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1)
315화
성검이 뽑혔다.
일이 참 잘 풀렸다.
레이가 기대했던 수준보다도 그림이 예쁘게 그려졌다.
솟아오르는 빛의 기둥으로부터 번져나오는 신성력을 느끼며, 레이는 굳은 얼굴로 술잔을 비웠다.
"..."
성검까지 활용해 퍼포먼스를 벌인 만큼 신성 교단의 여론은 억지로라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성검을 뽑아낸 게 레이였다면 그만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불가능했다.
허나 이미 수많은 명성을 쌓은 교단의 하이템플러가 성검의 주인으로 인정받았다.
대재앙에 직면했을 때 성검을 뽑아낸 하이템플러가 성전을 준비하라는데 거기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서기 위해서는 최고위 성직자라도 자기 직위와 목숨을 걸어야 했다.
잘못하면 진짜 이단으로 몰려 길거리로 끌려가 돌 맞을 수도 있었다.
"..."
다만, 아직은 마경으로의 원정이 성사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레이는 자신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변수까지 모조리 포함한다면 여전히 확률은 반반이 아닐까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레이는 남은 일도 잘 풀리기를 바랐고 반드시 그럴 것이라 믿었다.
허나 술잔을 들어올리는 레이의 얼굴에는 여전히 음울한 기색이 내려앉아 있었다.
*
레이가 생각한 첫 번째 대형 변수는 남부의 변경백 알렉산데르였다.
레이는 알렉산데르를 제대로 엿 먹였고, 알렉산데르가 그걸 아예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성검의 주인이 나타난 것은 알렉산데르에게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선택받은 자'의 탄생은 알렉산데르가 이제까지 남부와 교단에서 쌓아올린 막강한 명성과 영향력을 희석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이건 감정적으로 유쾌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레이는, 알렉산데르가 입장을 선회해 마경 원정을 반대할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있었다.
가장 먼저 남부를 지켜야한다고 쇼를 해놓고 그렇게 말을 바꾸는 게 굉장히 추잡한 일이긴 했다만... 사실 정치꾼들이 매번 하는 짓거리 아니던가.
더군다나 알렉산데르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작자인 만큼 책임 회피를 위한 적당한 핑계쯤은 들고올 터였다.
알렉산데르가 그리 나오면 상황이 아주 개 같이 꼬였다.
여론도 문제였고 무엇보다 알렉산데르는 마경 원정의 필수 전력이었다.
그의 빈자리를 메워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허나 다행히도, 알렉산데르는 성검의 주인이 출현한 이후에도 자기 입장을 번복하지 않고 전쟁 준비에 나섰다.
'의외인데.'
어떤 형태로든 삔또 상한 티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알렉산데르는 충실하게 자신의 발언을 이행하고 있었다.
애향심과 공명심... 그것 외에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다른 목적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레이는 고민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까지의 행적을 보아도 알렉산데르는 이 세계의 기준에서 결코 악한이 아니었고, 또한 충분히 상식적이었다.
이번 원정에 실패하게 되면 인류는 그야말로 멸절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헌데 그러한 위험을 앞에 두고 알렉산데르가 자기 감정과 욕망을 중시한 탓에 어마어마한 뒷수작을 준비해서 뒤통수를 칠 것이라 레이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정도 분별력은 있는 작자였다. 레이를 엿 먹이고 싶었다면 차라리 판을 깨고 말았을 것이다.
자기 이권을 챙기기 위해 수작을 좀 부린다고 해도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 움직일 작자였다.
'그럼 이제...'
첫 번째 대형 변수가 해결되었으니, 두 번째 대형 변수만 해결되면 마경으로의 원정이 성사될 것이다.
두 번째 대형 변수는 다름 아닌 황제의 의중이었다.
레이는 황제의 정치적 리스크를 줄여주기 위해 할 수 있는 걸 다했다.
이 현안에 대해 혼자 대가리를 들이밀고 광대짓을 하며 원정이 실패했을 때 책임을 뒤집어쓸 역할을 자처했고, 제국 남부에 이어 대륙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신성 교단의 여론까지 끌어내주었다.
이 정도면 원정이 실패해도 병력 손실만 크지 않다면 수습 가능했다.
