하는데, 그때 같이 움직일 생각입니다. 그런데 백작님." 

레이가 조금 겸연쩍어하며 물었다. 

"같이 가시렵니까? 뭐...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같이 가시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내 자리를 지키고 있겠네. 영주민들만 덩그러니 남겨놓고 떠날 수는 없잖은가." 

"..." 

"나는 영주의 책무를 다할 테니..." 

자리에서 일어선 필립스 백작이 레이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제 딸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제국의 위대한 수호자시여." 

"...알겠습니다. 걱정 마시지요." 

레이는 조금 착잡한 기색을 내보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백작령의 방비를 강화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강화할 수 있도록 루나와 함께 노력해보겠습니다." 

레이는 울트와 나눠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다. 

허나 울트와의 만남을 하루 미룬 레이는 곧바로 카렌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카렌은 레이를 맞아준 후 어색하게 눈치를 보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레이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카렌의 뺨에 기습적으로 입술을 맞추며 물었다. 

"아들이 좋을 것 같아? 딸이 좋을 것 같아?" 

"어? 어? 어...?" 

당황해서 어버버하던 카렌이 뒤늦게 답했다. 

"그! 아, 아직 잘 모르겠는데에..." 

아들이 좋을까 딸이 좋을까. 

레이를 닮은 듬직한 아들도 좋을 것 같았다. 

레아처럼 애교 많고 사랑스러운 딸도 좋을 것 같았다. 

갑작스레 난제와 마주친 카렌이 헤매는 모습을 보며 레이가 장난스레 웃었다. 

"내가 세계수랑 만난 다음 아주 잠깐 미래를 엿봤는데, 너 닮아서 고집 쎈 딸내미더라." 

"미, 미래...? 근데 나를 닮았는데 왜 고집이 쎄?" 

"너 고집 쎄잖아?" 

"레이도 그렇잖아!" 

"그래, 부모가 둘 다 그런데 딸내미 성격이 얌전할 수가 있나." 

짓궂은 말을 한 레이가 한 번 더 카렌의 뺨에 입술을 맞추고는 카렌을 의자에 앉혔다. 

"너도 요즘 입덧 때문에 힘들지? 쉬고 있어. 식사는 내가 차려볼게." 

"어? 어? 내가 해도 되는데? 내가 할게!" 

"쉬고 있어. 혹시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레이는 계속해서 웃음을 머금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 근심 없어 보이는 웃음소리를, 루나는 집 밖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듣고 있었다. 

"..." 

벌써 하루의 해가 저물어간다. 

루나는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며, 레이와의 마지막 휴가가 될 이 순간을 천천히 기억 속에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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