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17화 (317/446)

영광 (1)

317화 

해가 저물어간다. 

칙칙해져가는 하늘처럼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레이와 루나는 말없이 의자에 앉아 멀거니 벽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음울한 침묵에 잠겨 있던 레이가 자기 뺨을 매만졌다. 

"..." 

어둡게 침전할 것만 같은 의식을 억지로 끌어올린 레이가 루나를 돌아보았다. 

마경에 가겠다고 결심한 이상 해야 하는 일은 확실히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레이가 해결해야 할 사안 중에서는 반드시 루나와 논의해야 할 것이 있었다. 

레이는 마음을 다잡고 물었다. 

레이가 레아의 생존에 집착하는 건 벨라가 레아를 가장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헌데 레아의 생존에 필수적인 사안에 대해 이리 덤덤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레이는 정말로 마경 원정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응... 자신 있어." 

레이가 재차 고개를 끄덕이자 루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정확히는 창문이 아니라, 바깥의 풍경을 출력해주는 황성 내부의 디스플레이에 가까웠다. 

"용오름, 기억하죠?" 

"어, 기억하고 있어." 

레이가 루나의 시선을 따라 황성의 동쪽 탑을 바라보았다. 

새롭게 탄생한 황족께서 일곱 번째 탄생일을 맞으면, 그날을 기념해 동쪽의 탑에서 하늘 높이 빛을 밝히는 용오름 의식을 치른다. 

그런 설명을 이전에 들었었고, 또한 제국 전반에 유명한 이야기였다. 

"근데 용오름이 왜...?" 

"황족의 심장에 황실의 드래곤하트를 이식하면 자동적으로 용오름이 치솟도록 연동되어 있어요." 

"...!" 

의자에 앉아있던 레이가 몸을 들썩였다. 

용오름에 관한 것은 루나도 최근에서야 정확하게 파악한 정보였다. 

먼 과거에 최초의 황제와 제국의 시조룡이 계약을 맺고 후손을 위한 안배를 준비했다. 

그 안배 중 하나가 드래곤하트의 이식이었는데, 황족의 심장에 드래곤하트를 이식하는 건 외과적 수술이라기보다는 권능을 기반으로 한 의식을 치르는 것에 가까웠다. 

이식을 진행하는 시술자는 어디까지나 의식을 치르고 이식을 보조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이 이제까지 아무리 노력해도 '대체제'를 개발해내지 못한 것은 결국 '권능'을 대체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권능과 연관이 되어있는 문제인 만큼 루나조차 드래곤하트의 이식 과정을 정확하게 분석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무언가'가 있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 정체가 바로 용오름이었다. 

용오름은 최초의 황제와 제국의 시조룡이 맺은 계약과 연동되어 반응을 일으켰다.

대륙을 벗어나 드높은 천공 위에서 드래곤 하트의 이식을 진행해도 무조건 감지되어 용오름이 피어오를 터다. 

루나의 설명을 들은 레이가 입을 뻐끔거리다 물었다. 

"아니... 그럼 예전에 레아한테 드래곤하트를 이식했을 때 왜 반응이 없었던 거야...?" 

"드래곤하트의 파편이 너무 작아서요. 아슬아슬하게, 용오름 현상을 일으키는 역치 아래였어요." 

"..." 

레이는 뒤늦게 서늘함을 느끼며 식은땀을 닦았다. 

정말 운이 조금만 나빴어도 몇 년 전에 목이 날아갈 뻔했다. 

마른 세수를 연거푸 한 레이가 루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어, 음... 해결 방법이 있을까?" 

미래에 레아가 멀쩡했던 것을 보면 방법이 있기는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루나에게는 시간만 있다면 용오름 현상을 회피할 '방법'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황도의 방위 시스템을 재구축하는 과정에서 동쪽 탑의 기능이 정지될 예정이에요." 

프레체스의 습격 사건을 통해 제국은 교훈을 얻었다. 

권능에 지나치게 의지하고 통제되는 방위 시스템은 예측이 불가한 이유로 교란될 수 있다는 교훈을 말이다. 

그래서 황도의 방위 시스템을 인간의 의지로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도록 재설계했는데, 동쪽 탑의 기능을 그대로 남겨두었다간 시스템끼리 서로 충돌이 생길 수 있었다. 

때문에 동쪽 탑의 기능 정지는 필수불가결했다. 

애초에 반드시 필요한 기능도 아니었기에 크게 아쉬울 것도 없었다. 

용오름이야 마법을 활용해 재현할 수 있었고 말이다. 

"논의는 끝났고 몇 개월 안에 기능이 정지될 거예요." 

동쪽 탑에 관한 내용은 제국의 최고 기밀에 속하는 정보이긴 했지만 루나는 아프텔로부터 얻은 곁가지 정보를 통해 그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늦어도 반년 안에 정지하겠죠." 

결국, 그냥 기다리면 해결된 문제라는 이야기였다. 

방위 시스템의 재구축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기에 계획이 뒤집힐 것도 없었다. 