반대로, 만약 이번 원정이 성공한다면 레이는 제국 역사를 통틀어 불세출의 대영웅으로 기록될 것이다.
대영웅의 존재는 황제 입장에서 굉장히 거슬릴 수밖에 없다. 이건 황제의 성향이 문제가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을 권력의 상리(常理)였다.
그래서 레이가 일찍 죽어준다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황제로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여기까지 맞춰주었음에도 황제가 자기 신념 때문이든 다른 이유 때문이든 마경의 원정을 승낙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되면 역시나 원정은 포기해야 했다.
레이는 하르시아처럼 거기를 혼자 쳐들어갈 능력은 없었다.
결과는 며칠 더 기다려보면 나올 것이다.
레이는 술 냄새가 가득한 방에서 술병 마개를 새로 열었다.
*
제국의 황제, 포이보스.
그는 수백 개의 구슬이 벽에 박혀 있는 광장에 홀로 서 있었다.
1000년이 넘어서는 제국의 역사 한가운데 서서, 포이보스는 비어있는 벽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어있던 벽면에 존재했던 구슬은 이미 소멸해서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모로스를 쥐고 가까이 다가가 보아도 비어있는 벽면에서는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홀로...인가."
그는 홀로 기적을 이루고 고독한 최후를 맞이했다.
레이의 발언을 중얼거린 포이보스가 손끝으로 비어있는 벽면을 쓸었다.
백지처럼 잘려나간 역사의 단편.
공백으로 남은 그날의 진실에 관해 알아보려 했으나 포이보스는 어떠한 것도 얻지 못했다.
그날과 관련된 기록은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포이보스는 그날의 허상이 어쩌면 정말로 허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는 했다.
허나 그날을 기록한 허상이 거짓되지 않았다면.
그건 제국의 씻지 못할 원죄였으며 인류가 다하지 못했던 책무였다.
수치스러운 과거를 지우고 이번에도 같은 죄악을 범하려 하는가.
아니면, 이제라도 우리가 그의 죽음에 다하지 못했던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가.
침묵한 채 천 년의 역사를 돌아본 포이보스가 광장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
대륙 회의에서 마경으로의 원정이 가결되었다.
침묵하던 황제가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이상 판이 뒤집힐 확률은 낮았다.
며칠 전 대륙의 수많은 이들이 천공으로 치솟아 축복을 내리는 빛의 기둥을 보았다.
덕분에 민중의 여론 또한 광신이 더해져 하나로 수렴됐기에 원정을 마뜩지 않아하던 권력자들도 계속 몸을 사릴 수는 없었다.
갈 수 있겠군. 레이가 그리 중얼거리며 술병을 새로 따는데 안소니우스가 찾아왔다.
안소니우스의 기세는 이전 만남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레이가 안소니우스의 허리춤에 패용된 성검을 바라보았다.
성검은 안소니우스가 지닌 신성력과 성물의 성능을 살벌한 수준으로 증폭시켜주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성법을 쓰기 시작한다면 그 무력은 로드 급에 필적할 것이다.
정면에서 소드마스터와 맞붙어 승리하는 건 힘들겠지만, 마경 안에서의 전투 수행 능력이라면 안소니우스가 다른 로드 급조차 웃돌 확률이 높았다.
레이는 술병을 내려놓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의외였어."
레이는 자기 '의도'를 안소니우스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는 했다.
다만 안소니우스가 이렇게나 빨리 움직여 곧바로 성검을 뽑아내리라곤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다.
때문에 알렉산데르가 대륙 회의장에 보낸 서신에서 안소니우스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 레이는 조금 놀랐었다.
"뭐... 어쨌든 네가 빨리 움직여준 덕분에 구도가 예쁘게 잡혔어."
"자신 있나?"
이미 몇 번이나 들었고, 앞으로도 자주 들을 질문이었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있어. 나는 이런 일로 도박은 안 해."
레이는 그리 답하며 안소니우스를 돌아보았다.
100년 전쟁이 시작되면 교단의 관계자들 또한 감당해야 할 폐해가 극심했다.
기반이 되었던 남부가 통째로 날아가는데 그 손해가 얼마나 막심할지 굳이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해도 안소니우스가 이리 적극적으로 나선 게 살짝 의아하긴 했다.
