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2)
316화
레이는 최근 자주 사색에 잠겼다.
그 사색이란 건 대개 의미 없는 고찰이었다.
과거를 돌아보며 내가 어떻게 했어야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그런 망상들이 대부분이었다.
잘못된 선택들과 실수들을 하나씩 되짚어가며 고민을 이어가다 보면 시간이 금세 흘렀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고민해보아도 완벽한 해피엔딩을 향한 그림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이제껏 레이는 반드시 해결해야한다고 생각한 사안에 자기 수명을 갈아넣었고, 지금 와서 돌이켜봐도 그러한 판단이 크게 틀렸던 적은 없었다.
동생의 존재가 거슬리긴 했지만 벨라가 레아에게 보여주었던 진실된 미소를 곱씹다 보면 레이도 그냥 웃음이 나오고는 했다.
레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능력의 한도 내에서 최선의 결과를 냈다.
다만, 정을 주었던 아이들과 어설픈 거리감을 유지하며 방황한 것은 명백한 레이의 실책이었다.
무엇보다 레이는... 진즉 루나를 더욱 신뢰해주지 못한 것이 참 많이 후회되었다.
루나는 너무나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레이는 그녀가 잘못된 방향으로 변할까봐 두려웠다.
아이들은 성장해가며 성격과 가치관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레이는 그러한 변화를 확실히 통제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루나가 혹시라도 엇나갈까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다.
엇나간 그녀를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레이가 루나에게 일찍이 모든 속내를 털어놓지 못한 것은, 그러한 두려움에서 기반된 경계심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허나 루나는 시간이 지나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 서서 레이를 존중했고 레이에게 충실했다.
언젠가는 레이가 완전히 마음을 열고 감춰두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그러한 루나의 배려를 레이가 알게 되었을 때.
레이는 멍청하게도 다시 한 번 망설였다.
루나에게 상처를 주는 게 두려웠고 홀로 짐을 떠안을 수 있으리라 과신했기에 그리 멍청하게 굴었다.
만약 레이가 진즉 루나에게 솔직하게 기댔다면... 그래, 이야기의 결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루나의 마음에 새겨넣은 상처의 크기를 줄일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홀로 답을 찾아내서 손을 잡아오던 루나에게, 좀 더 따뜻한 추억을 남겨줄 수 있었을 것이다.
레이는 과거를 돌아볼 때마다 그게 참 많이 후회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루나는, 생전 처음으로 레이에게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레이."
"..."
"대답해."
루나의 은색 눈동자로부터 고요한 격정이 흘러나왔다.
레이는 너무나도 생소하게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두려움이 아닌 쓰라림을 느꼈다.
이제껏 루나가 레이에게 간절히 바랐던 소망은 결코 대단치 않았다.
곁에 있어달라. 나와 가까운 곳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있어달라. 고작 그뿐이었다.
그 하찮고 소박한 소망을 들어주기를 바라며 루나는 한결같이 레이의 곁을 지켜주었다.
허나 레이는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서도, 그 마지막 순간까지 루나의 소망을 배신했다.
레이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곱씹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레이가 해줄 수 있는 건 거짓 없는 고백뿐이었다.
"미래의 환영 속에서... 널 만났어."
"..."
"나를 원망하면서도 내 부탁에 얽매여 수십 년을 고독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너를 만났어. 나는... 네가 그런 고통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어."
"그건 내 바람이 아니야."
루나가 단언했고, 레이의 손이 움찔 떨렸다.
루나는 미래의 자신이 레이에게 무엇을 부탁했는지 이미 꿰뚫어보고 있는 것처럼 레이를 추궁했다.
"당신이 만난 내가, 당신에게 뭐라고 애원했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우리의 곁에 있어달라고."
"그게 끝이야?"
"...나를 믿고 기다려달라고 말했어."
"근데."
"..."
"근데 왜 그래."
"..."
"레이, 대답해."
"..."
"대답하라고."
"..."
침묵하는 레이를 향한 루나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갈라져 나갔다.
결국 표정을 일그러뜨린 루나가 거칠어진 목소리로 울분을 드러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러는데...?"