다만, 레이가 그때까지 살아있어야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그러니까... 죽지 마요. 마경에서는." 

"맹세할게." 

레이가 다시금 차오르는 슬픔을 억지로 밀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스페라는 레이를 향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참 난감했다. 

마경 원정에 관한 정보는 스페라 또한 충분히 자세하게 접할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원정을 주장한 레이는 원정의 선두에 서게 될 것이다. 

웬만하면 영광스러운 공을 세울 기회를 얻었음을 축하해주겠지만 이번만은 그게 힘들었다. 

정말 너무나 위험했으니 말이다. 

레이는 헤매는 게 빤히 보이는 스페라의 표정을 보며 선수를 쳤다. 

"자신 있어서 진행한 일이니까 걱정하지 마." 

"어머, 무리한 부탁을 하네요." 

스페라는 그리 답하면서도 레이의 장단에 맞춰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레이가 오늘 당장 마경으로 출발하는 것도 아니니, 스페라는 레이가 원치 않는 무거운 이야기를 안으로 접어두었다. 

두 사람은 마경에 관한 화제를 더는 꺼내지 않고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보니 요하나와 데런이 탄 마차가 도착했다. 

두 사람이 황도를 떠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원래 이지스 휴가 기간이 짧았던지라 이렇게 복귀하게 되었다. 

레이는 마차에서 내리며 반가워하는 요하나를 보고 불쑥 물었다. 

"목걸이는 왜 안 하고 있어?" 

선물한 목걸이가 아무 때나 할 수 없는 물건임을 알면서도 레이는 굳이 그렇게 물었다. 

요하나는 참... 한 번쯤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레이에게 듣자 살짝 울컥한 감정을 느끼며 웃음을 꽃피웠다. 

허나 얼마 못 가 표정을 굳히며 레이에게 물었다. 

"레이, 정말로 성검이 뽑힌 거야?" 

"응."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의아함을 느꼈다. 

만약 요하나가 카렌과 알레시아의 임신 소식을 알았다면 먼저 그 얘기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허나 분위기를 보건대 요하나는 그와 관련된 소식을 모르는듯 싶었다. 

혹시 두 사람이 임신하지 않은 것일까? 

그럴 수도 있었고, 임신했더라도 아직까지 긴가민가할 시기이긴 했다. 

아니면 목걸이를 자랑하는 요하나 앞에서 차마 애 가졌다고 밝히기 어려웠을 수도 있고... 

레이가 고민하는 사이 요하나의 얼굴에 사색이 깃들었다. 

"레이, 혹시 마경에 간다는 소문이 진짜는 아니지...?" 

"갈 거야. 나도 갈 거고." 

덤덤한 레이의 답변에 격양의 빛을 내보이려는 요하나를 레이가 곧장 안아 들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생각한 만큼 위험한 일 아니야. 황제 폐하께서 왜 작전을 인가해주셨겠어. 할 만해서 그래. 벌써부터 걱정하지 마." 

"레, 레이...!!" 

"이렇게 엇갈리게 되어서 너한테 미안한데, 나는 또 필립스 백작령에 가봐야 해. 방비해야 될 게 있어서 백작님과 논의를 좀 해봐야 해서." 

아직까지 악마숭배자들은 대륙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했다. 

레이는 그게 좀 웃겨서 잠깐 헛웃음을 삼켰다. 

타락한 드래곤, 프레체스가 만약 마경으로의 원정을 원치 않았다면 대륙 회의가 열린 시점에서 몸부림을 쳤어야 했다. 

어떻게든 비실비실한 마족이라도 보내 여기저기 사보타주를 진행해 대륙의 여론이 모이는 것을 방해해야 했다. 

허나 프레체스는 아직까지 참 얌전하게 굴었다. 자기가 벌인 도박판이 깨지지 않도록 신경써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원정이 시작된 이후에는 다시 수작질을 부려올 수 있었다. 

다들 그러한 수작질을 대비하기 위해 논의 중이었고, 레이 또한 많이 고심하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레이와 가까운 이들이 습격당한 전적도 있지 않은가. 

최대한 단단하게 대비해야 했다. 

"하아..." 

한숨을 쉰 레이가 데런을 향해 다가갔다. 

레이의 품 안에서는 요하나가 레이의 등을 두들기며 '내가 어떻게 네 걱정을 안 하냐'며 울먹이고 있었다. 

레이가 착잡한 얼굴로 데런에게 말했다. 

"원정 문제 때문에 황도도 많이 부산스러울 거야. 두 사람 다 당분간은 멀리 돌아다니지 말고, 이지스에서 몸 관리하면서 잘 지내고 있어." 

"...예, 형님. 잘 다녀오세요." 

"그래, 고마워." 

레이는 데런의 어깨를 한 번 쳐준 후 아직까지 등을 퍽퍽 치고 있는 요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요하나는 답답함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결국 백작령에 잘 다녀오라며 레이를 배웅해주었다. 

레이는 배웅을 받으며 루나와 함께 필립스 백작령으로 출발했다. 