마침, 안소니우스는 레이가 궁금해했던 부분에 관해 입을 열었다.
"성녀 후보를 관리하던 부서에서 움직임이 있더군."
"...아, 그래서 네가 이리 빨리 움직였구먼."
"이에 관해 알고 있는 게 있나?"
"뭐어..."
레이는 잠시 고민하다 정확한 진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짓도 아닌 답변을 내놓았다.
"성녀님이 지닌 힘은 무한하지 않잖아. 마경이 확장되는 속도를 조금이라도 억제하려면 아무래도... 소모가 빨라질 수밖에 없지."
"..."
"당연히 몸에 무리도 많이 가실 테고, 그러면 당대의 성녀님께서 성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시기가 줄어들 수밖에 없잖아. 빈자리는 메워야 하고 말이야."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아니었고 안소니우스가 아예 모르던 내용도 아니었다.
돌려 표현했지만 결국 성녀 또한 일종의 소모품이며 억지로 무리시키면 빨리 갈아줘야 한다는 소리였다.
레이에게 확답을 받으니 안소니우스는 자기 누이를 억지로라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싶었지만 누이가 그런 것을 원할 리 없었다.
안소니우스나 레이나... 결국 사람에 묶여 있었다.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으려 하자 레이는 새 잔에 술을 따라 안소니우스에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럼 뒤를 잘 부탁하지."
"무슨 의미지?"
"내가 충동질은 다 끝내놨잖아. 이제 회의장에 너 혼자만 무게 잡고 있어도 잘 돌아갈 거야."
"굳이 네가 빠질 필요 있나?"
"저번에 얘기했지만 나는 원정 끝나고 얼마 못 살아. 원정 가기 전에 고향에 한 번 찾아갈 거야. 거기서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말이야."
레이의 사정을 이해한 안소니우스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일이 틀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도록 하지."
"든든하네. 잘 부탁할게. 역사에 이름 한 번 새겨보자고."
"관심 없다."
"사실 나도 그래."
레이와 안소니우스가 손을 맞잡았다.
*
방 안에 있던 술병을 치운 레이가 말끔한 복장을 꺼냈다.
홀로 옷을 갈아입으며 레이는 무심코 콧노래를 짧게 흥얼거렸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던 복잡했던 상황이 정리되어가자 마음에 가득했던 번민도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물론 레이가 아직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이 몇 개 남아있기는 했는데, 이걸 함께 논의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레이는 연락이 없는 루나를 찾아가보기 위해 행색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중이었다.
기왕이면 훤칠하게 보이고 싶어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넘겨보고 있는데, 방문이 노크도 없이 열렸다.
레이는 넘기려던 머리카락을 마저 넘기고는 방문을 열고 들어온 루나를 돌아보았다.
"아... 왔어?"
덤덤한 척 허세를 부리는 레이를 향해, 루나가 은색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내며 물었다.
"마경에 갈 건가요?"
"응, 갈거야."
"거기서 죽을 거예요?"
"아니야, 돌아올 거야. 되도록이면."
진짜로 돌아올 자신이 있냐.
레이는 루나가 그런 걸 물어볼 줄 알았다.
허나 루나는 전혀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레이는 날 믿나요?"
"응? 그래, 당연하지."
"그렇겠죠. 나는 언제나 당신의 부탁을 순종적으로 이행해주었으니까."
"..."
레이는 잠깐 섬뜩함을 느꼈다.
루나에게 섬뜩함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쏘아붙이듯 감정을 드러내는 루나의 목소리가 너무나 생소해서, 그래서 꼭 다른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아 섬뜩함을 느꼈다.
"당신은, 나를 믿겠죠."
루나가 레이를 향해 웃음을 머금었다.
루나의 웃음은, 레이가 세계수의 환영 속에서 보았던 그녀의 웃음과 닮아 있었다.
"당연히 그렇겠죠. 나는 언제나 당신을 존중하고 언제나 당신에게 충실했으니까."
그런데.
"그 대가가 이거예요?"
"..."
레이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루나가 표정에서 웃음을 지워냈다.
"레이."
"..."
"대답해."