"나는..."
"당신이...!"
격앙을 참지 못한 루나가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다.
"당신이 내 곁에 하루라도 더 머물러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지옥 속을 헤맬 수 있어. 곁에, 곁에 있어달라고 했잖아...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
10년만 더 발버둥칠 시간이 있었어도 루나는 레이의 몸을 회복시킬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냈을 것이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정지시켜 놓은 시공간 안에 레이를 잠들게 하고 시간을 버는 것도 10년 뒤라면 가능했을 수도 있다.
만약 레이가 이러한 극단적인 조치를 원치 않는다면, 너무나도 고통스럽겠지만 그의 의견을 존중해주었을 것이다.
헌데 레이는 고작 10년의 시간조차 루나에게 할애해주지 않으려 했다.
얼마 남지도 않은 삶을 너무나 쉽사리 토막내는 레이를 향해 루나는 거듭해서 애원해왔다.
5년이든 3년이든 1년이든... 그 남은 시간만이라도 이제는 내 곁에 머물며 평화롭고 행복한 추억들을 남겨달라고.
당신이 떠나고 나서도 우리의 따뜻한 나날들을 조금이라도 길게 추억할 수 있도록.
이제는 그만 투쟁하는 삶을 버리고 휴식을 취해달라고 그리 애원했었다.
허나 레이는 마지막까지 루나의 바람을 외면했다.
평생을 정체 모를 불안에 휩싸여 있던 레이는 죽을 자리를 찾아내고 나서야 미소지었고, 루나의 소망은 끝끝내 기만당했다.
루나는 지난날을 후회했다.
차라리 레이에게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억지로라도 레이가 나를 경계하게 만들었다면.
비록 우리의 관계는 멀어졌을지라도 당신은 이리 쉽게 삶을 내려놓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뒤늦게 후회했다.
지긋지긋했던 레이의 거짓말들을 떠올리며 루나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제... 이제 그만해. 내가 당신을 증오하게 만들지 마. 당신이 바라던 모습으로 내가 남을 수 있게 해줘."
루나는 마음 같아서는 더욱 심하게 레이를 힐난하고 저주하고 싶었다.
당신이 이리 떠나면 착한 마법사 따위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겁박하고 싶었다.
허나 차마 그러지 못하는 루나를 바라보며, 레이 또한 눈시울을 붉게 물들인 채 입술을 달싹였다.
"루나, 너는 나를 가장 우선한다고 했지만..."
레이는 참 잔인한 말을 흐느끼듯 떨려오는 목소리로 입에 담았다.
"나는... 그럴 수가 없어."
붉은 하늘의 삭막함이 인간의 정신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레이는 직접 보았다.
그렇기에 레이는, 자신이 고작해야 몇 년 더 사는 것보다 푸른 하늘을 되찾아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레이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은 분명 많았다.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과 감정은 마모되고 희석되기 마련이다.
마음의 상처 또한 평화로운 푸른 하늘 아래서는 새로운 인연들과 교류하며 천천히 치유해낼 수 있었다.
레이는 그렇게 확신했지만, 그러한 믿음이 루나에게만은 통용되지 않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망각이라는 축복이 존재하지 않았다.
8살 때의 기억조차 생생히 떠올려서 재현해내는 루나를 보며 레이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망각의 축복을 얻지 못한 루나는 시간이 흘러도 레이의 죽음을 언제나 눈앞에서 마주보고 살아가야 했다.
그 끔직한 고통을 가끔씩이라도 밀어낼 온기를 기억하기 위해, 루나는 레이에게 조금이라도 오래 나의 곁에 머물러달라고 소망했다.
허나 레이는, 루나 한 명을 위해 다른 모든 이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는 너만을... 우선할 수가... 없어."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잔혹한 아집을 루나에게 전하며 레이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레이는 더 이상 루나의 눈동자를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자꾸만 구역질이 올라와서 숨을 끅끅 몰아쉬며, 레이가 고개를 숙였다.
"루나, 내가 미안해. 내가...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무 많이 잘못했어."
이게 돌이킬 수 없는 과오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레이는, 자신이 떠난 후에도 삶을 이어갈 모두를 위해 루나에게 간청했다.