조용한 마차 안에서 레이는 자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미래의 환영 속에서 레아에게 머리카락을 쥐어 뜯겼던 고통이 아직까지 생생했다.

표정이 묘해지는 레이를 향해 루나가 입을 열었다. 

"...레이." 

"응?" 

"나는 처음 보육원으로 가는 길에 레이가 나를 사창가에 팔아넘기려는 줄 알았어요." 

"...하하하." 

잠깐 기억을 되새겨보던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루나를 처음 보육원으로 데려가는 길에 홍등가를 통과해야 했는데, 그때 루나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긴장했던 기억이 레이에게도 남아 있었다. 

"빨리 지나가려고 손목을 잡아끄니까 걸음이 더 빳빳해졌었지." 

레이가 루나를 바라보며 낄낄댔다. 

그 뒤로도 레이는 필립스 백작령에 도착할 때까지 루나와 계속해서 옛날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잊혀져 가던 기억을 루나 덕분에 하나하나 떠올려 가며 레이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즐겁게 웃었다. 

필립스 백작령의 영주성에서. 

알레시아는 교양 있는 귀족답게 독서를 하는 중이었다. 

헌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알레시아 님!" 

"레아로구나.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알레시아가 그리 물었건만 레아는 탁자 위에 놓인 책을 바라보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우와! 엄청 예쁜 책이다! 레아가 구경해도 돼요?" 

알레시아가 읽던 책은 고급스러운 가죽 커버로 꾸며진 책인지라 단숨에 레아의 시선을 빼앗았다. 

레아가 책을 구경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자, 알레시아는 읽고 있던 책의 제목을 다시 확인했다.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님] 

알레시아가 책을 옆으로 치우며 레아를 핀잔했다. 

"이건 열두 살부터 읽을 수 있는 책이니라." 

그 내용물이 12세 이용가는 아니었지만 알레시아 기준에서 열두 살이면 알 거 다 아는 나이였다. 

레아의 시야에서 책을 완전히 치워버린 알레시아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 

"아! 오빠가 곧 올 수도 있대요!" 

"음, 그 소식은 나도 들었구나." 

"오빠 선물! 오빠 선물 묻고 싶어서 왔어요." 

"나의 기사가 어떤 선물을 가져올지 내가 어찌 알겠느냐?" 

"아! 레아가 오빠한테 줄 선물이요. 오빠한테 줄 선물을 묻고 싶어서 왔어요." 

선물은 주고받는 것이다. 

레아는 그 당연한 진리를 최근에 확실히 깨달았다. 

더군다나 벨라가 레아에게 바람을 조금 넣어주었다. 

오빠에게 선물을 해준다면, 오빠는 더욱 큰 선물을 레아에게 되돌려 줄 것이라고 말이다. 

그 덕분에 레아는 요즘 레이에게 줄 선물을 열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똑똑하고 품위있는 귀족인 알레시아라면 좋은 답을 알려줄 것 같아 이리 찾아온 것이었다. 

"알레시아 님도 오빠 선물 같이 할래요?" 

"음, 나는 이미 나의 기사에게 줄 선물을 준비해 놓았느니라." 

"정말요? 어떤 선물요?" 

"여기 있느니라." 

알레시아가 그리 말하며 자기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뱃살이 선물이에요?" 

이런 씹... 순간 애를 상대로 발끈할 뻔했던 알레시아가 마음을 다스리며 대꾸했다. 

"네가 생각해둔 선물이 따로 있느냐?"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용돈 모았어요!" 

레아가 내미는 주머니 안에는 제국 금화가 여러 개 들어있었다. 

꼬맹이가 받은 용돈을 모은 것치고 꽤 액수가 컸지만, 그래 봤자 이 근방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은 한계가 있었다. 

알레시아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음... 어차피 나의 기사는 부자이니라. 그러니 선물의 금액보다는 정성이 중요할 것이다." 

"정성? 정성은 어떻게 선물해요?" 

"정성을 들일 수 있는 선물을 찾아보거라. 으음... 겨울이 다 지나가서 아쉽기는 하다만." 

괜찮은 생각을 떠올린 알레시아가 레아에게 물었다. 

"뜨개질을 한 번 해볼 테냐?" 

"뜨개질요...?" 

"목도리라도 한 번 만들어 보자꾸나. 보기보다 나의 기사는 은근히 그런 것에 쉽게 감동을 받는 남자이니라."

"마경에 가기 전에 레아에게 드래곤하트를 이식해줄 수 있어?" 

"싫어요. 다녀와서 해줄게요." 

"...알았어, 고마워." 

레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경에서 죽지 않고 귀환할 수 있다는 레이의 주장을 루나가 이제 와서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하다못해 레아의 생존이라도 담보로 잡아야겠다는 것처럼 말하는 루나를 향해 레이는 씁쓸히 웃어주었다. 

여전히 가득 충혈된 눈동자로 자책의 감정을 드러내는 레이에게 루나가 물었다. 

"그렇게 자신이 있나요?" 

레이에게 가장 우선인 게 벨라과 관련된 일임은 루나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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