"이런 나를... 제발 용서해줘."
"..."
루나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레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가 대체 어떤 얼굴로 레이를 내려보고 있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이는 알 수 없었다.
레이는 단지 스스로를 향한 이루 말할 수 없는 혐오와 환멸을 느끼며 턱에 힘을 주고 어깨를 떨었다.
그 한심하고 경멸스러운 모습을 한참 더 바라보고 있던 루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어서요."
루나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레이는 루나가 시키는 대로 곧장 다시 몸을 일으켰다.
루나는 붉어진 레이의 눈시울을 바라보며 참 작위적인 미소를 만들어냈다.
"좋아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당신에게 협력해줄게요. 당신의 곁에서, 당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볼게요."
루나는 일견 밝아보이는 기색으로 레이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대신 나랑 한 가지만 약속해요. 이 마지막 약속 만큼은 반드시 지켜준다고 맹세해요. 그러면 당신을 도와줄게요."
약속의 내용이 무엇인지 루나는 먼저 말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레이는 각오를 다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할게."
"그럼 약속해요.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당신이 떠나갈 때가 되었을 때, 내게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약속해요."
"..."
너무나 쉽고 간단하며 또한 난해한 약속이었다.
레이는 루나가 어째서 이런 약속을 요구하는 것인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것도 부탁하지 말라고? 레아나 벨라, 혹은 다른 지인들을 보호해달라고 부탁하지 말라는 의미인가?
그게 아니라면 '착한 마법사' 따위의 말장난으로 자신을 제어하려 들지 말라는 의미인가?
"..."
아니다. 그런 게 아니었다.
레이는 루나의 은색 눈동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루나가 요구하는 약속에 담긴 의도는 훨씬 더... 명료하고 가혹했다.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때 사랑하는 지인들에게 남길 이야기는 뻔했다.
지금까지 고마웠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행복해라. 오래오래 건강하게 잘 지내라.
나에게 그런 부탁을 남기지 말라고, 루나는 말하고 있었다.
나를 속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대체 무엇으로부터...?
그래, 당신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
루나는 여전히 레이를 향해 예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하늘의 색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늘이 푸르게 물들어 있든 붉게 물들어 있든...
망각을 모르는 그녀의 눈에는 레이가 떠난 세상은 영원히 잿빛으로 물들어 있을 테니까.
그 삭막한 잿빛 지옥에서 너무 오래 고통받지 않고 스스로 떠나갈 수 있도록.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
레이는 실핏줄이 가득 터져나간 눈동자로 루나를 마주 보았다.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나는 그런 약속을 도저히 지켜줄 수 없다.
레이는 당장이라도 그리 고함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누군가 목이라도 졸라오는 것처럼 바람 빠지는 소리만 속에서 들끓었다.
이미 너무나도 큰 죄악을 루나에게 저질렀다.
더 이상 레이는 그녀에게 자신의 이기심을 강요할 수가 없었다.
"..."
레이는 결국 루나를 따라 새끼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루나가 내민 손가락을 향해 다가가는 레이의 손가락이 세차게 떨렸다.
거센 떨림 탓에 자꾸만 빗나가는 레이의 손가락을 루나가 잡아 끌어 마주 걸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서로를 단단히 옭아맸을 때.
충혈된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레이의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루나..."
"..."
"나는... 나는 너를 지키고 싶었어."
치받치는 오열을 참아내지 못하는 레이를 향해.
루나는 그제야 거짓된 미소를 지우고 살포시 웃음을 머금었다.
항상 강한 척을 하고 남과 거리를 두는데 집착하던 레이가 다른 누군가에게 이리 눈물을 내보인 적이 있던가.
루나는 그가 나를 위해 울어준 것에 만족하기로 하며 레이와 함께 눈물을 떨어뜨렸다.
"알고 있어요."
이미 첫만남 때부터 그런 것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루나가 레이의 뺨을 끌어당기며 고백했다.
"내 삶의 색채는 당신이었는걸요."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두 사람의 첫 번째 입맞춤은 짠맛이었다. 정말로, 많이 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